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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비통의 리히터 '4900가지 색채' 전시 이해하기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서 전시 중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를 이해하려면, 조금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무척 즐거울 것이다.

BYESQUIRE2021.03.31
 
 

리히터,

 
200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전시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4900가지 색채’의 버전 2. 이 작품에는 11개의 버전이 있고, 이번 에스파스 루이 비통 전시에 온 작품은 ‘버전 9’이다.

200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전시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4900가지 색채’의 버전 2. 이 작품에는 11개의 버전이 있고, 이번 에스파스 루이 비통 전시에 온 작품은 ‘버전 9’이다.

리히터가 다다른 경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불가사의’일 것이다. 여기서 불가사의는 ‘고대의 7대 불가사의’에서의 불가사의(wonder)와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영어로는 적당한 단어를 찾기 힘든 불가 용어로서의 ‘불가사의’, 즉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이치’에 가깝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김정희 교수가 2004년 한 학술지에 게재한 표현에 따르면
 
리히터는 양식을 ‘폭력 행위’라고 거부하면서 미술 내의 여러 특징을 수직적·수평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놓은 범주를 무력하게 만들고, 소위 대립적이라고 이해되었던 요소들의 차이를 무시
 
했기에 그의 작품의 다채로움이 다다른 경지는 ‘불가사의’다. 그의 불가사의한 여정을 이해하려면,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던 시절의 리히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히터는 1932년 전후 동독 지역에 편입된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드레스덴에서 쭉 머물지는 않았으며, 여기저기를 떠돌다 1951년에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드레스덴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제대로 된 미술 공부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 역시 이 때다.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독 지역의 예술학교는 ‘이즘’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다. 점령자는 인민의 취향에 맞춘, 일차원적이고 민족적인 형식 안에서 사회주의 계몽을 설파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었다. 혁명의 깃발을 든 남자가 눈발이 날리는 벌판에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전진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대충 맞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평양의 사회주의 혁명탑을 상상해봐도 좋다.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목표였는데, 드레스덴 아카데미는 특히 이 점에서 순종적이었다”고 리히터는 당시를 회상했다. 심지어 “인상주의 태동 이후의 시기를 다룬 책은 빌릴 수도 없었는데, 부르주아의 타락이 시작된 시기로 봤기 때문”이라고 하니 분위기가 어땠는지 그려보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 ‘베티(Betty, Edition 75)’ 앞에서 미술계의 거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 ‘베티(Betty, Edition 75)’ 앞에서 미술계의 거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유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를 꾹 참고 견디며 회화의 기본기를 쌓아오던 리히터에게 찾아온 터닝포인트는 카셀에서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현대미술전 〈도큐멘타〉였다. 카셀을 방문한 1959년, 그는 이 미술전에서 장 포트리에, 루치오 폰타나, 잭슨 폴록의 작품을 만났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압박 속에 있던 예술학교 학생에게 잭슨 폴록은 얼마나 거대한 충격이었을까? 리히터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며 당시에 받은 충격을 회상한 바 있다. 이 전시에서 받은 충격과 악화되는 냉전 상황 속에 리히터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을 시작하기 불과 몇 달 전인 1961년 3월 서독으로 망명했다. 망명 이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그가 사귀기 시작한 친구들이 있다. 독일 미술사의 거대한 이름으로 남은 만프레드 쿠트너, 콘라드 피셔, 시그마르 폴케 등이 그들이다. 당시 이들은 함께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란 명패를 내걸었다. 그 이름부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의 첨예한 대립을 예고한 셈이다. 다만 리히터는 당시에도 자신의 예술이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에 갇히는 걸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은 외양으로 보면 미국에서 유행하던 팝아트의 세례를 흠뻑 받은 독일식 팝아트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1960년대 작품을 일람해보면 ‘독일식 팝아트’라는 단어는 당시 리히터의 작품 속에 숨겨진 다양성을 10분의 1도 담지 못한다.
 
특히 ‘포토 페인팅’과 ‘추상’의 큰 축으로 나뉘는 리히터 회화의 씨앗이 1960년대 서독으로 망명한 리히터의 마음에서 싹텄다고 본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이들이 사진이라고 착각하는 그림’인 ‘Betty’는 리히터의 ‘포토 페인팅’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마치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에 블러 필터를 덧입힌 듯한 이 그림은 물론 사진이 아니다. 리히터가 자신의 딸 베티가 열한 살 때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후 미세한 붓 자국을 내 번지도록 표현한 1988년도 작품. 그러나 그가 ‘포토 페인팅’의 아이디어를 처음 품은 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1960년대의 일이다.
 
