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수국은 안쪽에 작은 진짜 꽃과 가장자리에 큰 가짜 꽃으로 꽃무리를 만든다.
가짜 꽃은 눈에 띄는 형태로 동물을 유혹하고, 진짜 꽃은 암술과수술이 있어 씨앗을 맺는다. 토양의 산도에 따라 꽃 색깔이 다양하게 바뀐다.
나는 지금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 식물을 연구하러 와 있다. 집을 구할 때까지는 외국 과학자를 위한 숙소에서 머물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여러 나라 사람을 사귈 수 있다. 옆방 인도네시아 출신의 해양 생물학자와 꽤 친해졌는데 그녀는 꽃을 무척 좋아한다. 이 과학자는 작년 여름에 와서 가을과 겨울을 보냈고 곧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그녀가 어제 내게 봄꽃 사냥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오늘 우리는 아침부터 넓은 연구소 캠퍼스를 샅샅이 살피며 봄꽃을 찾아다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냉이꽃, 봄까치꽃, 서양민들레, 별꽃 등이 마른 풀잎 아래에 한두 개씩 피어 있었다. 숨어 있는 작은 꽃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환호했다. 박물관 앞의 거대한 백목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내게 자신이 떠나기 전에 이 꽃봉오리들이 피어나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반드시 그 꽃이 핀 걸 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백목련은 아주 흔한 식물인데 이 열대지방 과학자에게는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가을에 낙엽이 지지 않고 일 년 내내 푸르른 열대지방 나무와 달리 백목련은 낙엽이 진 빈 가지에 수많은 꽃봉오리가 달려 있으니 이 과학자는 얼마나 궁금하고 기대되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꽃을 기다리고, 활짝 핀 꽃을 보면 행복해진다. 꽃은 무엇이기에 우리를 설레고 기쁘게 할까?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1707–1778)는 식물분류의 기초를 만들 때 꽃을 기준으로 했다. 꽃에 있는 암술과 수술의 수와 배열이 종의 체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가 활동할 때 그녀의 꽃 그림은 꽃이 생식기라는 인식을 퍼뜨리며 음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지아 오키프 훨씬 전에 식물분류의 체계를 만든 린네는 꽃이 생식기라는 걸 터놓고 얘기했다. 꽃잎은 침대, 수술은 남편, 암술은 아내이며 여러 종류의 꽃 형태를 일부다처제, 동성애, 혼인 등으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이 식물의 생식기를 그린 것이라는 관점은 새삼 놀랄 것도 아니다. 이제 꽃이 생식기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왠지 꽃이 피길 기다리고 꽃을 보면 행복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꽃이 생식기라는 데 조금 거부감이 든다. 우리가 다른 생물의 생식기에 감탄하고 있다니 말이다. 당시에도 일부 식물학자들은 린네가 학생들에게 부도덕한 영향을 준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좀 자극적이긴 해도 꽃을 이해시키고 흥미를 끄는 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종’이란 개념은 생식을 통하여 같은 유전자 구성을 가진 생식력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집단이라 규정한다. 그런 면에서 꽃이 수정을 위한 생식기라는 정의도, 꽃을 종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도 린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모든 식물이 꽃을 피우진 않는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꽃은 현화식물(Angiosperm)의 기관이다. 현화식물은 육상식물 중 90%를 차지한다. 육상식물의 나머지 10%는 침엽수, 고사리, 이끼 등이다. 이 10%의 식물을 떠올려보면 초록색이 주를 이루는 차분한 모양새다. 아주 오래전엔 이 식물들이 초록 융단처럼 지구를 덮고 있었다. 꽃이 태어난 건 나중이다. 진화를 통해 현화식물이 탄생했고 백악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해 육상식물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수가 됨으로써 지구의 풍경은 여러 가지 색들로 찬란하고 화려하게 바뀌었다. 현재 지구를 우점(優占) 하고 있는 동물종은 인간인데 인간과 함께 가장 번성하고 있는 식물군이 바로 이 현화식물이다. 꽃이 피는 식물은 약 1억 5000만 년 전 백악기 초기 꽃가루 화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꽃의 조상은 더 일찍 탄생했을 것이다. 꽃의 등장은 어땠을까? 고사리와 침엽수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지구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사건이지 않았을까? 물론 초기 꽃들이 알록달록한 색의 꽃잎을 가지고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을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꽃이 탄생한 이후 분명 지구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후 백악기에 꽃은 폭발적으로 늘어서 드디어 지구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20만 년 전에 등장했다. 꽃은 1억 5000만 년 전에 탄생했으니 꽃이 한참 전에 바꾸어놓은 풍경을 뒤늦게 보며 행복해하는 셈이다.
