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사카는 스펙터클이었다. 선자가 오사카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잠시 시각적 황홀경을 느꼈다. “역시 돈이 좋네”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건 요즘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드라마 〈파친코〉 이야기다. 〈파친코〉는 재미 작가 이민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플TV+의 대하드라마다. 1915년 부산에서 태어난 선자(김민하)를 중심으로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역사에 휩쓸리는 재일 동포 가족의 삶을 다룬다. 하나의 타임라인은 없다. 드라마는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를 경쾌한 편집으로 오간다. 당신은 어쩌면 드라마 한 편을 위해 애플TV+에 가입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망설일 필요 없다. 미국 OTT의 자본력과 할리우드식 문법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사를 조금 낯선 방식으로 그려낸다. 새로운 형식과 익숙한 내용의 묘한 균열은 〈파친코〉를 보는 가장 거대한 즐거움이다. 맞다. 이건 영업이다. 나는 이 짧은 문장으로 당신이 이미 영업당했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이미 〈파친코〉를 봤다면 1회를 보자마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의 시간이 펼쳐질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언급하기도 두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역사다. 한국의 대하드라마에는 그 역사를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하게 담아내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파친코〉와 비교할 수 있는 한국의 드라마라면 박경리 원작의 〈토지〉(1987)와 김종성 원작의 〈여명의 눈동자〉(1991)가 있다. 두 드라마는 〈파친코〉 이전에 어느 정도는 여성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굳이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파친코〉는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와는 묘하게 결이 좀 다르다. 여기에도 일제강점기의 악역들은 등장한다. 부산 영도의 어시장을 순찰하는 일본 순사들은 익숙한 악당들이다. 부산에서 오사카로 가는 여객선 안에서 한국인 여자 가수의 등을 징그럽게 쓰다듬는 일본 고위층 관리의 묘사는 이미 우리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종 보아온 캐리커처에 가까운 악당이다. 그런데 〈파친코〉는 그 이상으로 일본인 악당의 악당다운 존재감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자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본 순사들이 아니라 그들을 돈으로 지배하는 오사카 출신의 자수성가한 한국인 사업가 한수(이민호)다. 익숙한 고문 장면도 처형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파친코〉는 배우들의 얼굴, 그들의 표정, 그들의 감정적 리액션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비애를 실어 나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익숙하지만 낯설다.
선자가 남편과 오사카에 도착하는 순간 애플TV+의 자본이 CG와 세트로 창조한 1931년의 오사카 거리가 등장한다. 선자의 표정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는 조국의 쌀과 피를 뽑아 먹던 거머리 같은 제국의 경관에 압도당한다. 선자의 남편은 노면전차 안에서 아시아 두 번째 지하철을 짓고 있는 공사장을 보며 말한다. “난 벌써 미래에 온 것 같은데?” 그것은 확실히 미래다. 그런데 나는 〈파친코〉의 오사카와 비슷한 무언가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의 2008년작 영화 〈모던보이〉 속 경성이다. 2000년대 말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갑자기 ‘경성’의 스펙터클에 사로잡혔다. 로맨스 소설 〈경성애사〉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경성 스캔들〉(2007), 호러 영화 〈기담〉(2007), 조선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다룬 〈라듸오 데이즈〉(2008), 그 모든 경성 트렌드를 종합한 〈모던보이〉가 줄줄이 나왔다. 꽤 재미있는 트렌드였다. 그간 일제강점기 경성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억압받는 고통의 도시로만 등장했다. 그 시절의 경성을 스펙터클로 다루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2000년대 말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오랜 금기를 갑자기 세상이 허용하기라도 한 듯 경성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데 집착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살짝 덜어낸 시각적 접근법은 이후 박찬욱의 〈아가씨〉(2016)와 〈미스터 션샤인〉(2018)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나는 〈모던보이〉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조선총독부 서기관 이해명은 모던보이다. 그는 서양식 저택에서 하얀 슈트를 꺼내 입고 외출한 뒤 보브컷을 한 가수들이 스윙 댄스를 추는 무도회장에서 1930년대의 경성을 마음껏 즐긴다. 그 시대의 경성은 갑자기 조선에 도달한 미래였다.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화점과 커피숍과 극장이 생겼다. 밤은 네온사인으로 빛났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등장했다. 