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훈의 점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제한에서 무한을 찾아낸 젊은 예술가의 초상. | 듀오 인터뷰,선우훈

신기주(이하 신) 오늘은 점 좀 많이 찍으셨나요?박찬용(이하 박) 밤새 점 찍다가 자고 오후 3시쯤에 일어나신다던데요.선우훈(이하 선우) 하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애들 때문에요.신_애들?선우_ 강아지 2마리, 고양이 3마리, 패럿 5마리 길러요. 여자 친구가 기르기 시작했는데 같이 기르다 보니까 많아졌어요. 아이들 밥 먹이는 게 너무 기쁜 일인 걸 깨달아서 회사 그만두고 동물 간식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저는 집에서 밥 챙기고 낮에 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해요. 일 끝나고 앉으면 밤 10시예요.신_ 그 점이 고달픈 점이군요.박_(박장대소) 역시 편집장의 유머 감각은 듣던 대로 탁월하세요.신_(점입가경) 그 점이 저의 탁월한 점이죠.선우_.......•신_작가님은 도대체 어쩌다 점으로 작업을 하게 되셨나요. 왜 점을 찍으세요?선우_미대를 다니다 휴학하고 군대에 갔는데 너무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군대 행정실 컴퓨터에는 그림판 프로그램밖에 없었던 거죠. 포토샵은커녕. 그걸로 그리려다 보니까.신_ 점에 얽힌 사연이 점점 점입가경이네요. 열악한 환경이 점을 낳은 거네요. 그런데 지금은 제대했잖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밤을 새워가며 점을 찍고 있네요. 심지어 서울대 미대에선 조소를 전공하셨잖아요? 점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입체를 만들던 아티스트가 형체도 없는 점만 찍어요. 왜죠?선우_구차하게 말하자면 재료비가 들지 않아서?박_제작비, 중요하죠.선우_사실 전신상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절차가 많아요. 저는 처음부터 완성된 걸 보고 싶었어요. 컴퓨터 그래픽을 쓰면 그럴 수 있더라고요. 저는 아무래도 자라면서 게임을 많이 접한 세대예요. 스타크래프트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많이 접하다 보니 점이라는 표현 방법을 떠올리게 된 것 같아요. •신_뛰어난 아티스트에게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피카소나 잭슨 폴락이나 마크 로스코를 생각하면 바로바로 떠오르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예술가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건 자기만의 스타일을 세상에 각인시킨다는 것 같아요. 젊은 작가지만 이미 선우훈 하면 컴퓨터로 하나하나 찍어낸 점이 떠올라요. 그 점이 모여서 형태가 되고.선우_맞아요. 편하게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많았어요.신_ 언제부터 점을 내 스타일로 밀고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나요?선우_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300일 넘게 농성했던 김진숙 위원이 학교에 강연을 온 적이 있어요. 그걸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크레인 높이가 35m예요. 그림판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포토샵을 배우기 시작했어요.박_그림판을 쓰다가 포토샵을 쓰니 할 수 있는 게 많아졌겠네요?선우_그림판에는 레이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왜 점을 찍느냐에 대한 대답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저 편해서 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원래 순수예술, 그러니까 파인 아트에는 설명이 필요하잖아요.신_ 선우훈의 예술 세계에서 레이어가 생기기 시작했던 셈이네요.선우_그때부터 모니터 화면 구성의 가로세로 그리드와 그 안의 픽셀을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박_그리드와 픽셀이 민주적이다?선우_집단 안엔 늘 각자의 역할이 있어요. 사회 지도층은 머리고 보통 사람들은 발이라는 말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 안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있어요. 하지만 개체가 아니라 세포 단위로 봤을 때는 더 중요한 세포라는 게 거의 없잖아요. 저는 컴퓨터 그래픽의 화소 하나하나를 세포라고 봤어요.   •박_그 점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거니까 점 하나하나가 모두 평등하고 중요하단 말씀이네요.선우_제 그림에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화소가 없어요. 