백악기에 꽃은 왜 폭발적으로 다양해졌을까? 많은 종이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 생겨난 것과 달리 꽃은 정말 폭발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을 정복했다. 진화론을 확립한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이 사실에 괴로워했다. 다윈은 꽃의 폭발적인 등장과 관련해 ‘abominable mystery’, 즉 ‘끔찍한 미스터리’라고 얘기했다. 대부분의 다른 생물 그룹은 점진적으로 진화했는데 꽃은 달랐다. 오죽하면 다윈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없어진 섬이나 숨어 있는 대륙에서 꽃이 길고 점진적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당시 진화론에 비판적이던 한 식물학자는 백악기에 신이 꽃들을 다양하게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하고 로맨틱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 조금씩 발견된 화석 자료와 DNA를 이용한 새로운 추정법으로 꽃도 다른 생물처럼 점진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럼에도 육상식물의 90%라는 큰 비율을 차지한 다양한 꽃들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댕댕이덩굴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암꽃이 피는 개체를 키워야 가을에 탐스러운 보라색 열매를 볼 수 있다.
꽃은 돋보기로 보아야 할 정도로 작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암꽃과 수꽃의 분명한 형태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야고는 기생식물이다. 야고는 뿌리를 숙주식물인 억새류의 뿌리에 붙여 영양분을 빼앗는다.
광합성이 필요 없으니 잎을 만들지 않고, 꽃만 피워내 씨앗을 맺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보라색 꽃이 옛날 담뱃대나 홍학을 떠올리게 하는 신비로운 모양새다.

방가지똥의 꽃은 전형적인 국화과 꽃의 특징을 가진다. 꽃 한 송이처럼 보이는 것은 작고 특별하게 생긴 꽃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작은 꽃송이엔 나란히 붙은 5개의 수술과 끝이 양의 머리를 닮은 하나의 암술이 있다.
우리가 꽃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물은 동물과 달리 움직일 수 없다. 바로 보이는 저 너머에 다른 꽃이 있어도 다가가 만날 수가 없다. 꽃은 꽃가루를 옮길 방법을 고민하다가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물, 바람, 곤충, 새, 포유동물 등이다. 바람의 도움을 받는 식물은 동물이 깨어나지 않은 계절에도 꽃을 피운다. 동물을 유혹할 멋지고 화려한 색상의 꽃잎도, 먹이가 되는 맛있는 꿀도 만들 필요가 없다. 꽃가루가 잘 날리도록 수꽃을 길게 배열하고 가끔은 꼬리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도록 한다. 꽃가루에 풍선을 달아 더 잘 날아가도록 만들기도 한다. 꽃가루가 바람을 따라 움직여 암꽃을 찾아가는 건 상당한 도박이다. 그래서 많은 양의 꽃가루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려고 한다. 덕분에 풍매화는 꽃가루 알레르기의 주범이다. 물의 도움을 받는 꽃은 꽃가루가 물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거나 뜰 수 있도록 만든다. 물에 뜨는 꽃가루는 수면 높이에 맞춰 피어난 꽃에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동물에게 도움을 받는 꽃이다. 동물이 좋아하는 색과 향기, 먹이가 되는 꿀, 착륙지점을 알려주는 무늬, 동물이 안착하기 좋은 구조, 동물이 건드리면 움직이는 지렛대 같은 수술과 암술, 조금이라도 더 꽃에 머물게 하는 복잡한 구조 등 꽃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동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수많은 꽃 중 자신과 같은 종에 똑바로 찾아가 꽃가루를 전달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딱 맞는 동물을 위해서 말이다. 꽃은 동물이 자신을 좋아할 수 있도록 진화했고 동물도 생존에 도움이 되는 꽃에 맞게 공진화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이고 꽃과 함께 진화한 것이니 인간이 꽃을 사랑하는 건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나의 지도연구관인 데니스 위검(Dennis Whigham) 박사가 내게 제안을 해왔다. 