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이돌은 어떻게 아티스트가 되는가
아이돌이 아티스트가 되는 길은 당신의 생각보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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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시작된 오랜 아이돌 산업의 오랜 팬인 나로서는 속이 상했다. 해리 스타일스의 말은 그의 출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엑스팩터>라는 영국 가수 선발 프로그램 출신이다. 중간 탈락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은 다른 탈락 예비생 네 명과 묶어 그룹으로 다시 도전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그렇게 후다닥 결성된 그룹이 BTS 이전 전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었던 원 디렉션이다. 멤버들이 솔로 앨범을 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세상은 별 기대가 없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으로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간 스타는 몇 없다. 너무 적어서 여기 리스트를 모두 공개해도 된다. ‘엔싱크’ 출신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테이크 댓’ 출신 로비 윌리엄스다. ‘뉴 에디션’ 출신 바비 브라운은 성공 기간이 너무 짧았다.
해리 스타일스의 솔로 1집과 2집은 놀라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 뭔지 알고 있는 뮤지션의 앨범이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솔로 앨범이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일은 거의 없다. 돌아보면 훌륭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로비 윌리엄스의 첫 솔로 앨범도 평가가 좀 박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솔로 가수들의 경력은 상업적으로는 성공적인 1집으로 시작해 상업적으로도 실패한 2집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다. 비평적인 성공은 대개는 꿈도 꾸지 않는다. 해리 스타일스는 그런 의심을 겨우 두 번째 앨범으로 파괴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이런 일은 저 같은 (아이돌 그룹 출신인) 사람에게는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의미였다. 다른 원 디렉션 멤버들은 1집과 함께 거의 커리어를 끝냈다. 덧붙여, 얼마 전 비극적으로 작고한 멤버 리엄 페인의 명복을 빈다.
사례가 쌓이면 교훈이 만들어질 때도 됐다. 아티스트로 성공한 아이돌과 실패한 아이돌의 차이는 무엇인가? 1. 적어도 노래를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잘하는 프런트맨이어야 한다. 2. 아이돌 시절에도 팬이 독보적으로 많은 멤버였어야 한다. 3. 아이돌 시절에도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적 취향이 있었어야 한다. 간단하다. 재능과 인기와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아이돌 출신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의심과 편견을 뚫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악적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아이돌 출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괄시를 받아야 하나. 그렇다. 적어도 미국 음악 시장에서 아이돌은 천출이다.
2024 MAMA 무대를 보다가 약간 감격했다. 사실 나는 지드래곤이 지난 몇 년간 멋이 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영광 속에서 사는 사람 특유의 불안함 같은 것이 느껴진 탓이다. 아니, 나 따위가 뭐라고 지드래곤의 멋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잠시 반성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뒤 비슷한 자괴감에 빠진 분들이 계실 것이다. 사람 생각은 어차피 다 비슷하다. MAMA 무대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과거의 영광을 과거에만 머무르게 할 생각은 없다는 기개가 넘쳤다. 역시 나 따위가 뭐라고 지래드곤의 멋을 논하겠는가. 다시 한번 크게 반성한다.
사실 지드래곤은 아이돌이라기엔 이미 아티스트인 존재였다. 지드래곤 이전에 음반 제작에 그렇게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아이돌은 없었다. 물론이다. 당신은 가사를 쓸 수도 있다. 스타일링에 관여할 수도 있다. 벌스를 좀 쓰거나 멜로디 라인을 만질 수도 있다. 작곡, 편곡을 비롯한 모든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돌은 아티스트가 될 기회를 얻는다. 처음엔 모두가 그랬다. 저걸 지드래곤이 다 썼겠어? 어차피 노래는 다 테디가 만들고 옆에 앉아 있기만 한 거 아냐? 천재 마케팅도 좀 작작 해야지? 맞다. 나도 그랬다. 이 글은 지속적인 반성의 연속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게 내가 지금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한 아이돌 출신에 대한 음악적 편견이다. 가만 생각해보시라.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아이들의 전소연에 대해서도, 최근에 엄청난 트렌드를 만들어 낸 ‘APT.’의 로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한동안 의심했다. 다시 반성한다.
