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애플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CEO 팀 쿡은 한때 애플을 사상 최초로 시가총액 3조 달러를 넘긴 기업으로 만든 주인공이니까. 팀 쿡은 오퍼레이션의 신이다. 제품이나 부품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생산 프로세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최근 출시된 M1, M2 칩 시리즈는 ‘외계인에게서 기술을 배워 만든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작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반도체 부족으로 인한 위기도 팀 쿡 정도 되니 이 정도 선에서 방어한 것이라는 의견이 업계에 지배적이다.
하지만 조니 아이브도 애플 경영자로 손색없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 사후 마지막까지 애플 CEO 최종 후보에 있었던 인물이고, 페라리의 CEO직 오퍼를 받았다는 루머도 돌았으니까. 고 스티브 잡스는 조니 아이브를 ‘나를 제외하고 애플의 운영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애플의 컴퓨터부터 아이팟, 아이폰까지 현재의 애플을 있게 한 모든 기념비적인 제품의 디자인에 조니 아이브가 있었다. 둘은 유능한 디자이너와 뛰어난 경영자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가 나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 비즈니스 오너나 프로젝트 매니저가 시킨 일을 예쁘게 잘 그려 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인식은 데커레이터(decorator)와 디자이너의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다. 디자이너는 무언가를 손으로 그리거나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고민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접근해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뭔가로 만드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스티브 잡스와 조니 아이브는 완벽하게 디자인의 방향성을 공유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제품이 어떻게 보이는가’만을 연구한 게 아니라, ‘이 제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
애플이 대전환을 맞이했던 기념비적인 제품은 아이팟이다. 아이팟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PC와 달리, 목적성과 문화적 접근이 중심이 된 애플 최초의 제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는 제품의 기능에 집중하기보다, ‘왜’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디자인적 접근이 필요하다. ‘왜 사람들이 이동 중에 음악을 들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을 할 줄 아는 디자이너와 경영자만이 만들 수 있는 제품이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진 발상이지만 당시에는 실로 놀라웠다. 실제로 둘은 몇 날 며칠을 이런 질문을 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고, 조니 아이브는 이런 궁금증만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고 이야기한다.
조니 아이브가 애플의 CEO를 맡았다면, 그는 역시나 끊임없이 ‘왜’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파생된 접근을 했을 것이다.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창조적인 혁신을 지속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애플의 베스트셀러인 아이폰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을 때마다 ‘사람들이 왜 스마트폰을 써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것이고, 이 질문에 ‘현재의 스마트폰으로는 부족하다’는 답이 나왔을 때 칩이나 카메라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전에 없던 아이폰 혹은 새로운 형태의 디바이스를 디자인했을 것이다. 상상해보자면, 삼성이 폴더블 폰을 출시하기 전에 더 먼저 그런 디자인의 폰을 출시하거나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작동 방식을 시장에 선보였을 수 있다. 혹은 앞으로 더 가속화될 메타버스와 웹3 분야에서도 시장이 무르익기까지 관망하고 들어가기보다 좀 더 선제적으로 애플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가령 애플 VR 헤드셋도 일찍이 출시되었을 수 있고, 크기와 기능별로, 안경 혹은 헤드셋과 합을 이루는 여러 라인업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애플 월렛에 크립토 월렛 기능을 적용해 디파이의 영역에도 진출했을 수 있고, 애플의 수준 높은 보안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해 훨씬 더 안정성 있는 시스템 구축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물론 애플은 여전히 세계 최대 시총 규모를 자랑하는 최고의 기업 중 하나다. 애플카(Apple Car)나 혼합현실(mixed reality)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 다양한 신사업 영역에도 진출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창조와 시장 선도’의 상징이었던 애플이 스티브 잡스 사후로는 창조적으로 시장을 선도하기보다는 ‘이기는 게임’을 선호하는 모습을 더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애플의 경영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만 예전의 애플을 추억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조니 아이브마저 완전히 떠난 애플에 다소간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닐까? 스티브 잡스가 직접 내레이션했던 전설적인 애플 광고 ‘Think Different’(1997년)의 글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Because the ones who are crazy enough to think that they can change the world, are the ones who do.
Steve Jobs, 1997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사람만이,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스티브 잡스, 1997
이상인은 구글 본사에서 유튜브 광고 디자인 시스템을 총괄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클라우드 인공지능 그룹의 디자인 시스템 스튜디오를 총괄한 바 있으며 딜로이트와 R/GA에서 근무했다. 〈디자이너의 생각법; 시프트〉 외 세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