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즈 서울 2023에 설치된 LG전자 올레드 부스의 전경. 오른쪽에 보이는 작품이 그래픽 스튜디오 버스데이가 디지털라이징한 ‘14-III-72 #223’. 가장 왼쪽이 김대환 작가가 디지털라이징한 ‘Duet 22-Ⅳ-74 #331’, 가운데 보이는 파란 배경의 작품이 안마노 작가가 디지털라이징한 십자구도 작품 ‘7-VI-69 #65’이다.
새로운 시대의
캔버스
프리즈 서울 2023의 VIP 프리뷰가 열린 지난 6일, 행사장 안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모인 곳 중 하나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전시되어 있는 LG전자 올레드의 부스였다. 프리뷰 개장 직후엔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밀집했다. “VIP 프리뷰에 이 정도 관람객이면, 본 행사인 7일에는 LG전자 부스 앞에 줄이라도 서겠어요” 이 광경을 지켜본 한 미술 관계자의 말이다. 세로 236㎝, 가로 172㎝의 전면 점화 앞에는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이 거장의 푸른 전면점화만은 아니었다.
LG전자는 지난해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의 공식 헤드라인 파트너다. 프리즈를 알리는 뉴스나 광고에 LG전자의 하이엔드 디스플레이 브랜드 ‘LG OLED’의 명칭이 들어가는 이유다. 프리즈와의 파트너십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지만 프리즈는 파트너사가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샴페인 브랜드 루이나는 에바 조스팽과의 협업을 선보이고, 브레게는 심소미 큐레이터와 함께 ‘스트리밍 타임(Streaming Time)’이라는 작품을 내놨다. LG 올레드도 협업을 내놓은 건 마찬가지지만, 브랜드의 제품이 작품에 필연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다른 브랜드들과는 조금 다르다.
지난해에 LG 올레드가 선보인 세계적인 조각가 아니시 카푸어의 ‘티비 조각’을 만난 건, TV가 새로운 캔버스가 될 수 있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당시 아니시 카푸어는 자신의 1998년 작품 ‘Wounds and Absent Objects’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롤러블 티비인 LG 시그니처 올레드 R에 담았다. 현장에서 ‘티비 조각’이라는 설명만 들었을 때는 수많은 의문이 들었으나, 본지 이번 호 인터뷰를 위해 LG전자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담당 오혜원 상무의 설명을 듣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아니시 카푸어를 만난 게 계기가 됐어요. 1998년에 발표한 작품은 영사하는 형태여서 아무래도 원하는 색이 안 나왔었나 봐요. 그런데 아니시 카푸어가 LG전자의 후원으로 올레드 TV를 써보고는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 색이 화면에 나온다고 좋아하더군요. 직접 다시 편집해서 14분이 넘는 영상 루프 작품을 저희 올레드 TV에 넣은 게 바로 아니시 카푸어 한정판 올레드 시그니처 R의 탄생 계기입니다. 1998년 버전에 비해 원색이 굉장히 강조된 걸 확인할 수 있지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LCD에서 올레드(OLED)로의 발전은 그림을 보통의 유리에 넣던 시절에서 반사가 없는 ‘뮤지엄 글라스’에 표구하기 시작한 흐름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특히 디스플레이 화면을 셋톱박스 안으로 말아 넣을 수 있는 롤러블 TV LG 올레드 R에 담겼다는 걸 생각하면 그보다 더 폭이 큰 혁신이다.

프리즈 서울 2022에서 LG전자가 선보인 아니시 카푸어의 ‘Wounds and Absent Objects II’(2022). 롤러블 TV인 LG 시그니처 올레드 R에 담겨 TV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판매된다.
올해 LG전자는 좀 더 과감한 협업 방식을 선택했다. 올해의 프로젝트인 ‘Whanki x LG OLED Frieze Seoul 2023’에선 김환기 재단과 손을 잡고 3개의 아티스트 팀에 5개 작품의 디지털라이징을 맡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회화를 디지털라이징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화면을 스캔해 TV에 띄우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이미지는 움직이며 변형될 것이다. 나는 실은 걱정을 먼저 했다. 김환기의 작품을 꽤 오래 봐왔기에 그랬다.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선 전시 준비 기간을 빼면, 거의 1년 내내 김환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파리 시절을 강조한 전시(〈김환기의 그랜드 투어 ‘파리통신’〉)가 있는가 하면, 하트 도상(〈김환기, 성심聖心〉)이나 십자구도에 중점을 둔 전시(〈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가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채로운 기획 속에서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층고가 유난히 높은 3층에 높이가 2m에 달하는 대형 전면점화 다수가 걸린다는 사실이다. 환기미술관의 대다수 전시들은 기획 의도 안에서 시대 순을 따른다. 김환기는 초기엔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구성주의적 화풍을 보였는가 하면, 중기에는 달과 산, 구름 등 자연의 모습을 다소 추상적인 현태로 화폭에 품었다. 그를 대표하는 ‘한국적 추상’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주로 파리시대(1956~1959)를 지난 뉴욕시대(1963~1974)의 것들이다. 1층부터 걸어 올라가며 점점 김환기의 언어가 형태와 지시를 초월해 깊어지고 묵묵해지는 걸 목도하다가 3층에 올라서는 순간 거대한 전면점화들을 만나게 된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턱 하고 막힌다. 과연 그 감동을 디지털라이징한 작품이 표현해낼 수 있을까? 옅게 분칠을 한 듯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작품들의 특징을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TV라는 형태의 디스플레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프리즈 서울 2023에 설치된 LG전자 올레드 부스의 전경. 가운데 보이는 작품이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오른편에 있는 분홍색의 작품은 버스데이(VERSEDAY)가 ‘무제’(1967)를 디지털라이징한 작품이다.