그들은 단성사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명동 거리를 걷다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유행하는 모자를 산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옥상 정원에서 경성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설렁탕이 10전이던 시대에 커피 한 잔은 15전이었다. 지금도 점심값보다 커피값이 더 비싼 시대이니 그 정도 가격 차이는 이해할 만도 하다. 당시의 기록을 읽어보면 “경성 젊은이들은 커피를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 하니 특별한 호사는 딱히 아니었을 것이다. 잘 차려입은 〈모던보이〉의 이해명은 웃으며 말한다. “독립이니 친일이니 따져서 뭐 하겠소?”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것은 1910년이다. 1930년대의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커피를 마시던 모던보이, 모던걸은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국의 신민이라는 신분을 곧바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별 죄책감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근대의 신문물을 즐겼을 것이다. 나는 종종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가 세련된 단발을 하고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진을 구글에서 찾아보곤 한다. 그 사진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당대 경성 스펙터클의 집약체에 가깝다. 최승희는 군국주의 선전 영화에 출연했다. 일본군 위문 공연에 참석했다.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당연히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최승희 앞에서 역사적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의 배신자였을까? 아니면 당대의 경성 문화를 어떻게든 조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예술적 투쟁가였을까? 아니, 그 시절에 예술을 하고 싶었던, 혹은 그냥 폼 나게 살고 싶었던 젊은이들의 욕망을 모두 반민족적이며 얄팍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미쓰코시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호안 미로와 알렉산더 콜더의 조형물이 번드르르하게 빛나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 정원에서 종종 생각한다. 만약 내가 1930년대 경성에서 이십대를 보내던 사람이었다면 어떤 인생을 선택했을까를 고민한다. 영화 〈모던보이〉는 가수 조난실(김혜수)이 일본인 고위층들 앞에서 스스로를 폭사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죽음을 지켜본 모던보이 이해명은 독립운동가로 굳이 각성해야만 한다. 경성을 다루는 모든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어쩔 도리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수 불가결한 결말이었다. 경성의 스펙터클에 현혹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역사적으로 ‘바른 결말’이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예술적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역사 속 개인들 모두가 윤리 교과서의 주인공 같은 투사들이었던 건 아니다. 그 시대에도 개인은 존재했다. 많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뮤지컬 배우 이지혜는 〈파친코〉 4화에 선자가 오사카로 가는 여객선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가수로 등장한다. 아마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에서 모티브를 따왔을 이 가수는 일본인들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이탈리아 가곡 ‘울게 하소서’를 부르다 돌연 ‘춘향가’를 열창하고,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이 드라마의 중심부가 아니다. 드라마는 이지혜가 아니라 그가 노래를 부르던 무대 아래 짐 부리는 선창에서 나뒹굴던 보통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보통 사람은 소프라노 가수가 죽은 배를 타고 오사카로 건너가 미래를 본다. 윤심덕의 서사는 〈모던보이〉에선 결론이지만, 〈파친코〉에선 과정이다.
오사카에서 파친코 사업을 하는 선자의 아들은 말한다. “대부분 레버를 잘 당기면 파친코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손님들은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파친코 알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거대한 역사의 레버가 당겨지는 순간 이리 튀고 저리 튀며 각자의 포물선을 그린다. 어쩌면 우리는 개개인에게 무겁게 부가된 역사의 무게를 픽션에서나마 조금 덜어내는 것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마주할 새로운 미학적, 혹은 정치적 태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마침 〈파친코〉는 이런 문구와 함께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나에게 이 문구는 역사 속 개인을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망쳐버릴 필요는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한국이라는 정신적 국경의 외부로부터 당도한, 익숙하지만 새로운 서사의 시작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