연구소 캠퍼스 중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탐험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연구소 캠퍼스는 아주 옛날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여 농장을 일군 긴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한다. 연구소는 5개의 큰 농장과 숲, 섬을 사들였고, 이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캠퍼스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캠퍼스의 모든 곳에 사람의 손길이 닿을 필요는 없어, 오래된 건물과 버려진 농기구가 곳곳에 나뒹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그중 한 폐건물에 우연히 가게 되었다. 데니스 박사는 폐건물 옆에 아주 오래전에 심은 동백나무가 있어서 봄이 되면 동백꽃을 꺾으러 온다고 했다. 이 지역에서는 동백나무가 자생하지 않아서 동백꽃은 귀하게 감상하는 꽃이다. 꽃봉오리가 그대로 있어 아직 이른 시기인 것 같다며 돌아가려다가 호기심에 건물 옆으로 난 샛길로 들어섰는데 건물 뒤뜰에 장관이 펼쳐졌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연보랏빛 크로커스 꽃이 잔뜩 피어 뜰을 뒤덮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복수초처럼 크로커스는 외국에서 이른 봄을 알리는 전령이다. 우리는 꽃을 보며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폐건물은 인적이 드물고 으슥한 뒤뜰은 정말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날이 아직 추워서 꽃이 피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만개한 크로커스 꽃들은 우리에게 이미 봄이 왔음을 너무도 벅차고 행복한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논밭과 정원에 나가 하루하루 식물이 어떻게 꽃을 준비하고 피워내는지 관찰하는 게 즐거웠다. 크로커스 꽃은 갑자기 피지 않았다. 바로 그날이 꽃을 피울 시기라는 걸 알고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어린 식물은 충분히 성장하고 나면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은 꽃을 만드는 시간에 비하면 아주 잠깐이다. 특히 봄꽃은 전해 봄이나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한다. 오랜 시간 꽃눈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식물은 어느 순간 꽃을 피운다. 그날 우리에게 봄을 알린 크로커스들은 추워서 이른 것 같지만 지금!이라고 결정했다. 꽃은 온도와 햇빛을 감지해 꽃 피는 날짜를 선택한다. 서서히 달라지는 온도와 햇빛의 양에 따라 사계절 다른 꽃이 피어난다. 진화의 큰 흐름에서 그런 결정은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줄 도움의 손길에 맞춰져 있다. 꽃의 발생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세포들은 분화하여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 등의 꽃 조직이 된다. 흔히 알려진 것은 ABC 모델이다. A형, B형, C형 유전자들이 단독으로, 혹은 협력하여 각각의 조직을 만든다. 조화롭고 견고하게 진화의 흐름을 기억하고 따라간다.
꽃을 볼 때마다 이러한 여러 과학적 이야기를 떠올린다. 각각의 종이 가진 꽃 이야기는 더 무궁무진하다. 예쁘게 활짝 핀 꽃을 만나면 우리를 위한 축복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꽃도 우리를 위해 핀 건 아니다. 지구에서 꽃은 인간보다 훨씬 전부터 진화해왔고, 그 수가 30만 종이 넘는다. 나는 꽃들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섭섭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식물학자들의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꽃에 대해 아는 건 극히 일부다. 우리 DNA에 새겨진 꽃에 대한 감탄은 꽃 앞에서 우리의 발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꽃에 숨겨진 신비로운 비밀을 상상하며 꽃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꽃을 사랑한다.

털사철란은 제주도에서 만날 수 있는 난초다. 모든 난초가 그렇듯 털사철란의 꽃도 자신에게 맞는 수분 매개자에게 맞춰 진화했다.
많은 난초 꽃이 동물과의 공진화로 탄생했다.

술패랭이는 패랭이보다 꽃잎이 더 하늘거린다. 많은 식물이 꽃봉오리일 때 꽃잎을 회오리처럼 감아놓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중 술패랭이는 그 하늘거리고 얇은 꽃잎 때문에 꽃이 필 때 풀어지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