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조 회화 이후의 한국 미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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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조 회화 이후의 한국 미술

단색조 회화 이후 한국 미술엔 무엇이 있는가.

박세회 BY 박세회 2023.09.01
 
강국진 외 10명,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촬영한 경향신문의 지면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강국진 외 10명,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촬영한 경향신문의 지면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두 개의 장면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손에 든 비닐우산을 펼치자 그 주위에 있던 10명의 사람이 여성의 주변을 한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다가 불 붙인 촛불을 비닐우산에 꽂는다. 마치 생일 케이크처럼. 계속 노래를 부르며 주위를 돌던 이들은 별안간 여성 쪽으로 달려들어 촛불을 끄고 우산의 비닐을 찢더니 남은 우산의 살을 밧줄로 감아 밟는다.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있었던 한국 최초의 해프닝 아트로 평가받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의 한 장면이다. 지금이야 갤러리에서 저런 장면을 봤다면 ‘퍼포먼스구나’라고 인식하겠지만, 하얀 벽에 붙어 있는 예쁜 그림을 기대하고 간 당대의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장면.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한강에서 삽을 들고 모래 땅을 파더니 비닐천을 몸에 감고 목만 내놓은 채 그곳에 묻혔다. 주변의 관객들이 목 위만 내놓고 묻힌 이들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퍼포먼스는 이어졌다. 셋은 모래 무덤에서 나와 비닐천 위에 예술계의 기성세대를 고발하는 글을 쓰더니 그것을 읽고 태웠다. 1968년에 한강변에서 있었던 ‘한강변의 타살’이라는 퍼포먼스의 설명이다. 그해 ‘국전’에선 심사 비리가 터졌다. 지난 5월 26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린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에는 두 장면의 행위가 기록된 사진과 설명이 전시됐다. 나름 10년 차가 넘게 여기저기서 미술을 취재해온 기자인 나는 전혀 모르는 작품,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무척 중요해 보이는 작품과 처음 만났다는 사실에 다소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일행과 전시를 감상했다. 1960년대에 이렇게 앞서간 작품이 한국에 있었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당대의 전위성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아요. 여기 최봉현의 〈인간 3〉를 보세요. 최근에 한 지인이 전시에서 그 작품을 보더니 ‘세탁기 고무 호스를 작품에 쓴 게 재밌었다’고 하더군요. 당시엔 세탁기도 없었죠. 산업용 플라스틱 호스인데 제 지인이 50년 후 자신의 상황과 연결해 생각했던 것이죠. 비닐이 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한 사건이었고, 산업 용품으로도 낯선 소재를 작품에 신매체로 등장시켰다는 큰 의미가 있어요.” 전시를 담당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강수정 학예연구관이 말했다.  
1960년대의 청년들은 국가의 권위를 표상하는 태극기를 해체하고 이를 조형 작품으로 재구성해 거리에 전시했고(정찬승), 사직공원에서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외래 문화로부터 한국 문화의 독립과 기성 문화와 사회체제의 모순을 꼬집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 선언문을 가식을 상징하는 꽃으로 장식한 관에 넣고 그 관을 메고 행진했다. 행진하던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에 연행됐는데(‘제4집단’, 김구림·방태수·손일광·정강자·정찬승 등), 이 장면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며 장발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는 퇴폐 문화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이 세대는 독자적 행보를 펼쳐왔으나 같은 세대 청년의 정신을 공유하는 거꾸로 미술의 이승택, 자신의 행위를 ‘이벤트 로지컬’로 명명한 이건용 등 이 지면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당대의 청춘을 포함한다. 강 연구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놀라운 미술들이 어째서 미술사의 지평선 아래 감춰져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박혜성, 재제작된 ‘나는 너의 침대를 사랑한다-비누 비너스’, 2016. 서울시립미술관제공