각자의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제 역할을 할 뿐이에요. 각 화소가 모두 반짝거려야 전체 영상이 완성되죠.신_ 저기 걸려 있는 작품 는 그렇게 완성된 거군요.선우_점을 찍으면서 내가 왜 이 작업에 끌렸는지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김진숙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이 소재를 왜 내가 다시 점으로 해석하고 싶었는지도 생각했고요. 계급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요.박_평등, 민주, 수평에 관한 이야기니까요.선우_그런 진지한 이야기를 게임처럼 풀어내고 싶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루하고 어렵고 심오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요. 이른바 운동권이 그걸 재미있게 표현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박_그 사람들은 재미가 없었죠.선우_우리 세대한테 웹툰과 게임은 굉장히 재미있는 장르예요. 둘 사이의 교차점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아주 정치적인 이야기를 아주 서브컬처적인 방법으로 풀고 싶었어요.  •신_이제야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왜 선우훈을 하이라이트했는지 알 것 같네요.박_편집장님은 이번 전시에 초대된 3명의 한국 작가들 가운데 선우훈이 아니라 이불 작가나 파킹찬스의 박찬경 작가를 인터뷰하자고 하셨답니다.신_ 제 시각이 올드했던 거죠. 이불 작가나 박찬경 작가는 이미 유명하고 뛰어난 분들이지만 분명 이번 전시에서 정말 참신한 발견은 선우훈이었는데, 그걸 못 알아봤던 거죠. 눈 밝은 박찬용 에디터가 보석을 알아본 거고.박_아닙니다, 편집장님도 훌륭하십니다.선우_.......신_ 이번 전시에는 정말 기라성 같은 세계적 작가들이 초대됐어요. 레이몽 드파르동, 론 뮤익, 데이비드 린치, 알레산드로 멘디니,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뫼비우스까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높은 수준이 느껴져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광고주라고 까르띠에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박_광고에 연연해야 하는 편집장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솔직히 진심으로 들리지는 않네요.신_(못 들은 척) 그런데 그런 수준 높은 전시에 초대된 3명의 한국 작가 가운데 한 분이세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도 선우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적극적이고 열렬했다고 들었습니다. 재단이 찾는 바로 그런 작가였다고.선우_처음 까르띠에 재단과 인터뷰할 때 제 작품 을 들고 갔어요. 뜻밖에도 정말 좋아하셨어요. 점으로 그린 웹툰이라는 소재가 신선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박_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처음 연락 온 건 언제였나요?선우_2016년 11월경이었어요.박_‘왜 나한테?’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선우_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사회적 이슈와 새로운 예술 형식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선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사실 웹툰 쪽엔 저보다는 거장이 많은데.박_윤태호.신_조석.박_이말년.선우_어쩌면 기존의 웹툰을 전시하면 감동받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웹툰은 많은 컷을 계속 따라가면서 읽다가 스토리에 감동을 받잖아요. 전시에선 그런 시각적 효과를 구현하기 어려우니까요. 전시라는 형식에 어울리는 웹툰 작품을 찾다 보니 제가 아니었나 싶어요.신_말씀하신 것처럼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성향과도 잘 맞아서일 겁니다. 딜러 스코피디오 렌프로의 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잖아요. 환경 문제 같은 전 지구적 이슈를 그래픽화한 작품인데 작가님 작품 이상으로 정치적이고 논쟁적이죠. 이미 아름다움으로 완성된 고전미술과 달리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현대사회와 충돌할 필요가 있어요. 선우훈의 작품이 딱 그렇네요. 수많은 점은 선우훈과 한국 사회가 충돌하는 지점인 셈이니까.박_게다가 작가님은 1989년생이에요. 젊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편집장님은 이불 작가님을 인터뷰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신_잘못했습니다.박_제가 선우훈 작가님을 강력하게 추천했어요. 