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

인류는 팬데믹을 겪으며 면역학 분야의 방구석 박사들이 되었다. 이 책은 자칫 거만할 수 있는 우리에게 제대로 몰랐던 정보들을 직관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적절한 예시로 전달한다. 예를 들면 ‘큰 포식세포’는 얼마나 큰 걸까? 과학 유튜버이기도 한 저자 데트머는 평균적인 세포가 사람의 크기라면 큰 포식세포는 대략 검은코뿔소만 하다고 표현한다. 큰 포식세포는 검은코뿔소지만 면역체계를 뚫고 들어오려는 수많은 기생생물 중에는 코끼리나 대왕고래만큼 큰 것들도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포를 파고드는 바이러스는 그보다 훨씬 작다. 정확한 비례는 아니지만, 세포에 침투해 세포를 먹이 삼아 수많은 바이러스를 복제하는 과정을 거미가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뇌로 기어 올라간 후 수많은 새끼를 까서 우리 몸을 가득 채우는 장면으로 비유한다. 일반인을 위한 완벽한 비유다. 이 책은 이틀 만에 완독하고 감탄하라고 만든 책이 아니다. 서재에 꽂아두고 생소한 단어를 접할 때마다 해당 챕터를 펴고 읽는 책이다. 한 권 사두기를 강력 추천한다. 박세회
음식중독

인류가 담배의 중독성 여부를 놓고 싸우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담배의 중독성을 지적하는 새로운 연구나 보도가 쏟아지고, 그럴라치면 필립모리스의 상근 과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나서서 반박하는 식이었다. ‘그럼 탄산음료나 커피, 섹스도 문제가 되겠네?’ 하는 식으로. 니코틴중독은 물론 당중독, 카페인중독, 섹스중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대에 보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헛웃음이 나오는 논쟁이다. 탐사보도 기자 마이클 모스는 우리가 이제 또 하나의 중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음식중독.’ 음식에 대한 집착은 물론 400만 년 동안 인류를 번성시켜온 큰 원동력이었으나, 최근 40년을 보면 인류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공식품, 패스트푸드, 인공감미료, 인공향료는 미각과 신진대사를 교란하고 있고,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늘 과자 봉지를 처음 뜯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먹고 후회하는 건 당신의 자제력 문제만은 아니다. 거대 식품기업들의 탐욕이 너무 거대하고, 그에 비해 턱없이 무책임한 탓이다. 오성윤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아이들을 위한 세계의 공간

장사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공간을 임대했는데, 해당 주소지가 상업지역으로 지정돼 반드시 뭔가를 팔아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글쓰기 공부방을 열 계획이던 비영리단체 ‘826 내셔널’은 ‘해적 상점’을 열기로 했다. 말 그대로 해적들의 물건을 팔기로 한 것이다. 곳곳에 보석이 담긴 냄비나 낡은 의족 등 소품을 두고 사탕이나 주스를 담은 병에 ‘괴혈병 약’이나 ‘배 밑바닥에 고인 물’ 같은 라벨을 붙였다. 황당해 보이는 선택은 최고의 결과를 불러왔다. 덕분에 글짓기 공부방까지 아이들의 발길이 이어져, 목표대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826 내셔널의 첫 번째 성공 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세계 곳곳에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차용한 공간들이 생겨났다. 책을 통해 826 내셔널의 손길이 닿은 수많은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이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공존 가능한 공간’을 꾸미는 이들의 행보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김현유
짧은 휴가

내가 500원 할인을 받기 위해 텀블러를 챙길 때 오성윤은 필름 카메라를 챙긴다. 들고 다니는 건 자주 보았지만 찍는 건 보지 못했기에 내심 ‘필름이 들어 있긴 하나’ 의심했던 적도 있다. 이제 보니 그가 쉽사리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던 건 회사 주변엔 필름에 담을 만한 피사체도 풍경도 없던 탓이다. 책에는 10년이 넘도록 매달 잡지를 만들며 쌓아온 그의 심미안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발견한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와 문득 들었다가 사라지는 감흥들을 붙잡아 가볍고 유쾌한 호흡으로 적어 내린다. 예를 들면, 인도의 어느 기차 안에서 어린아이에게 폭력적인 광경을 목도해 괴로운 심경을 ‘샴푸를 좀 바꿔봐’라는 친구의 조언으로 금세 툴툴 털어내는 식이다. 동시에 사진과 텍스트의 짜임새 있는 배치나 시구를 옮겨놓은 듯한 제목에선 글자 하나, 사진 한 컷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소 심도 있는 장문의 기사를 턱턱 내놓는 그가 이렇게 강약 조절에 능하고 말랑한 글에도 능하다는 걸 영영 몰랐을 뻔했다. 박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