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페나조 시대'의 테니스 팬들은 역사상 다시 없을 축복의 세대다

페나조여 영원하라!

BYESQUIRE2020.11.03
 
 

 페나조여 영원하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스마트 광풍이 휩쓸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빅데이터와 소셜 미디어 지배의 시대? 2020년 이후로 시간을 한정하면 ‘언택트의 시대 한복판’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시대는 스포츠 스타에 따라 정의되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 세계는 ‘메날두의 시대’(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살았고, 미국 프로농구(NBA)로 치면 르브론 제임스 말기, 미식축구(NFL)로 치면 톰 브래디 후기를 살고 있다. 테니스의 관점에서는? 테니스 역사에서 우리가 사는 지금은 ‘페나조 후기’다. 황제 로저 페더러, 흙신 라파엘 나달, 무결점의 노박 조코비치가 글랜드슬램 코트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뜻한다. 2017년 US오픈에서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가 우승한 이래 3년 넘는 기간 동안 이 세명이 13개의 모든 그랜드슬램 대회를 싹쓸이했다. 지금을 특히 ‘후기’ 페나조 시대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5월에 열린 프랑스 오픈부터 2009년 6월 말에 개최한 윔블던까지 18개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페나조 세 명이 나눠 가진 ‘전기 페나조 시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대엔 노박 조코비치가 2008년 호주 오픈 타이틀 하나만을 획득했을 뿐이라 페더러와 나달 둘의 이름만 따서 ‘페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전기니 후기니 나누는 게 큰 의미가 없긴 하다. 지난 2003년 로저 페더러가 윔블던에서 우승한 이후 현재까지 열린 총 70개의 그랜드슬램 대회 중 58개 타이틀은 ‘페나조’가 가져갔다. 페나조의 색상을 지정해 엑셀에서 표로 정리해보니, 70개의 타이틀 중 페나조의 색상을 제외한 성성한 빈칸엔 시대순으로 앤디 로딕(미국), 가스톤 가우디오(아르헨티나), 마라트 사핀(러시아),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아르헨티나), 앤디 머레이(미국),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스위스)만이 이름을 올렸다. 그러니 사실 지난 17년이 통째로 페나조 집권 시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17년이 얼마나 긴 지 감이 잘 안 온다면 2003년에 쓰던 스마트폰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 따윈 그때 있지도 않았으니까. 새로 나온 아이폰이 12세대다. 17년이란 그런 세월인 것이다.
 
테니스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테니스에는 크게 세 가지 타입의 코트가 있다. 론 코트, 하드 코트, 클레이 코트. 그렇다면 언제고 각 타입의 코트에서 잘 치는 사람들 세 명이 지배하던 시대가 이전에도 있지 않았을까? 정확하게 코트별로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빅3 시대’가 있기는 하다. 지미 코너스(미국), 존 매켄로(미국), 비외른 보리(스웨덴)가 함께 지배한 시대가 그랬다. 다만 그 왕권의 장악력은 페나조 시대에 비하면 현저히 약했달까? 이 셋은 함께 활동했던 시절인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동안 약 60%의 그랜드슬램을 점령했다. 페나조의 점령률은 17년 동안 80%가 넘는다. 테니스가 국제 프로 오픈의 역사상 처음 있는 삼인 전제정의 시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시대가 바뀌는 줄 알았다. 후기 페나조 시대가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지난 US오픈부터 시작됐다. 초여름에 열렸어야 할 윔블던이 코로나19로 취소된 데 이어, 8월 말에 열린 US오픈에서 도미니크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일찌감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한 로저 페더러, 미국 내 코로나 확산을 우려한 라파엘 나달이 이 대회 불참을 선언한 게 기회였다. 게다가 유일하게 출전한 페나조의 막내 노박 조코비치마저 16강전 경기 도중 흐른 볼을 코트 밖으로 거둬낸다고 쳐냈다가 이 공이 선심의 목을 강타하며 실격패했다. 이미 스물일곱 살의 나이지만 아직도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기수 소리를 듣는 도미니크 팀(오스트리아)이 US오픈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은 많은 이에게 생경한 감동을 줬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20대의 우승인가?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랐고, 페나조의 아성에 여러 차례 도전했던 그리고르 디미트로프가 도미니크 팀의 우승을 바라보며 남긴 말은 젊은 세대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젊은 세대에게 좀 더 큰 희망이 생겼다”. 1991년생인 디미트로프는 ‘로스트 제너레이션’, 우리말로 하면 ‘꼬인 군번’으로 불린다. 페나조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그랜드슬램이 그의 이력서에 오를 가능성이 사실상 지워졌기 때문이다.
 