그런데 저 역시 궁금했어요. 웹툰 작가는 많은데 그중에서도 왜 선우훈이었을까.선우_제가 쓸데없는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웹툰은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장르라 작가한테 파인 아트적인 요소까지 요구하진 않으니까요. 그렇게 대중적인 웹툰 작업을 잘하고 계시는 분도 많고. 반면에 저는 한눈을 팔아서 그런 것 같아요.신_왜 자꾸만 한눈을 파나요? 조소과 미대생이 그림판으로 점을 찍고, 웹툰 작가가 파인 아트를 추구하고, 점으로 사회에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파격의 연속이네요.선우_저는 전라북도 정읍에서 자랐어요. 아주 작은 지방 소도시죠. 시내가 작아서 자전거를 타면 끝에서 끝까지 다 갈 수 있었어요. 버스도 서울 와서 처음 타봤어요. 건물이 10층 이상인 것도 아파트 말고는 본 적이 없었어요. 고3 때 입시 때문에 강남 선릉에 처음 왔는데 테헤란로를 가보니까 서울이 다 이렇게 생긴 거예요. 놀랐죠. 대학 정원도 20명인가 22명이었는데 5명 빼고 다 예고 출신, 2명 빼고 다 서울 출신이었어요. 문화 격차와 경제 격차를 크게 느꼈죠. 소수자로서의 깨달음 같은 게 있었어요.박_자신과 다른 학생들은 왜, 어떻게 다른지? 서울과 지방은 왜 다른지?선우_격차를 생각하게 된 거죠. 한진중공업 사건을 보면서 사회적 문제도 인식하게 됐고요. 부모님도 버스 운전을 하시고 공장에 다니세요. 격차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점점 소수자로서의 안목도 확장됐어요. 지금은 다수자로서의 삶이 오히려 불행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불행이죠.신_행복한 불행이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으니 행복하지만, 그런 질문을 안 던지다 보면 질문을 던질 줄 모르는 사람이 되죠. 결국엔 자신의 좌표를 스스로 찾을 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리죠.박_좌표를 찾는 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죠. 운명처럼.신_선우훈은 끊임없이 좌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나라는 점을 찍을 사회 속 좌표를 찾았던 거고. 결국 모든 이야기가 다시 점으로 이어지네요.•선우_ 웹툰 작가로 활동하면서도 많은 격차를 느꼈어요. 한국에서 웹툰이나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이런 장르를 가성비가 높은 문화 향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박_저비용 고효율?선우_한국에서 대학생들은 효율적으로 살기를 강요당해요. 여가를 위한 돈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요. 반면에 인터넷은 공공재처럼 깔려 있어요. 그래서 다들 공짜로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웹툰을 봐요. 가성비 높은 유흥이라는 걸 기반으로 웹툰과 게임 산업이 성장했어요. 그런데 웹툰과 게임이 젊은 세대한테 끼친 영향 중 하나가 지도자적 시점이라고 생각해요.신_지도자적 시점?선우_대부분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제 그림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진행되거든요. 스타크래프트도 심시티도. 그런 시점의 게임을 하다 보면 전체주의 지도자 같은 시점을 학습하게 된다고 생각해요.신_정작 본인들은 가성비의 노예인데, 게임 안에선 권력적 시점을 학습하게 된다는 거네요. 그래서 세상을 왜곡해서 인식하게 된다는 거고.선우_권력자적인 눈으로 보기도 하고, 동시에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에는 손가락질하기도 하고요. 카페에 앉아 친구랑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좋은 문화 향유일 수 있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럴 거면 PC방 가서 4시간 동안 게임할 수 있는데 그런 데를 왜 가냐?”박_폭력적이네요.선우_그렇게 서로 손가락질하는 태도가 웹툰 댓글 창에서도 보여요. 그런 태도가 서로 계속 재학습되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웹툰 작가가 휴재를 하면 괜히 손가락질하고.신_공짜 콘텐츠를 제공받는 입장인데도? 모두가 모두한테 지독한 가성비를 요구하는군요. 개개인이 끊임없이 그렇게 요구받으며 살고 있으니까.선우_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락으로 학습된 거라고 생각해요. 위악적인 행동이잖아요.박_댓글을 읽으세요?선우_전부 다 읽어요. 정작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작가가 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게시판 문화에선 내가 잠깐 관심을 끌면 그만인 거니까. 잠깐 튀어서 주목받고 싶고. 그게 다수의 또래 문화고, 그것 역시 비용이 들지 않는 놀이죠. 