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THE SECRET UNCOVERED

지난 두 세기 블렌디드 위스키의 역사와 함께한 발렌타인이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까워 공개한 발렌타인 글렌버기의 비밀들.

프로필 by ESQUIRE 2024.01.27
글렌버기와 발렌타인
 
지난 2017년 발렌타인이 자사 위스키 풍미의 핵심을 책임지는 ‘키 몰트’라며 발렌타인 글렌버기를 출시한 것은 위스키 업계의 격동을 예고하는 대사건이었다. 그건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에 붙은 블렌디드 위스키의 유구한 역사 때문이었다. 잠시 발렌타인이 없던 1800년대 초기의 펍을 상상해보자. 위스키 한 잔을 시켰더니 마스터가 유리잔에 갈색 액체를 담아 내줬다. 그것은 어떤 위스키일까? 아마도 펍이 거래하는 인근 증류소의 위스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류소에서 맥아(몰트)를 발효시켜 자신들의 방식대로 만든 소위 ‘싱글 몰트’였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위스키는 싱글 몰트였다. 각자의 증류소에서 몰트로 만든 위스키를 각자의 볼트(위스키 숙성 창고)에 넣고 숙성시켜 팔았다. 이를테면 가양주를 조금 넓힌 개념에 가깝다.
위스키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건 그레인 위스키가 등장하면서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싱글 몰트는 향미는 풍부했지만 증류에서 일어난 오류나 숙성 환경에 따라 그 맛이 들쭉날쭉했고, 증류소마다 격차가 컸다. 게다가 같은 증류소라도 각 배치(batch, 같은 공정을 거쳐 숙성에 들어간 위스키)마다 그 맛이 달랐다. <위스키의 지구사>를 쓴 케빈 R. 코사르의 표현에 따르면 21세기에 각광받는 싱글 몰트 위스키는 ‘20세기 초만 해도 블렌디드 위스키에 비해 형편없는 술’로 여겨졌다. 연속 증류 방식의 그레인 위스키는 저렴했고, 상대적으로 마시기엔 부드러웠지만 맛이 얕았고 몰개성하다는 평을 받았다. 과거의 싱글 몰트와 그레인 위스키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모두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대의 최신 해법으로 등장했다.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 몇몇 영리한 사람들은 어딘가의 볼트에 있는 싱글 몰트들과 대량생산한 그레인 위스키 원액들을 절묘하게 혼합해 ‘언제나 같은 맛을 내는 고급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블렌딩’이라는 기술과 블렌디드 위스키라는 20세기 최대 히트 상품의 탄생 배경이다. 이 시기 블렌딩의 시작을 함께한 선조들 중 하나가 바로 발렌타인이다. 발렌타인의 창립자인 조지 발렌타인(George Ballantine)은 182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첫 식료품 및 주류점을 개업하면서 위스키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아들인 아치 볼드 발렌타인의 대에 와서는 여러 증류소의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균일한 맛을 내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판매했는데, 그 시점이 19세기 후반이다. 스코틀랜드의 주류 업자들이 그레인 위스키와 몰트 위스키를 블렌딩해 팔기 시작한 시점이 1860년대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타인은 균일한 맛과 향을 내도록 블렌딩하고 이를 브랜드화한 위스키 브랜드의 선조 중엔 드물게 두 세기를 거치며 굳건하게 살아남은 브랜드다.
 