예년이었다면 5월에 열려야 했을 프랑스오픈(통칭 ‘롤랑가로스’)이 2020년엔 10월에 열렸다. 이 대회의 배경엔 변화의 열망과 지배자들의 집권 의지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이러한 감정의 전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쪽의 열망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준결승의 구도는 영화로 찍었다면 지나치게 작위적인 스토리라는 얘기를 들을 만큼 대결의 양상이 확연했다. 세계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34)는 그리스의 별 스테파노스 치치파스(22)와, 랭킹 2위 라파엘 나달(33)은 아르헨티나의 넥스트 제너레이션 디에고 슈와르츠만(28)과 붙은 것이다. 벽은 지나치게 높았다. 조코비치는 치치파스와 마지막 세트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먼저 묶인 건 치치파스였다. 20대 초반의 다리가 띠동갑 아저씨의 공을 받아내느라 망가졌다. 치치파스는 세계프로테니스협회(ATP)가 주최하는 다음 두 경기를 뛰지 못할 전망이다. 라파엘 나달은 특유의 리버스 포핸드를 키가 작은 슈와르츠만의 백핸드 쪽으로 집중해 보내며 경기를 지배했다. 세트스코어 3 대 0의 완승. 각각 1번과 2번 시드를 받아 대진표상에서 가장 먼 자리에 배치된 노박 조코비치와 라파엘 나달이 결국 결승에서 맞붙었다. 누가 우승하든 페나조의 시대는 변하지 않는다.
 
라파엘 나달의 리버스 포핸드는 특별했다. 보통 포핸드를 치고 난 라켓은 가슴을 거쳐 어깨 상단 쪽으로 빠진다. 그러나 나달이 리버스 포핸드를 칠 때면 공을 타격한 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든다. 격투기 선수나 가질 법한 괴물 같은 팔근육을 비틀며 톱스핀을 공에 걸어 네트 너머로 보낸다. 그랜드슬램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톱스핀 RPM은 대략 2000~3000대다. 나달의 스핀은 평균 3200가량이며 최대 5000RPM에 달한다. 이렇게 때린 공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찬 무회전 킥처럼 네트를 넘어 ‘뚝’ 하고 떨어진다. 떨어지고 나서가 중요하다. 예상보다 위로 가파르게 튀어 올라 처음 이 샷에 대응하는 상대는 어디서 공을 쳐낼지 감도 잡지 못한다. ‘완벽, 우아함’의 대명사인 페더러도 나달이 말처럼 뛰어다니며 어마어마한 포핸드를 쳐내는 통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날의 조코비치 역시 백핸드로 쳐야 할 공까지 두 스텝을 더 뛰어가 포핸드로 쳐내는 한 살 형 나달을 당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냥 당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게임에서 듀스까지 몰고 가는 접전을 펼쳤고, 나달이 몇 번이나 애크러배틱한 오버헤드 스매시를 날리게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경기를 보며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열망은 머리에서 사라졌다. 다수의 관중들은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대결을 볼 수 있는 ‘페나조 시대’의 테니스 백성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세대라는 것을.
 
불혹의 페더러는 곧 부상을 털고 복귀할 것이다. 1월에 열리는 호주오픈을 시작으로 대략 봄에는 윔블던, 여름에는 롤랑가로스, 가을에는 US오픈이 열릴 것이다. 이 대회들은 참가하는 것만으로 수천만 원의 대전료를 받는다. 가장 적은 상금을 주는 롤랑가로스는 2020년 128강전에 참가한 선수에게 1만 유로의 상금을 지불했다. US오픈은 통이 크다. 128강에만 나가도 6만1000달러(약 7300만원)를 받는다. 땀과 돈과 시대의 열망이 얽힌 이 위대한 왕국에서 페나조여 영원하라.
 
WHO'S THE WRITER?
박세회는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