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오늘의 HBO는 넷플릭스의 꿈을 꾸는가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기가 막힌 드라마를 봤다. 2001년 영국이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옛 여자 친구로 더 유명했던 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다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멋진 미혼 여성은 많은데 멋진 미혼 남성은 없는 걸까요.” 그 순간 나는 ‘기분 나쁠 정도로 대담하고 솔직하게 연애의 진실을 말하는 이 드라마는 대체 뭐지?’라고 생각하며 제목을 봤다. <섹스 앤 더 시티>였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2001년의 영국이었다. 당시 한국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2001년은 강수연의 <여인천하>가 호령하던 시절이었다. 이병헌과 최지우의 <아름다운 날들>이 사람들을 울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섹스라니. 제목에 섹스가 들어가는 드라마라니. 2001년의 한국에서 그런 제목은 청담동 브런치 집에서 코스모폴리탄 칵테일을 마시면서도 함부로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듬해 귀국한 나는 당시 만연했던 초법적 ‘다운로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먼저 챙겨 보기 시작한 건 <섹스 앤 더 시티>였다. <프리즌 브레이크> 따위는 소년 모험물로 만들어버릴 만큼 폭력과 섹스로 가득한 감옥 드라마 <오즈>도 있었다. <소프라노스>는 미드를 <대부>의 반열로 치켜올린 걸작이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은 전쟁영화광들에게 극장을 티브이로 옮긴 기적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참여한 <보드워크 엠파이어>를 보면서는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이게 드라마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 가장 놀라운 건 이 모든 드라마를 하나의 케이블 방송사인 HBO에서 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HBO의 슬로건은 이랬다. ‘이건 티브이가 아니다. HBO다(It’s Not TV, It’s HBO).’
1990년대까지만 해도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는 영화였다. 어느 제작자나 감독이 영화를 만들다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는 건 좌천을 의미했다. 그런 드라마의 지위를 영화의 지위에 가깝게 올려놓은 가장 큰 공신은 HBO였다. HBO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공식은 이거다. 돈을 많이 들여 영화와 맞먹는 퀄리티의 드라마를 만든다. 그리고 리얼리티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리얼리티’는 ‘섹스와 폭력과 마약’을 모조리 포함하는 단어다. HBO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미드에서 이토록 많은 누드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거침없는 피의 제전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절정은 우리가 인생을 몇 년이나 저당 잡힌 채 환호하고 탄식했던 <왕좌의 게임>이었다. HBO는 지난 20년간 자신들이 해온 것을 여기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HBO 내부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OTT 시대에도 HBO의 선도적인 위치는 계속될 수 있을까? HBO는 2015년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OTT ‘HBO맥스’를 론칭했다. 이후 HBO맥스가 내놓은 오리지널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 그리고 <앤 저스트 라이크 댓>.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건 HBO맥스가 오리지널로 내놓은 작품 중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나 <브리저튼>처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없는 탓이다. 그나마 주목을 받은 작품은 <섹스 앤 더 시티> 속편 <앤 저스트 라이크 댓>이다. 좋은 주목도 아니었다. <타임>은 “도착하자마자 죽은 속편”이라고 저주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한 여성 비평가가 쓴 글은 <섹스 앤 더 시티>가 2020년대에 되살리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시리즈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섹스 앤 더 시티>와는 달리 <앤 저스트 라이크 댓>은 방어적이고, 민감하고, 누군가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까 겁에 질려 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창조한 것은 제작자 대런 스타다. 그는 HBO를 벗어나 다른 케이블을 무대로 비슷한 시리즈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모두 실패했다. HBO로 귀환해서 만든 <앤 저스트 라이크 댓>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오히려 대런 스타의 오랜만의 성공작은 넷플릭스에서 나왔다. 그가 제작한 <에밀리, 파리에 가다>다. 이 시리즈물에 우리가 대런 스타의 이름 아래 열광했던 독립적이고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좀 구식의 중년 남성인 나는 이 쇼가 거의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미국이 스스로 보내는 패러디처럼 보인다고도 생각했다. 예상과는 달리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즌3와 시즌4의 제작도 이미 확정됐다. 당신은 이렇게 탄식했을지도 모른다. 어른스러운 섹스로 가득하던 <섹스 앤 더 시티>의 시대가 가자 결국 우리 손에 남은 것은 “방어적이고 민감하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까 겁에 질려 있는” 시리즈뿐이라고.