발렌타인 글렌버기 12년. 감미로운 토피와 사과의 달콤함, 부드럽고 풍부한 바닐라와 크리미한 질감이 특징이다.발렌타인 글렌버기 15년. 붉은 사과와 블랙커런트 등의 과실에서 오는 아로마와 벌꿀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향, 벨벳처럼 매끄러운 텍스처가 특징이다.발렌타인 글렌버기 18년. 붉은 사과와 레드 베리의 아로마, 허니콤 캔디의 근사한 달콤함이 코끝에서부터 느껴진다. 실키한 텍스처와 넉넉하고 긴 여운이 특징이다.
이런 발렌타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싱글 몰트로 ‘발렌타인 글렌버기’를 내놨다는 건 당연히 거대한 사건이었다. 브랜드는 이유 있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2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글렌버기 디스틸러리는 발렌타인 위스키의 제조 및 숙성을 위해 사용하는 오래된 증류소 중 하나다. 가장 큰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증류소에서 생산한 위스키 원액들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발렌타인이 가진 매력의 심장부라는 데 있다. 발렌타인 관계자는 “발렌타인에도 물론 다른 몰트들이 들어가지만, 글렌버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키 몰트”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블렌딩을 할 때 그레인 위스키로는 보디를 만들고, 몰트 위스키로는 개성을 더한다. 글렌버기가 발렌타인의 ‘핵심 몰트’라는 말은 글렌버기가 곧 발렌타인이 다른 위스키와 구분되게 하는 핵심 형질의 원천이었다는 얘기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글렌버기야말로 발렌타인의 얼굴이다.
발렌타인이 글렌버기에 기울이는 노력은 최근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증된다. 발렌타인은 2004년 글렌버기 증류소에 있는 4개의 오리지널 증류기를 보존하고, 2개의 새로운 증류기를 추가하며 향후 오랜 역사를 지닌 증류소의 아이덴티티를 지속적이고 더 큰 볼륨으로 이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애정의 중심에는 글렌버기의 퀄리티에 대한 믿음이 있다. 글렌버기를 출시할 당시 발렌타인 측에서 ‘숨겨두기엔 너무 좋아서’라며 수줍게 고백한 바 있을 만큼 싱글 몰트 그 자체로도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한다. 진한 토피 향과 발효 때부터 생성되어 증류를 거치며 농축된 열대 과일의 달콤함과 사과의 상큼함, 최상급의 오크통에서 유래한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크리미한 질감의 조화가 화려하면서도 튀지 않고 우아하게 어우러진다. 그에 더해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길게 남는 피니시가 발렌타인 글렌버기의 공통된 특징이다. 발렌타인 글렌버기는 발렌타인 글렌버기 12년, 발렌타인 글렌버기 15년, 발렌타인 글렌버기 18년 3종이 있다.
 
발렌타인 위스키 원액들을 살피고 있는 발렌타인의 마스터 블렌더 샌디 히슬롭.

발렌타인 위스키 원액들을 살피고 있는 발렌타인의 마스터 블렌더 샌디 히슬롭.

발렌타인 글렌버기와 샌디 히슬롭

조지 발렌타인의 아들인 아치 볼드 발렌타인 때부터 따져도 약 15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스카치 위스키’는 전 세계를 장악했고, 20세기 선진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 선봉은 스카치 블렌디드 위스키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발렌타인을 논하지 않고는 20세기 위스키 취향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 발렌타인은 발렌타인 17년, 발렌타인 21년, 발렌타인 30년을 필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맛과 향의 위스키로 발돋움했다. 현재는 1년에 약 7억 병이 판매되는 유럽권 1위이자 세계 2위의 브랜드. 풍부한 보디감과 완벽한 밸런스로 2002년부터 지금까지 약 200회 이상의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수상한 바 있다. 특히 발렌타인이 타 브랜드와 가장 큰 차별점은 블렌디드 위스키의 정점에서 그 심장이 되는 싱글 몰트 발렌타인 글렌버기를 내놓으며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중심에는 혁신의 마스터 블렌더 샌디 히슬롭이 있다. ‘위스키 제국의 차르’로 일컬어지는 샌디 히슬롭은 발렌타인의 역대 다섯 번째 마스터 블렌더다. 이 말은 200년을 이어온 발렌타인의 유구한 역사에서 오직 다섯 명만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의미다. 특히 그는 두 명의 마스터 블렌더와 함께 일하며 위스키의 거의 모든 것을 습득한 유일한 인물이다. 3대 마스터 블렌더인 잭 가우디에게 위스키를 배웠고, 잭 가우디의 뒤를 이은 4대 마스터 블렌더 로버트 힉스의 시대를 보좌한 바 있다. 글렌버기가 샌디 히슬롭의 시대에 나왔다는 점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혁신으로 향하는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샌디 히슬롭은 마스터 블렌더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열정, 경험과 직관을 꼽는다. 마스터 블렌더는 수확된 원료의 품질 테스트에서부터 길게는 수십 년에 걸친 위스키의 증류, 숙성, 블렌딩 과정을 헌신과 끈기로 지켜보고 예측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소임은 위스키 맛의 일관성 유지다. 마스터 블렌더는 몇십 년 전에 블렌딩된 발렌타인 위스키와 오늘 블렌딩한 위스키가 동일한 맛과 향을 낼 수 있도록, 제조 과정의 모든 단계를 일관되게 관리하고 책임진다. 5대 마스터 블렌더인 샌디 히슬롭은 선대 마스터 블렌더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 세대의 마스터 블렌더에게 발렌타인 위스키 비법을 전승할 것이며, 후대에도 변하지 않는 발렌타인의 예술적 블렌딩을 유지하는 기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 BALLANTINE’S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