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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 축구계의 갈라파고스가 될 지도 모른다

프로필 by 김현유 2023.11.09
 
추춘제를 주제로 글을 보내달라는 청탁에 문득 오래전 추억 하나가 스쳐갔다. 2007년 3월 7일의 일이다. 회사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에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차전이 열리는 성남 일화(현 성남FC)의 홈인 탄천종합운동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프로축구연맹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탄천 가시죠?” 그는 다급하게, 오후 들어 수도권에 조금씩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는데 혹시 모르니 연맹이 갖고 있는 ‘컬러볼’을 성남 구단에 전달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후 만난 그가 건넨 가방에는 노란 공이 담겨 있었다. 지구촌 스포츠 진기명기 중 하나인 설원의 그라운드에서 러시아 선수들이 차는 바로 그 공이다.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함박눈은 눈보라로 변해 있었고, 경기 도중 흰색 축구공을 심판과 선수들이 도저히 식별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내가 가져 온 노란색 축구공이 투입됐다. 이날 경기에 출전한 브라질 출신 용병 선수들은 방한용 귀마개를 하고 그라운드 위를 달렸다. 상대는 베트남의 동탐 롱안이었다. 경기는 성남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 후 동탐 롱안 감독의 기자회견은 하소연으로 시작해 불만으로 끝났다. “우리 팀 선수 중 실제로 눈을 본 건 외국인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진행한 경기는 불공평하다!”
K리그로 대표되는 한국의 축구 리그는 보통 2월 말, 혹은 3월 초에 개막해 11월 말에 마무리한다. 초봄에 시작해 초겨울에 끝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춘추제’라고 한다. 유럽은 반대다. 일반적으로 8월에 시작해 이듬해 5월 초에 끝난다. 여기는 반대로 ‘추춘제’다.
세계의 흐름은 추춘제다. 세계 축구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유럽의 시스템이 점점 다른 리그로도 확대되는 중이다. 축구의 또 다른 거대 축인 남미 역시 유럽과 같은 시기에 리그를 진행한다.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남반구이다 보니 계절만으로 따지자면 춘추제지만, 일정은 유럽 기준의 추춘제와 맞다. 맨체스터 시티, 파리 생제르맹,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 유럽의 유명 클럽을 소유한 자본력을 갖춘 아랍권은 어떨까? 역시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미친 여름을 피해 추춘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탑승하지 못하고 있는 건 축구와 별개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동북아의 한국, 일본, 중국 정도다.
동북아 국가들이 춘추제를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추운 겨울 탓이 크다. 동북아 3국 중 북위 35도 이상 지역은 꽤나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강원도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쏟아지는 눈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낫지 않나 싶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나 아예 눈 축제를 여는 삿포로는 엄청난 수준의 강설량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춘추제의 배경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프로 스포츠 도입 당시 미국을 기준으로 시즌제도를 들인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양국 모두 미국의 대표 스포츠인 야구가 먼저 자리를 잡았기에, 후발 주자인 축구 역시 자연히 봄에 시작하는 미국식 시즌제를 따른 것이다.
추춘제와 춘추제는 상반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공존해왔다. 하지만 이제, 동아시아 축구도 추춘제의 흐름을 거스르긴 힘들어 보인다. AFC는 올해부터 AFC 산하의 주요 대회를 춘추제에서 추춘제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최대 세력인 아랍권을 중심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 때문에 최대 클럽 대항전인 AFC 챔피언스리그가 올해부터 추춘제로 진행된다. 봄에 예선을 시작해 겨울이 오기 전 결승을 치르는 게 익숙했던 K리그 팀들은 이제 가을과 겨울에 예선을 치르고 이듬해 5월에 결승을 소화하는 일정을 따라야 한다.