박혜성, 재제작된 ‘나는 너의 침대를 사랑한다-비누 비너스’, 2016. 서울시립미술관제공

우리가 찾던 것
숨겨져 있던 것은 소중하다. 계속 찾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 미술계, 갤러리와 컬렉터,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미술관, 그 변화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요 몇 년 사이 가장 중요한 화두는 ‘단색화 이후의 한국 미술 양식’이다. 그 이유에 대해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자. 지금이야 단색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라는 걸 해외의 미술 관계자들도 다들 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엔 아직 단색화 붐이 일어나기 전이라 해외에서 한국의 아티스트라고 하면 아는 이름이 백남준뿐이었어요. 김수자 선생님이 알려진 것도 그 이후예요. 단색화는 사조로는 국외에 알려진 거의 첫 양식이었던 셈이죠.” 프리즈의 디렉터 패트릭 리는 갤러리스트 커리어를 이제 막 시작하던 2000년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미국에서 우리나라 음악이라고 하면 싸이의 ‘강남스타일’밖에 몰랐던 것과 비슷하다. 단색화가 폭발한 것은 그 이후다. 고작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2014년 가을부터 2016년 봄까지 대략 2년 동안 단색조 회원들은 베니스 비엔날레, 아트 바젤을 순회하며 컬렉터들의 관심을 모으고, 뉴욕의 티나킴 갤러리, 블럼 앤 포 등에 걸리며 월드를 투어했고, 그렇게 결국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한국의 유일한 예술 양식으로 우뚝 섰다. 이우환을 필두로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정상화, 정창섭, 권영우 등의 작가들이 마치 유닛처럼 그 조합을 달리하며 ‘단색화’로 묶여 국제 무대에서 조명을 받았다. 물론 여기엔 수많은 이해관계와 알력이 얽혀 있었으나 그런 건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에 비하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계에 BTS가 탄생했는데,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한가. 상황 인식을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조금만 더 무리한 비유를 이어나가보자. 단색화 이후에 대한 관심 역시 마치 BTS 이후의 한국 아이돌은 누가 이끌 것인가를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BTS가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을 때 하이브라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사원이나 주주들만 기뻐한 게 아니고, 하이브와 전혀 관계 없는 주변인들조차 BTS 군대 가면 어쩌냐며 걱정하기 시작했듯 단색화 이후의 한국 미술 양식을 찾는 데는 일반의 관심도 쏠렸다.
 