그는 1963년 자신의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요새는 주로 사진을 그리고 있네. 잡지의 일러스트나 가족 사진들 말일세. 그 과정에서 일종의 양식적인 문제가 도출된다네”라고 전했다. 어떤 양식의 문제가 도출되는가? 지금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이 편지를 쓰던 시절의 작품인 1966년작 ‘Ema(Nude on a Staircase)’를 보자. 이는 계단을 내려오는 당시의 아내 ‘에마’(애칭)를 찍은 사진을 그린 것이다. 만약 에마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을 직접 보고 그림으로 그렸다면, 이는 어떤 형태로든, 추상이든, 구상이든, 회화의 양식 안에 갇힌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에마를 찍은 사진을 그대로 보고 그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진을 모사하는 과정은 사진이 담고 있는 장면이 아닌 사진이라는 현실의 물체 자체를 모사하는 ‘자연 모방’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새로운 회화 양식의 창조이면서도 기존 양식의 틀을 깨부수는 ‘포토 페인팅’의 고유한 아이디어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싹트고 있었던 셈이다. 추상의 싹도 이 시기에 이미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물감의 질감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회색 모노크롬 페인팅에서 시작한 탐구는 추상에 점점 가까워졌으며, 이후 비재현적인 레이어들을 쌓아 올리는 추상회화 시리즈로 이어졌다. 또한 1980년부터는 두꺼운 물감 층을 스퀴즈로 밀거나 긁어서 우연에 의해 완성되는 작업에 집중했다. 리히터가 그의 추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극한에 달한 작품은 아마도 ‘Strip’ 시리즈일 것이다. 과거 자신이 작업한 추상회화 작업들을 촬영하고 이를 스캔한 후 컴퓨팅 작업을 통해 스트라이프 형태에 달할 때까지 늘려 디지털로 프린트한 작업이다.
 
© Primae / Louis Bourjac Strip (921-5) 2011 Digital print on paper mounted between aluminium and perspex (diasec) 200x4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ndation Louis Vuitton.

© Primae / Louis Bourjac Strip (921-5) 2011 Digital print on paper mounted between aluminium and perspex (diasec) 200x4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ndation Louis Vuitton.

지난 3월 12일부터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전시된 리히터의 기념비적인 작품 ‘4900가지 색채’의 맹아 역시 이 당시 리히터의 머릿속에 뿌리내렸다. 1966년 당시 리히터는 페인트 가게에서 쓰는 색상표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기하학 형태의 ‘스케치(컬러차트)’ 연작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업 색상표의 형태를 그대로 닮은 직사각 형태의 ‘바’를 나열하는 데서 시작했다. 초기의 ‘스케치(컬러 차트)’를 보면 가로가 50cm, 세로가 60cm가 조금 넘는 캔버스에 에나멜 물감으로 가로가 세로보다 조금 더 긴 색상의 ‘바’를 순차적 담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려 넣은 작품 등이 있다. 정말 상업 색상표를 조금 더 크게 그림으로 그렸을 뿐인 당시의 ‘스케치(컬러차트)’는 팝아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대해 리히터는 1980년대에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리히터를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만드는 데 일조한 벤저민 부흘로(Benjamin Buchloh)와의 인터뷰에서 “초기의 컬러 차트는 팝아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남긴 바 있다.

 
© Primae / Louis Bourjac Gudrun 1987 Oil on canvas 250x25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ndation Louis Vuitton.

© Primae / Louis Bourjac Gudrun 1987 Oil on canvas 250x25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ndation Louis Vuitton.

그러나 생각은 자라고 상상은 움직이는 법이다. 이 컬러 차트의 씨앗은 점차 거대한 하나의 미학적 개념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는데, 그 가장 큰 영향은 34세의 나이로 요절한 독일의 미니멀리즘 화가 블링키 팔레르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흘로와의 같은 인터뷰에서 리히터는 컬러 차트라는 작업의 효시가 블링키 팔레르모와 연관이 있느냐는 질문에
 