작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 댓글을 읽을 다른 독자들이 중요하지.  •신_그러고 보니 이번에 전시된 역시 쿼터 뷰네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그러니까 점이라는 방식의 민주적 속성과 쿼터 뷰라는 권력적 속성이 충돌하고 있달까.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도 결국 그런 수평과 수직의 충돌이 빚어낸 것들이고. 강남역 살인 사건처럼.박_강남역에서 광화문까지 점으로 서울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논쟁적인 사건들을 재구성해놓았는데, 모두가 트위터에서 이슈가 된 사건이네요. 마치 연간 트위터 결산 같달까.선우_요즘은 사회적 이슈가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퍼져나가요. 전 사람들이 국회에서 벌어졌던 필리버스터를 패러디하고 이해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필리버스터는 ‘인강 같은 거’고, 후원금은 ‘별풍선 따는 거’라고들 했죠. 그게 젊은 세대의 눈에 비치는 정치죠. 젊은 세대들한테 정치는 생중계되는 인강 같은 거죠. 거리감도 없어요. 탄핵 과정 역시 유튜브로 생중계됐으니까요. 정치도 모바일 콘텐츠의 일종인 거예요. 스크린이 먼저고 현실이 다음인 거죠. 그렇게 전파된 반응을 저는 다시 제 작품에 담았어요. 재귀적으로 모은 거죠.(순간 도슨트와 중년 여성들이 선우훈의 작품 앞에서 멈춰섰다. 사람들은 도슨트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박_도슨트의 설명을 대중과 같이 직접 듣는 건 처음이시죠? “나중에 이 작가를 기억하라”고 했어요. 영광이겠는데요? 그런데 중년 여성분들의 반응이 신선하네요? 모니터 속 그림이 움직이니까 곧바로 “우와!” 하는 반응이 나왔어요.선우_반면에 어린이들은 제 작품을 보자마자 스크롤을 내려버려요.박_저는 웹툰 문화의 대단한 발전이 스크롤을 내리며 서사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 같은 경우 역시 스크롤을 내릴 뿐인데도 이야기가 만들어지죠.선우_세로 스크롤이 웹툰의 발명은 아닐 수도 있어요. MS에서 제공하는 스크롤이 세로이기 때문에 세로로 한 거죠. 기본이 가로였다면 가로로 했을 거예요.박_모든 아티스트는 도구의 제약을 받아요. 작가님은 자기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를 써보고 있군요. 그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줘요? 대부분의 독자는 웹툰 유료화에 짜증 내고, 재미없으면 집어던지고, 30초 이상의 집중은 한계일 텐데.선우_독자들이 알아채는 부분만 신경 쓰지는 않아요. 가볍게 보는 독자도 뭔가 느낌을 받으려면 저만 납득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야 해요. 솔직히 수많은 픽셀에서 점 하나가 어긋나 있는 건 아무도 눈치를 못 채요. 저는 느껴요. 아, 여기 잘못했네. 그림이 틀리고 말고가 아니라 내적 질서의 문제예요. 그게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예요.신_점점 무서워지네요.선우_픽셀로 이뤄진 그림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구애를 받지 않고 늘 일정한 해상도를 유지할 수 있어요. 휴대폰에서든 컴퓨터에서든 거의 원본에 가까운 그림을 볼 수 있죠.박_게다가 종이에 인쇄되거나 그려진 작품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풍화되지 않고.선우_늘 똑같은 상태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디바이스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원본을 볼 수 있죠.신_점점 더 어마어마한 야심이 느껴지는데요.박_야심도 야심인데, 이건 우리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발상이에요. 저만 해도 그림은 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봐야 한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작가님은 다르잖아요.신_아직도 종이 잡지를 만들고 있는 편집장과 에디터여서. 그런데 선우훈 작가는 멀티 플랫폼을 고려하면서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니.선우_사람들은 모니터로, 휴대폰으로, 태블릿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보죠. 제 작품은 모든 게 원본에 가까운 이미지예요. 모든 점은 그림 속에서 제가 정한 정확한 좌표 위에 찍은 거예요. 그림 자체가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 좌표 수식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언제나 변함없이 정확하게 원본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거예요.박_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이야기네요.