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지금 산책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3개의 전시

5월이 가기 전에 반드시 가볼 것.

BY박세회2021.05.26
팔판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청와대와 경복궁 인근은 사실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산책로다. 그러나 때마침 좋은 전시들이 이 길 근처에서 속속 열리고 있으니 산책을 하면서 슬쩍 들여다보면 어떨까? 물론 산책을 하는 중이니 너무 심각하게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걷기에 집중하며, 상쾌한 공기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Garden of Delete, 마이클 딘

Garden of Delete, 마이클 딘

산책의 시작은 청와대 동편에 바짝 붙어있는 팔판동의 '바라캇 컨템포러리'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는 현재 영국작가 마이클 딘의 〈삭제의 정원〉이 열리고 있다. 갤러리가 처음이라고? 두려워 하지 말자. 방역 수칙만 지키면 입장료도 없으며 궁금한 게 있을 땐 리셉션에 질문을 던지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러나 놀라기는 할 것이다. 〈삭제의 정원〉전시의 문을 열어젖히면 사람 키만 한 구조물 하나가 당신의 눈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너무 고민하지 말자. 우리는 산책 중이니까. 언뜻 보니 마치 건축 폐기물 처리장에서 가져온 듯한 오브제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철근과 콘크리트로 엮인 뭉텅이 사이사이에 평화(peace)를 상징하는 손가락 사인과 주먹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Garden of Delete, 마이클 딘

Garden of Delete, 마이클 딘

이 작가의 작품을 만들어낸 사유의 과정 중에 언어와 기호가 꽤나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층에서 1층의 구조물이 놓인 모양을 보면 문자가 보인다. 굳이 읽어보자면 'HAPPYBROKE', 'SADSBONES', 'WITHSTICKS', 'ANDSTONES'이다. 그러나 그 문자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 상쾌한 공기와 걷기에 집중하며 산책을 이어가자. 갤러리에서 나와 청와대 앞길에서 삼청동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경복궁 동문 앞 쪽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인다.  
무제 95-9-10, 정상화

무제 95-9-10, 정상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정상화〉전이 열리고 있다. 1932년 생인 정상화 화백은 캔버스를 접어 자국을 내 그리드를 만들고 그 그리드의 모양에 따라 안료의 양감을 조절해 아주 멋진 단색조 추상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미술계의 '큰 스승'이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상화의 작품을 여기저기서 다 긁어모아서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흔치 않은 기회다. 
무제 74-F6-B, 정상화

무제 74-F6-B, 정상화

정상화의 작품은, 반드시 실물로 자세히 보기를 권한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캔버스의 균일한 골과 이랑을 안료의 강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고, 그게 마치 구도의 과정처럼 보인다. 대체 어떻게 이런 형태를 완성해 냈는지 경외의 탄식이 새어 나온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드느냐'는 초보적인 질문에 정 화백은 이 전시를 앞두고 잔뜩 모인 기자들 앞에서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그는 "자꾸 똑같은 걸 반복해 만들다 보면,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대한) 철학, 즉 방법론이 생깁니다"라며 "이 작품의 의미가 무엇이냐.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어야 좋은 작품이란 것은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선생님 말씀대로 감상만 하고 의미는 일단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산책 중이니까 갤러리현대로 발길을 옮겨보자. 
Untitled, 박현기

Untitled, 박현기

 
갤러리현대에서는 다른 의미의 거장이 전시 중이다. 세계인인 백남준에 비교해 '가장 한국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불리는 박현기의 개인전〈아임 낫 어 스톤(I'm Not a Stone)〉이 이번 주말(30일)까지 열린다. 1978년부터 1997년까지 약 20년의 작품 세계 전체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는 열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알겠지만, 역시나 박현기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돌'이다. 돌을 흩뿌려놓고, 흩뿌려놓은 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고, 흩뿌려 놓은 돌 가운데에 앉아 돌처럼 앉아보기도 하고, 돌을 쌓아보기도 하고, 쌓은 돌을 영상으로 찍어보기도 했다. 그에게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의 상징이었다는 돌이 20년 동안 어떤 해석이 대상이 되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시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의미를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자. 우리는 산책 중이니까. 
〈아임 낫 어 스톤〉 박현기

〈아임 낫 어 스톤〉 박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