FOOD

포도의 숨겨진 빛깔을 드러낸 '오렌지 와인'의 진면목

포도의 빛깔은 오렌지.

BYESQUIRE2020.10.19
 
 

Orange is the new white

 
(왼쪽부터) 공크 시비 피노 3만원대. 카바이 시비 피노 9만원대.

(왼쪽부터) 공크 시비 피노 3만원대. 카바이 시비 피노 9만원대.

고대 로마제국에도 로버트 파커가 있었다.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저술가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책 〈박물지〉에 179종의 와인을 선별하고 평가하고 정리해 등급까지 매겨둔 인물. 그런데 이 당대 최고의 술 박사인 플리니우스는 이 책에서 와인의 빛깔을 이렇게 분류한다. “와인에는 네 가지 색이 있다. 화이트, 옐로, 레드, 블랙.” 아마도 레드가 로제를, 블랙이 현대의 레드 와인을 말한 것일 테다. 그럼 대체 ‘옐로’는 뭔가? 〈내추럴 와인〉의 저자 이자벨 르쥬롱에 따르면 옐로는 현대의 ‘오렌지 와인’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면 와인은 4종류의 빛깔로 나누는 게 당연하다. 와인 빛깔은 결국 껍질에 있는 색소의 농도와 과즙에 껍질(skin)이 닿아 있는 ‘스킨 콘택트’의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짙은 붉은색의 포도 껍질을 오랜 시간 과즙에 담가두면 레드가 탄생하고, 짧은 시간 담가두면 로제가 탄생한다. 반대로 청포도 혹은 옅은 붉은색의 포도를 짧은 시간 콘택트하면 화이트가, 긴 시간 담가두면 오렌지 빛깔의 마법이 탄생한다. 오렌지 와인은 최근에야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8000년 전 그루지야에서 지면 아래에 거대한 흙 항아리 암포라를 박아두고 길게는 수년까지 숙성시킨 방식이 바로 오렌지 와인의 메소드다. 대체로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슬로베니아 접경 지역인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양조가들이 이 고대 와인의 영혼을 되살려내며 오렌지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이론적으로라면 화이트 와인의 모든 품종으로 오렌지 와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절대 실패하지 않을 품종 하나를 고르라면 개인적으로 피노 누아의 유전적 사촌 격인 피노 그리, 슬로베니아에선 ‘시비 피노’, 이탈리아에선 ‘피노 그리지오’라 부르는 품종을 꼽는다. 슬로베니아 브르다 지역의 강자 ‘카바이’의 시비 피노는 풍부한 산미와 함께 말린 살구나 건포도를 혀에 놓고 굴릴 때 나는 그 간지러운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화이트 와인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비교적 묵직한 타닌감이 눈이 받아들인 정보를 즐겁게 어지럽힌다. 베리 계열의 향과 풋풋한 풀 내음이 은은하게 풍기는 공크 와이너리의 시비 피노는 오렌지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차가운 온도에서 첫 잔을 따른 후 실온까지 느긋하게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향이 폭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