분명 팔레르모와 그의 관심 그리고 좀 더 후에는 미니멀 아트가 영향을 미쳤을 것
 
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에스파스 루이 비통의 전시에서 상영되는 쾰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Domfenster〉에서는 리히터가 자신의 친구 팔레르모를 언급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블링키 팔레르모를 뜻한다. 1970년대는 리히터의 전기에서 ‘추상 탐구’에 해당하는 시기로, 드디어 색상 견본표 재현의 단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색상을 직접 선택하고,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였으며, 사각형 그리드의 형태와 사용하는 색상의 조합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180가지 색채’ 등의 작품도 있었으나 이후에는 사용하는 색상 그리드의 수를 4의 제곱수로 확장해나갔다. “하나의 그림에서 현존하는 모든 색조를 표현하기 위해 삼원색에 녹색을 더한 네 가지 색을 기초로 연속적인 단계적 차이를 만들어나갔다.” 당시 그의 컬러 차트 작품의 숫자가 4, 16, 64, 256, 1024, 4096으로 늘어난 이유다. ‘4096가지 색채’를 작업한 이후에는 “1024가지 이상의 색상을 만들어내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라며, “그 이상이 되면 연속하는 두 색상 간에 차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쾰른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맡은 리히터는 13세기 창문 장식에 사용하던 72가지 색채 팔레트를 선별하고 이를 활용해 총 1만1500장으로 이뤄진 수공예 유리 장식을 완성했다.

쾰른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맡은 리히터는 13세기 창문 장식에 사용하던 72가지 색채 팔레트를 선별하고 이를 활용해 총 1만1500장으로 이뤄진 수공예 유리 장식을 완성했다.

이번에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전시된 2007년작 ‘4900가지의 색채’는 약 30년간 리히터가 더는 파고들지 않았던 컬러 차트 시리즈의 부활이며 2000년대적 재해석이다. 이 부활에는 쾰른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 영향을 미쳤다. 1248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880년까지 무려 6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쾰른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쪽 면의 창이 전부 훼손되어 일반 유리로 대체되어 있었다. 이 창을 복원하기로 한 커미션 위원회가 선택한 아티스트는 현대 독일 예술의 거장인 리히터였다. 성화가 그려진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예상했던 위원회에 리히터가 제안한 것은 자신이 1970년대에 이룩한 컬러 차트의 재완성에 가까웠다.
 
2006년 공식적으로 커미션 의뢰를 받은 리히터는 아티스트 피를 전혀 받지 않고 중세 시대 창문에 쓰던 72가지 색채로 제작된 1만1500장의 수공예 유리 면으로 창을 디자인했으며, 또한 각 색상을 특별히 고안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무작위로 배열했다. 그렇게 완성한 쾰른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제목이 바로 ‘Domfenster’이며, 이번 루이 비통의 전시에서는 그 작업 과정을 기록한 동명의 29분짜리 다큐멘터리 영상 〈Domfenster〉를 감상할 수 있다. 앞서 블링키 팔레르모의 이름이 언급된다고 밝힌 바로 그 영상이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도착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의 버전 9 전시 전경.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도착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의 버전 9 전시 전경.

쾰른성당 작업과 거의 동시에 리히터는 멈췄던 컬러 차트 연작의 계보를 다시 잇기 시작했다. ‘4900가지 색채’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4900가지 색채’는 앞서의 컬러 차트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전의 작품은 4개의 원색을 활용해 계층적이고 연속적인 색상을 만들어냈다. 즉 ‘1024가지 색채’라는 작품에는 1024가지의 연속하는 색상이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4900가지 색채’에서 우리가 보는 색상은 총 25가지다. 5횡 5열 총 25개의 작은 사각형을 무작위로 배열한 패널 하나를 최소 단위로 하며, 이 패널 196개를 조합해 여러 형태를 완성한다. 이 196개 패널을 어떤 식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4900가지 색채’는 11개 버전으로 나뉜다. 일례로 2008년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최소 패널 4개를 붙인 100개짜리 컬러 스퀘어를 하나의 기본 단위로 삼아 49개의 컬러 스퀘어를 일렬로 전시했다. 모든 컬러 패널을 하나의 사각형으로 모으면 한 변이 7m에 조금 못 미치는 정사각형이 된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정사각형을 전시할 만한 공간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현재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 전시된 버전은 11개의 버전 중 아홉 번째다. 한 변이 5m가 조금 넘는 거대한 정사각형 두 개와 그보다 조금 작은 정사각형 2개 총 4개의 랜덤 컬러 사각형이 전시되어 있는 형태다. 종합해보자면, 그의 컬러 차트 연작은 1960년대의 아주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복잡화의 단계를 거쳐 거대화되고, 다시 단순화의 단계를 거치며 위대한 무작위성을 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론은 예술 작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해석 가능하고 의미를 품고 있는 회화는 나쁜 회화입니다. 무릇 그림은 불가해하고,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하게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사물에서 의미와 이름을 박탈해 우리의 확실성을 빼앗아가며, 관점의 무한한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리히터가 1960년대 중반 자신의 노트에 남긴 이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겐 참으로 맥 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지만, 동시에 모든 감상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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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 게티이미지스 코리아/ 에스파스 루이 비통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