단색화 부상의 전후 사정
앞서 언급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가 엄청난 관심을 끈 이유 중엔 그런 연유도 있다. 나는 이 전시를 두 번 찾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 6,7 전시실을 젊은 인파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저희도 정말 놀랐어요.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관람객들 반응이 폭발적이었거든요.” 이 시대의 청년인 관객들은 새로운 것, 청년의 것, 전복적인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라는 양식 자체가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게는 낯선 묶음이다. 나 역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라는 제목을 듣고는 아직 미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승택과 이건용 두 명의 작가 이름밖에는 떠올리지 못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1960-70년대에 활동한 다른 한국 작가들은 잘 알고 있다. 바로 앵포르멜을 주창했고, 단색화로 대표되는 한국식 모더니즘을 확립한 작가들이다. 지금 우리가 얘기할 실험예술은 바로 이 앵포르멜의 반대항으로 시작한 예술, ‘전위성을 상실한 앵포르멜에 대한 현상 극복 방법론으로 반예술을 기반으로 발견된 대안’이다. 흥미로운 것은 앵포르멜 역시 국전으로 대표되는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예술운동이라는 점이다. 1950년대엔 미술계에 신진 작가가 ‘데뷔’를 하거나 기성 작가들이 작품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뿐이었는데, 이를 줄여 ‘국전’이라 칭했다. 심사위원들은 화단의 원로들이었고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이에 반기를 든 인물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서보 화백이다. 당시 26세의 청년 박서보는 반국전을 선언하며 국전에 작품을 내지 않고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명동에서 다른 전시를 열었다. 박서보 화백이 이후 1958년부터 주창한 운동이 앵포르멜이다. 그러던 중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국전에 반대한 인물과 단체들이 주창한 앵포르멜 작가들이 중견이 되고 그 양식이 국전의 한 축이 되었다. 그들은 한때 전복의 가치를 지녔으나 이내 기성이 되어 ‘한강변의 타살’이 비판하는 대상에 포함됐다.
성능경, ‘사과’ 중 일부, 197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성능경, ‘사과’ 중 일부, 197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실험예술을 재조명한 학자
‘한국 실험미술’이라는 단어로 묶인 작가들이 수십 년이 지나 모습을 드러낸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지평을 살피던 한 학자의 논문에 의해 처음 조명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제목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는 2000년에 발표된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라는 미술사학자 故 김미경의 박사 논문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 김미경 교수는 이 논문을 단행본으로 수정 보완해 내면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박사 논문을 발표했을 때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동료와 후학들은 주제 설정이 좋았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던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많은 기록 자료를 모아놓은 것일 뿐이라고 일축하거나 소외되었던 작가들의 입장을 새삼스럽게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적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미술 현상들 중 일부 활동을 ‘실험미술’이라 부르려 한 것은 기존의 회화와 조각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 작업들을 묶어서 부를 특정한 용어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앵포르멜과 모더니즘이 득세하던 1960-70년대 한국의 미술 활동 중 일부에 ‘실험미술’이라는 단어로 한정을 지어 따로 묶을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담론으로 끌어올린 첫 학자다. 김미경 박사의 논문에서 재조명된 이 양식 혹은 사조 또는 운동 혹은 흐름은 2001년 당시 과천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의 전개: 전환과 역동의 시대〉 전시를 통해 실재하는 미술 양식으로 확인되었고, 마침내 한국 미술사에 맥락화되었다.  
“2000년에 나온 김미경 박사의 논문과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우리 미술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매우 중요해요. 예술에선 작품이 전시되거나 어떤 활동이 일어나는 것만으로 영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걸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언어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1960-70년대에 활동했던 실험미술의 자장 안에 있던 작가들, 그중에서도 조형미술학회(Space and Time)를 중심으로, 작가들이 개인적으로 공부도 하고 모여서 스터디도 하면서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던 거죠. 그런데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파급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사이에 유신정권이 들어섰고, 유신정권은 작가들이 벌이는 예술 행동을 퇴폐 풍조로 규정해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이후 실험미술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대다수의 작가들은 평단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 타의에 의한 잠재태에 들어갔다. 물론 계속 실험미술의 자세를 고수한 작가 중 지금까지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승택, 이건용, 성능경이다. 실험미술 작가의 작품 중 하나를 잡지에 싣고 싶다고 말하자 강수정 학예연구관은 성능경 작가의 ‘사과’를 추천했다. “저희와 함께 기획한 구겐하임이 이번 전시의 도록 이미지로 선택한 게 바로 성능경의 ‘사과’거든요. 지금 봐도 정말 새로운 이미지예요.”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술계의 컨센서스를 만들어가는 합의 과정에서 최상위 승인 기관으로 작동한다. 이번 릴레이 전시는 6년여에 걸친 시간을 구겐하임과 함께 준비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앞으로 단색화 이후의 미술을 말할 때 이제는 ‘미술의 근대화라는 당면 과제를 놓고 전위추상과 경쟁했던 전위예술’로서 실험미술을 떠올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X세대
단색화 이후의 한국 미술 후보가 1960-70년대 한국 미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디어는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됐다. 얼마 전 미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대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김희천과 이미래의 이름이 나왔고, 이불과 양혜규와 최정화의 이름이 나왔다. 문경원과 전준호 얘기를 한참 하다가 누군가 말했다. “국립현대 올해의 작가상은 죄다 X세대 아니니?” 2012년 올해의 작가상은 문경원과 전준호가 수상했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1969년생이다. 2022년도에 수상한 최찬숙 작가는 1977년생이다. 우리는 천천히 따져봤다. 2012년부터 이어진 10명의 수상자 중 소위 말하는 X세대가 아닌 작가는 아직 없었다. 물론 ‘오늘의 작가상’이 2012년에 생겼고, 작품의 레퍼런스가 어느 정도 쌓이고 작품의 완성도가 담보되는 작가에게 수여하다 보니 생긴 적체일 수 있다. 다만 나는 그동안 내가 보고 깜짝 놀랐던 작품들이 전부 X세대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시작은 이불이었다. 1990년 ‘제2회 일·한 행위예술제’에 참가한 이불은 촉수처럼 늘어진 팔 혹은 다리 또는 몸통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형상의 소프트 스컬프처를 마치 코스튬처럼 입고 김포공항, 나리타공항, 도쿄 시대, 도쿄 도키와자 극장 등을 오갔다. 이불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에 대한 설명이다. 유년 시절의 짧은 기억으로 1990년의 분위기를 상상했다. 이제 막 찾아온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기성세대의 경직 속에서 그 그로테스크한 탈을 쓰고 도쿄와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자 이불이라는 사람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고방식의 인류로 보였다. 이불뿐만은 아니었다. 최정화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꽃과 라텍스로 만든 돼지머리를 높이 쌓아놓고 작품이라 말했고, 박혜성은 비누로 비너스를 만들고 이를 녹이는 행위예술을 선보였으며, 황신혜밴드 김형태는 틈만 나면 새로운 공간을 열어 모임과 이벤트를 주도했다.
김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김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X세대의 특별함
바로 뒤 세대인 1980년대생으로서 내가 보기에 1990년대 청년들의 특별함은 실재하는 것이었고, 다른 모든 세대와 달랐다. “맞아요. 1990년대에 활동한 아티스트들을 묶을 수 있는 정신이라는 게 있긴 해요. 그런데 이 정신이 바로 묶이기 싫어하는 자아거든요. 남들과 다르고 싶고, 나만의 감수성을 사랑하는 자기애와 자의식이 그 특징이기도 하고요.”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 〈X : 1990년대 한국미술〉을 기획한 여경환 학예사가 말했다. 그가 말한 자의식은 거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개인이 파묻히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X세대의 특징은 미술사 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앞서 실험미술을 설명하며 언급한 양식들을 시대로별로 아주 거칠게 구분하자면, 1950년대의 앵포르멜, 1960년대의 실험미술, 1970년대의 모더니즘 계열의 단색화 운동, 즉 앵포르멜 세대의 재부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X세대가 활동하기 직전인 1980년대에는 두 가지 예술 양식이 대립하는 구도를 보였다. 한쪽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모더니즘 평면이었고, 그 대립항은 1980년대의 정치적 상황에 반해 적극적 현실 참여를 택한 민중예술이었다.
우리는 1990년대 미술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쉽게 묶어 부르곤 했다. 물론 이는 시대적 구분으로서의 모더니즘 너머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미술평론가 정헌이는 “우리의 1990년대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일 뿐만 아니라 ‘포스트-민중’, 즉 민중미술을 경험한 이후 세대의 미술적 발언이자 표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대다수의 학자가 1990년대 미술 혹은 내가 자의적으로 붙인 ‘코리안 엑스 아트’의 시대 구분을 1987-88년부터 1997-98년까지로 잡는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시작인 1987년은 대한민국이 직선제로 개헌된 해이고, 1988년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이며, 1989년엔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다. 1990년대를 닫는 해인 1997년은 대한민국이 IMF에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한 해이며, 1998년은 그 여파로 해외로 유학을 간 수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재유학온 시기다. PC 통신의 발달과 전화선을 통한 인터넷의 보급 등이 같은 기간에 벌어졌다. 하나의 목소리로 주장할 것은 없어지고 놀 일은 많아졌다. 1988년에 성인을 맞은 자아들은 민중운동이나 반미 등의 거대 담론에 빠지고 싶지 않았고, 평면에 국한된 구도의 모더니즘에 매력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시대의 거대한 해방감을 원래 누리던 것인 양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즐겼다.
 