“진본이 있는 디지털 작업은 물론 이미테이션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리얼’이 아니라고 해서 ‘페이크’는 아니라는 점이죠.”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영국에서 활동 중인 미디어 아티스트 김대환(Jason Kim)이 나의 질문에 보내온 답이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풀어준 건 이 프로젝트를 총괄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조소과 박제성 교수였다. “기자님이 가진 우려가 어떤 건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빛을 발하는 올레드의 디스플레이 화면과 빛을 반사시키는 회화는 그 속성 자체만 봐도 같을 수가 없지요. 저희가 그 빛의 속성을 무시하고 회화의 정확한 색상을 재현해내려 했다면 아마 오히려 진본에서 멀어졌을 거예요. 원래의 색상은 유지하되 속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오히려 관람자가 그 차이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입니다.”
김환기의 재현이 아닌
김환기와의 대화
작업자들은 작품을 재현하려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저희에게는 ‘시간’을 해석하는 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어요. 먼저, 멈춰 있는 김환기의 점화를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들 때 그의 시간이 어땠는지를 해석하고 저희의 시간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했지요. 저희 작업의 동심원 가운데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 반짝이는 점들이 모두 나름의 시간대를 가지고 다르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것들이 김환기 선생이 움직이지 않는 점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시간을 저희가 해석한 결과물입니다.” 그래픽 아트 스튜디오 버스데이(VERSEDAY)의 최광훈 총괄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버스데이가 디지털라이징한 작품 중 하나는 별칭 ‘붉은 태양’으로도 불리는 김환기의 ‘14-III-72 #223’다. 뉴욕 시기의 작품에 주로 드러나는 푸른색 계열이 아닌, 붉은색을 품고 있어 흔치 않은 작품이다. 화선지 위의 붓 자국처럼 캔버스 위에 번지듯 찍힌 제라늄 레이크 색상의 점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들이 진동하다가 운동마저 하는 듯 보이고, 그 점들이 화폭을 벗어난 그림을 품은 공간 전체를 따스한 감정으로 가득 채우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이날 찾은 LG 올레드 부스에서는 버스데이가 97인치의 LG 올레드 M(셋톱박스와 무선으로 연결되는 TV)에 담은 5분짜리 영상이 계속 재생되었다.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그 영상을 보면서 감상한 것을 두고 김환기의 작품이라고만 표현할 수도 없고, 버스데이의 작품이라고만 얘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캔버스에 안료로 그린 회화와 LG 올레드의 대화이자, 김환기의 원작과 버스데이의 해석이 주고받는 대화이기도 했다.

작품의 디테일에 대해 회의 중인 버스데이 최광훈 총괄 프로듀서, 안그라픽스 안마노 공동대표, 서울대학교 조소과 박제성 교수의 모습.(왼쪽부터)
결국 회화라는 미디엄에서 영상으로 번역하는 작업에는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결국은 본질과 얼만큼 성실하게 대화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대화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태도일 수도 있다. 특히 ‘무제’로 이름 붙은 1967년작 사방구도 작품을 디지털라이징할 때 버스데이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작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기 위한 노력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술력을 드러낼 수 있게 작품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바꾸어봤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오히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원작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듣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했죠.” 버스데이의 조대동 대표가 말했다. 이들이 디지털라이징한 연분홍빛 사방구도 작품은 LG전자 올레드 부스 전면 오른쪽에 걸려 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프리즈 현장의 찾는다면, 97인치의 대형 화면에 구현된 이 작품을 오랜 시간 지켜보기를 바란다. 한 시간에 걸쳐 보이지 않는 붓이 지나가듯 서서히 드러나 완성되는 선들을 보자면, 우주에 시간이 채워지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서울대학교 조소과 박제성 교수.