선우_거의 그것에 도전하는 거죠.박_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열화되지 않은 나의 이데아를 대중에게 알린다.신_신문은 종이 신문이고 잡지는 종이 잡지고 그림은 종이 그림이고, 이런 식으로 사고하던 시대의 예술은 끝났다는 말씀 같네요. 디지털 시대엔 콘텐츠를 담을 그릇이 무한히 다양하니까. 모든 플랫폼에서 최적화될 수 있는 완벽한 콘텐츠는 점이다.박_점 하나가 이렇게 깊다니.신_디지털적 사고의 본질은 결국 0과 1로 생각하는 거죠. 점을 찍거나 안 찍거나.선우_0과 1로 이뤄진 픽셀이야말로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문법의 가장 기초라고 생각해요. 를 만들 때 진짜 0과1로 계산해가면서 메모리를 적게 쓰려고 하던 그 문법이 픽셀이잖아요? 그때보다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제게 왜 픽셀로 그리느냐고 물어봐요. 3D도 많이 있는데 왜 픽셀로 하느냐고. 저한테 픽셀은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되는 수단이에요. 모니터와 일대일로 대응하는걸 좋아해요. 브라운관의 빨강, 초록, 파랑을 봐요. 그 한 화소, 한 화소의 차이를 인식하고 딱 제자리의 1픽셀에 들어 있을 때 각자 다른 색으로 빛나는 걸 보는 쾌감이라는 게 있어요.신_그러고 보니 의 편집장이시네요.선우_제가 하는 일의 저변이 넓어졌으면 싶어요. 저는 웹툰을 만들지만 웹툰 세계에는 어떤 게 있다는 이야기도 계속하고 싶을 것 같아서요. “만화가 무슨 예술이야?” 같은 말씀을 하시죠. 만화도 창작인데. 담론이 없을수록 그런 현상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박_담론이 없으니까 예술이 못 된다.선우_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역시 작가가 제일 재미있다는 걸 느꼈어요. 을 그릴 때도 사람들이 재미있게 봤다고 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어요. 그 느낌을 잠깐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가끔 제가 의도하고 담아내려 했던 걸 읽어주시는 독자가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볼 때 가장 기뻐요. 그런 분이 많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가 의도한 것에 더해 파생된 것까지 즐겨주시는 분들을 볼 때의 기쁨이 가장 좋아요.박_선우훈은 파인 아티스트지만 분명 웹툰 작가인 거죠?선우_웹툰 시장의 성장이 굉장히 빨라요. 10년 안에 거의 고착화됐어요. 영상 시장의 1차 판권 시장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공식에 따라 흥행 작품도 만들어지고, 영화화하기 쉬운 작품이 구성되기도 하고. 시장 논리에서 밀려난 작품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요. 최소한의 상업성을 이끌어내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어요. 계속 개념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도록요. 저는 돈이 되는 예술을 좇는 것 같아요. 지속이 가능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하는데 지속도 할 수 있는.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보다 이게 더 커요.박_점을 찍는다는 방법 자체는 부족의 산물이었어요. 혹시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 돼서도 점이라는 표현법을 유지하실 건가요?선우_서울에 이주해 사는 사람들은 늘 부동산을 생각해요. 저는 레고를 좋아하는데 사지 않아요. 공간이 없어서요. 책도 거의 안 사고 전자책을 봐요. 컴퓨터 그래픽은 제게 이상적인 가상의 부동산 같아요. 모든 걸 갖다 둘 수 있는 공간 같은 거예요. 내게만 허락된, 무한한, 임대료가 없는. 그리고 레고의 만족감은 모든 부품이 들어맞을 거라는 안정감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단 하나의 부품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픽셀도 마찬가지예요. 픽셀을 갖다 놓으면 유클리드 기하학적 안정감이 느껴져요. 한국 사회는 결코 그렇게 안정적인 세계가 될 수 없겠죠. 저는 적어도 모니터 너머에 있는 이상으로의 합의점을 보는 거예요. 픽셀을 쌓으면서요. 현실에서의 합의점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픽셀에는 모든 게 잘 돌아간다고 상상할 때의 안정감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게 픽셀은 부족의 산물이라기보다 역으로 부족하지 않음의 상징이 될 수도 있어요. 모든 게 다 들어맞을 때의 쾌감이 있으니까요.•신_픽셀 속에서, 행복하세요?선우_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했어요.박_정말?신_행복하세요?선우_알겠습니다.박_0과 1 같은 디지털적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