무담론의 담론
“이들은 이데올로기를 주창하기 위해 개인을 함몰시키지 않았어요. 그 반대로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 이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이념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해나갔죠. 예를 들면 이불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는 레이블로 정의하고 작업에 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여성주의적 언어를 담고 있어요.”
여 학예사가 말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선언문을 낭독하지도, 새로운 예술론을 설파하지도, 학회를 창설하지도 않았다. 대신 소그룹을 만들어 재밌는 이벤트를 벌이고 대안 공간에서 모여 놀았다. 심지어 이들은 아트의 바운더리를 정해두고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지인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전시를 열거나 클럽에서 퍼포먼스를 전시했으며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듯 춤을 추며 놀았다. 문혜진 미술평론가는 이를 두고 “(한국 미술사에서) 그간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후기 민중미술의 일부 분파를 제외하고는 미술계 내부에서 내용이나 형식, 제도를 건드리는 방식이었기에, 미술 밖에서 자신들의 발언 무대를 만들고 놀이와 작업, 예술과 생활을 혼합하는 최정화·김형태의 방식은 한국 미술사에서 이례적인 경우”라 평했다. 동시대에 해외에서 귀국한 작가들은 조금 다른 노선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 리움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김범이다. 그는 1963년생이지만, 뉴욕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에서 1994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시인 정지용 씨에게 시를 배우는 돌의 영상과 함께 시를 배운 돌을 전시하고, 배에게 바다가 없다고 가르치는 장면과 함께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를 전시한다. X세대 이전 한국의 미술사에서 김범을 위치시킬 자리는 없다. 심보선 작가는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이 세대들이 이념의 시대가 끝난 후의 거대한 공백을 ‘취향의 형성과 조련을 통해 채우려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 여경환 학예사는 “X세대는 정치적으로도 예술 담론적으로도 갇혀 있지 않은 평원 속에 놓인 첫 세대였어요. 주장해야 할 정치적 이념도 없고, 문화는 개방됐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됐어요. 그런 시대가 왔을 때 그들은 처음 맞닥뜨린 시대적인 조건 속에서 예술을 가지고 즐기며 놀았어요. 전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재밌는 건 심 작가와 여 학예사의 말이 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청년이 아닌가 싶어요. 1960~70년대 실험예술과 1990년대 미술을 양식으로 묶기엔 무리가 따를 거예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이 청년이라는 거겠죠. 이 시대 역시, 또다른 청년들의 선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강수정 학예연구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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