어쩌면 이것은 플랫폼의 차이가 만든 차이일 수도 있다. 넷플릭스가 수억 명의 전 세계 가입자를 거느리고 있는 데 반해 HBO맥스는 아직 ‘미국 내수용’에 가깝다. 여전한 독재자는 넷플릭스다. 겨우 지난해에만 해도 사람들은 디즈니플러스의 론칭을 지켜보며 넷플릭스의 독주 시대는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어긋났다. 넷플릭스는 각 국가의 오리지널 콘텐츠에 오랫동안 투자를 해왔고, 재미있게도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과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같은 국제적 오리지널 콘텐츠의 성공이 정체 상태에 머무르던 넷플릭스를 구원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미래가 열렸다. 그러니 넷플릭스를 잡는 방법은 하나일 것이다. 넷플릭스가 되는 것이다. 이런 예측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HBO 내부의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9년 HBO 모회사 워너미디어를 인수한 AT&T는 <왕좌의 게임>을 제작한 리처드 플레플러를 내보내고 NBC유니버설 출신의 밥 그린블랫을 영입했다. 새 CEO가 가장 먼저 시도한 일? 이미 350억을 들여 파일럿을 만든 <왕좌의 게임>의 스핀오프 <롱 나이트(The Long Night)>를 취소하는 일이었다. HBO는 넷플릭스에 맞서기 위해 콘텐츠 제작비를 현재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편당 제작비를 늘린다는 소리가 아니다. 콘텐츠 숫자를 늘린다는 소리다.
“돈을 더 쓸수록 시청자도 늘어난다”던 플레플러가 떠나면서 HBO의 전략은 바뀌고 있다. 돈을 조금 덜 쓰더라도 대중적이고 국제적인 오리지널을 많이 만들어서 넷플릭스의 경쟁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HBO의 오랜 팬들은 근심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HBO의 안티-넷플릭스 전략은 끝났다’는 칼럼을 통해 “넷플릭스의 페이스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양산하기 시작하는 순간 반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넷플릭스는 넷플릭스니까 그래도 된다. HBO가 평범한 콘텐츠를 내놓는 순간 구독자들은 떠날 것이다.” 나도 이 경고에 동의한다. HBO가 넷플릭스를 닮아가는 순간 신화는 끝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뭘 알겠는가. 나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를 세계적인 지위로 올려놓는 새로운 공영방송이 될 거라는 사실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다만 나는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왕좌의 게임> 스핀오프 <롱 나이트>의 파일럿이 보고 싶다. 리처드 플레플러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사자후가 보고 싶다. HBO는 또 다른 스핀오프 <하우스 오브 드래곤>을 제작하고 있지만 어쩐지 나는 그 시리즈가 새로운 HBO의 아주 온순한 무덤이 될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 흥미진진한 반전이 하나 있다. HBO가 쫓아낸 전 CEO 리처드 플레플러는 올해 1월 애플TV+와 콘텐츠 제작 독점 계약을 맺었다. HBO가 넷플릭스가 되고 싶어 하는 동안 애플TV+는 HBO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그들 모두가 되고 싶어 한다. 모든 OTT가 서로를 서로의 미래이자 경쟁자로 간주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정신 나간 OTT 환란의 시대에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끝끝내 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존 스노우에게 대신 물어보시기를 권한다. 물론 그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Who‘s the writer?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오성윤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VERANDA STUDIO
- ART DESIGNER 주정화
CELEBRITY
#리노, #이진욱, #정채연, #박보검, #추영우, #아이딧, #비아이, #키스오브라이프, #나띠, #하늘, #옥택연, #서현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