좀 더 과감한 시도도 있다. 김대환 작가는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제너레이티브 아트로 김환기의 작품 두 점을 재해석했다. 김환기가 1974년 4월에 제작한 ‘Duet 22-Ⅳ-74 #331’(통칭 ‘듀엣’)은 프러시안 블루와 블루 블랙의 점으로 화면을 채우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여백을 만들고 다시 점으로 화면을 채워 완성한 점화다. 이를 디지털라이징한 김대환 작가의 작품은 83인치 LG 올레드 TV 2개를 붙인 거대한 화면에서 재생된다. 원작에서 마치 두 그루의 나무 같기도 하고, 두개의 별이 발산하는 빛 같기도 한 여백이 구름처럼 일렁인다.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인 ‘7-Ⅶ-74’는 그가 수술을 받기 직전까지 매진하던 그림이다. ‘짙은 심연의 검푸른 빛깔’로 채워진 점들 사이를 종과 횡으로 선들이 가로지르고 이 선들은 3개의 작은 원형과 맞물린다. 김대환 작가가 디지털라이징한 작품에서 이 점들은 갈대처럼, 수초처럼 일렁인다. “동양에는 ‘나’라고 믿었던 경계와 인식의 한계가 사라지며 내가 세상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숭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제 작품에서는 나를 이루는 모든 정보들이 개인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찾아가고 흩어지고 멀어집니다. 그러나 중력보다 더 큰 힘으로 서로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망하는 에너지가 다시 ‘우연’ 혹은 ‘운명’처럼 다시 서로를 찾아가게 합니다. 그건 ‘나’가 궁극적으로 ‘너’이기 때문이며, 이는 제가 디지털라이징한 작품을 위해 만든 제 코드를 풀이하는 단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시각 예술의 가장 놀라운 힘이 아닐까?

LG 올레드 화면으로 작품의 색상을 최종적으로 조정하고 있는 안마노 공동대표.
기술은 예술을
그리고 예술은 기술을
“캔버스에 안료로 그리는 그림들이 올레드의 화면 안으로 들어와서 전시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LG전자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담당 오혜원 상무의 말이다. “지금은 그 두 미디엄이 오버랩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문득 4mm가 넘지 않는 올레드 M이 집 안 곳곳의 벽에 붙어 있고, 기분에 따라 무선으로 연결된 셋톱박스로 원하는 그림들을 바꿔 거는 장면을 상상했다. 기술은 아트를 감상하는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기술은 아트를 하는 마음 자체에 영감을 준다. “계속 ‘이 정도로 정확하게 색상이 구현되는구나’라는 걸 느껴서 김환기 작가 작품의 색감이 주는 감정을 손실 없이 극대화해보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올레드로 하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인데, 굉장히 즐거웠고, 그 과정이 무척 쾌적했습니다.” 안마노 공동대표가 말했다. 서지 디자인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오던 안 대표도 그랬지만, 영상 작업을 오래 해오던 버스데이 조대동 대표의 감동은 조금 더 진했다. “제가 처음에 컴퓨터 그래픽을 시작했을 때의 매체는 브라운관 TV였어요. 생각해보면 27인치 브라운관 TV는 거의 그 폭만큼 두꺼웠어요. 어마어마하게 거대했죠. 그런데 프로젝션 모니터나 LCD 모니터가 나오고 나서도 저는 계속 고사양 브라운관 모니터를 사용했어요. 그나마 제가 원하는 색상의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LCD는 비슷한 컬러인 듯 구현이 되지만 정확한 색상이 아닐 확률이 너무 높았거든요. 김환기 작가님은 젯소(캔버스에 사전 처리하는 백색 유성 안료)도 바르지 않은 천에 테레빈유를 섞은 유화물감으로 농담을 표현했어요. 그만큼 색에 민감한 아티스트였다는 것이죠. 그런 디테일한 사람들에게 올레드는 색을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기술로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죠.” 조대동 대표가 살짝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대환 작가가 디지털라이징 한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인 ‘7-Ⅶ-74’.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고, 예술 표현은 기술의 발전과 대화하며 확장될 것이다. “생각해보세요. 예전에 저희는 720픽셀의 사이즈로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4K나 8K로 작업하고 있죠. 화소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디테일이 더 정확하게 보이다 보니, 디테일을 만드는 과정부터 점차 정교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기술과 아트의 소통은 단방향이 아니다. 기술이 아트에 영감을 주지만 아트의 요구로 기술이 발전하기도 한다. “스위스의 아트그룹 아이아트(iart)와 작업했을 때가 떠올랐어요. 당시로는 저희도 아직 구현한 적이 없는 요청을 아티스트들도부터 받았지요. 꽃봉오리처럼 모은 여러 개의 디스플레이 패널이 구부러졌다 펴지며 꽃이 지고 피는 걸 형상화해보고 싶다는 요구였어요. 말 수도 있고, 구부릴 수도 있는 올레드이기에 가능한 요청이었죠. 결국 모터 기술자들까지 모아서 꽃이 피고 지는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키네틱 장치를 올레드 패널에 장착했어요. 우리의 모토는 ‘WE INSPIRE ART’이지만, 아트가 우리의 기술 발전에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오혜원 상무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