이 같은 변화에 춘추제를 유지하고 있던 동아시아 3국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우선 중국은 수수방관 중이다. 자의적인 방관은 아니다. 광저우 헝다로 대표되는 빅 클럽들이 모기업의 도산으로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는 지금, 리그 자체가 위기에 빠진 중국은 시즌제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일본은 AFC의 변화 기조에 편승한 분위기다. 탈아입구(脱亜入欧,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 사상을 강조했던 일본인 만큼, 축구의 엘도라도인 유럽식 모델을 늘 꿈꿔왔다. 이미 10년 전부터 추춘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AFC가 챔피언스리그를 비롯한 주요 대회 일정을 변경하자 J리그도 그에 발맞춰 변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상당히 뜨뜻미지근하다. 축구계에서는 “분위기는 감지하고 있지만, 변화를 추구하기는 조심스럽다”는 반응이다. 기후가 현실적인 이유로 꼽힌다. 11월 중순만 지나도 관전 환경이 고된데,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에 시즌을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잔디 생육도 문제다. 유럽에서 건너온 탓에 영상 10℃ 이하에서 생육을 멈추는 잔디를 관리하며 겨울에 경기를 소화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껏 K리그에서는 시즌 초나 말미에는 녹색 잔디 대신 누런 잔디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게 ‘국룰’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온갖 핑계 뒤에 숨어서 미루기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 않으려는 핑계는 백 가지도 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추춘제는 이미 다가온 현실이고, 이제 와서 유불리를 논하기에는 늦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K리그는 ‘나 홀로 춘추제’를 고집하는 갈라파고스 생태계가 될지도 모른다. 당장 올해만 해도 시즌제의 간격 차이가 일으킨 문제가 있었다. 춘추제를 진행하는 한국의 경우, 여름 이적 시장은 7월 말에 일찌감치 끝났다. 그러나 8월 말까지 이적 시장이 열려 있는 유럽 팀들은 대전하나시티즌의 배준호와 FC서울의 이한범 등 초대형 유망주를 데려갔다. 대전과 서울은 두 선수가 남기고 간 이적료를 쥐게 되었으나, 선수 보강은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적 시장에서만 이런 시간차가 벌어졌지만 앞으로는 시스템 자체가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변화는 막연한 공포를 동반한다. 고통과 반발을 감수하고 선택한 결과가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줄지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춘제로의 전환이 사실 그렇게 두려운 변화인지는 모르겠다. 추춘제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한국만큼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덴마크 수페르리가나 러시아 프리미어리그도 추춘제를 시행한다. 다만 이들은 2개월간의 겨울 휴식기를 가진다. 여름 프리시즌보다 더 긴 시즌 중 휴식기에는 따뜻한 남유럽이나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또 다른 현실의 벽으로 꼽히는 잔디 문제는 어떨까. 이미 유럽은 그라운드 아래 열선을 설치하고 인공 채광기를 긴 시간 돌리는 방식으로 겨울철 잔디 관리를 하고 있다. 일본에선 추춘제 전환을 위해 돔 구장 확보와 겨울 기간 중 대설 지역의 경기 일정을 조정하는 등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극복할 방법은 나와 있는데, K리그는 변화라는 공포에 그저 굴종하려고 한다. 게다가 겨울철 잔디 관리 문제를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추운 겨울 못지않게 혹서기에도 잔디는 휴식기가 필요하다. K리그의 경기는 그 무렵 가장 많이 집중돼 있다. 어쩌면 변화를 피하는 진짜 이유는, 가려져 있는 치부가 드러나는 게 싫어서는 아닐까? 긴 겨울 휴식기를 보내게 되면 1부 리그 기준 38경기를 치르는 현행에서 4~6경기가 줄어들게 된다. 전체 경기 수가 줄면 노출도가 적어져 스폰서 계약에 차질이 생긴다. 그러나 취향껏 원하는 콘텐츠를 찾아 보는 지금 시대에 중요한 건 노출 빈도가 아니라 한 번에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게임의 퀄리티일 것이다. 경기의 질이 올라가면 춘추제든 추춘제든, 관심과 애정은 따라오는 법이다. 춘추제는 결코 절대적인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변화의 패러다임을 한국 사정에 맞게 받아들일 방법에 대해 한참 전에 고민했어야 한다. 추위 속에 축구를 하고 관람하는 것이 두려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느 순간 리그 자체가 고사할지도 모른다.
 
서호정은 프리랜스 축구 크리에이터다. K리그 해설자 겸 축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썰호정>을 운영 중이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서호정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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