지드래곤은 한국 아이돌 시장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 중 하나다. 아이돌과 아티스트라는 단어를 동시에 쓰기를 꺼리던 사람들의 의심을 제거했다는 건 굉장한 업적이다. 비스트의 용준형, 블락비의 지코, 아이들의 전소연, 세븐틴의 우지는 지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드래곤은 기획사들로 하여금 아이돌 멤버들을 통제하는 것보다도 개성과 재능을 빠르게 발견해서 써먹는 것이 장사에도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참 엉망인 것 같은데 가끔 아름답게 작동한다. 사실 지금 한국 아이돌 시장의 변화는 흥미롭다. 여전히 음악 시장의 트렌드를 지휘하는 미국과 영국 시장에서 아이돌 그룹이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팝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보이 그룹과 걸 그룹을 제작하는 건 트렌드에서 멀어졌다. 제2의 해리 스타일스가 나올 시장 자체가 없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아이돌을 제거하면 한국 음악 시장은 거의 소멸한다.
여기서 좀 재밌는 간극이 생긴다.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미국 시장과 한국 시장에서 쓰임새가 다른 단어다. 지금까지 나 역시 저스틴 팀버레이크, 로비 윌리엄스와 해리 스타일스를 ‘아이돌 출신’이라고 썼다. 영어식으로 정확히 말하면 ‘공장 제조된 보이 그룹 걸 그룹 출신’이어야 한다. 물론 한국 아이돌도 공장 제조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산업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공장 제조식으로 만들어도 가장 까탈스러운 음악평론가들마저 만족하는 음악을 내놓는 것이 한국 아이돌 산업이다. 영미권은 그렇지는 않다. 엔싱크와 백스트리트 보이즈와 원 디렉션의 음반이 그래미 올해의 음반상을 받는 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파이스 걸스의 음반이 브릿어워드에서 중요한 상을 받는 일도 없었다. 기껏해야 베스트 뮤직비디오상 정도다. 한국은 까탈스러운 한국대중음악상 평론가들도 ‘올해의 노래상’을 에스파와 뉴진스에 바치는 나라다. 한국에서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개념은 생각처럼 굳건하지 않다. 점점 더 말랑말랑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아이돌은 어떻게 아티스트가 되는가? 여전히 조건은 있다. 앞서 내가 말한 조건을 짧게 다시 인용해보자. 1. 아이돌 시절에도 노래를 잘하는 프런트맨이어야 한다. 2. 아이돌 시절에도 팬이 많은 멤버였어야 한다. 3. 아이돌 시절에도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적 취향이 있었어야 한다. 조건을 수정해야겠다. 각각의 조건에서 ‘아이돌 시절에도’라는 문장을 다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장 제조되는 시절에는 어떤 것도 공장 제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아이돌 출신 아티스트’라는 말은 이젠 거의 존재가치가 없다. 모두가 아이돌이고 모두가 아티스트다.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아이돌 출신 솔로가 대중에게 뮤지션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해리 스타일스의 이름을 다시 꺼내야겠다. 아마도 한국의 뮤지션, 그러니까 아이돌인 뮤지션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은 해리 스타일스가 그래미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순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MAMA 무대가 아니라 한국대중음악상 무대에서 ‘올해의 노래’가 아니라 ‘올해의 음반상’을 받는 순간? 물론 한국대중음악상이 올해의 노래상은 아이돌에게 주면서 음반상은 기어코 (아주 괘씸하게 과장하자면, 홍대 벗어나면 누구도 모르는) 뮤지션들에게만 준 걸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순간이 될 것이다. 아니다. 대체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게 뭔지 누가 아는가. 우리는 그래미 같은 고답적이고 딱딱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지켜온 음악상이 없다. 그러니 지드래곤이 무대에 올라 “이런 일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감격적으로 하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큰 상관은 없다. 이미 그런 일은 지드래곤에게 일어났다. 지코에게 일어났다. 전소연에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로제에게 일어나고 있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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