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들의 딴짓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셰프들이 대중적인 입맛을 고려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 셰프

지난해 박찬일 셰프가 광화문국밥을 차렸을 때 업계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박 셰프가 기존에 운영한 로칸다 몽로가 고급 레스토랑에 속하지는 않지만, ‘셰프’라는 칭호가 따르는 사람이 대중음식점을 낸다는 사실이 몹시 생경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 출신인 그가 오래전부터 냉면이나 돼지국밥에 얽힌 소회를 풀어온 만큼 대체로 그의 선택을 수용하고 존중하는 눈치였지만. 그리하여 식당 문이 열리자 업계에서 미식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맛보고 입소문을 냈다. 당시 본지도 대세에 따라 박 셰프를 인터뷰했다. 어쨌든 박 셰프가 먹고 자란 음식을 자신이 가진 모든 학식과 기술을 동원해 재현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셰프들을 만나 대화하면 광화문국밥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도 생각해온 아이템이라며 아쉬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박 셰프는 광화문국밥을 열고 업계 선후배로부터 그와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 셰프가 스타트를 잘 끊어준 덕인지, 아님 우연의 일치인지 그 후로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셰프들이 꽤 눈에 띈다. 정창욱 셰프는 탄탄멘 전문점 ‘금산제면소’를, ‘톡톡’ 김대천 셰프는 식빵 전문점 ‘식부관’을, ‘테이블포포’ 김성운 셰프는 파스타 전문점 ‘파스타포포’를, ‘정식당’ 임정식 셰프는 곰탕 전문점 ‘평화옥’을 열었다. 한편 박찬일 셰프는 광화문국밥에 이어 지난 12월에는 곰탕 전문점 ‘광교옥’의 간판을 달았다. 이쯤 되니 이러한 선택을 한 셰프들의 면면에 주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눈에 보이지 않던 국내 미식계의 기류가 이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셰프들이 선택한 종목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안에는 공통적인 핵심 포인트가 있다. 바로 대중 친화적인 종목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셰프들이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잠시 옆길로 빠지는 경향, 즉 고급스러운 파인다이닝보다 대중 친화적인 음식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은 최근 해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패스트푸드를 한 단계 발전시킨 ‘패스트 캐주얼’이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하며 많은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대중 친화적인 식당에 도전하고 있다. 그중에는 미슐랭 스타 셰프들도 포함돼 있다. 마크 래드너는 뉴욕에서 최고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손꼽히는 ‘델 포스토’의 헤드 셰프로 명성을 쌓았다. 그런 그가 미슐랭 1스타에 빛나는 레스토랑을 뛰쳐나와 파스타 전문점, 그것도 한 접시에 10달러도 하지 않는 식당을 차려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예전부터 가격은 합리적이되 건강한 음식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기 위해 이렇듯 파격에 가까운 결심을 했다. ‘노부’와 ‘주마’에서 각각 헤드 셰프를 역임한 영국 출신 셰프 로스 숀한 또한 미슐랭 레스토랑을 나와 라멘집을 차렸다. ‘본 대디스’라는 이름으로 현재 라멘집과 이자카야 등을 운영하는 그가 이렇듯 뜻밖의 선택을 한 배경 역시 래드너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사람들이 일식을 인식하는 기존 방식에 도전장을 내고 싶었어요. 일식도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한 음식임을 증명하고 싶었죠.” 박찬일 셰프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움직임은 훨씬 예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폴 보퀴즈도 버거집을 차려 수익을 많이 냈어요. 마리오 바탈리도 피자집을 운영했고요.” 올 1월 작고한, ‘프랑스 요리의 교황’이라 불리는 폴 보퀴즈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과 함께 대중식당을 운영한 줄은 미처 몰랐다. 눈에 보이지 않던 국내 미식계의 기류가 이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셰프들이 선택한 종목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안에는 공통적인 핵심 포인트가 있다. 바로 대중 친화적인 종목이라는 사실이다.그렇다면 국내 셰프들은 어떠한 연유로 대중음식점에 도전한 걸까. 물론 식당을 운영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윤 창출이겠지만, ‘셰프’라는 타이틀을 두고 대중 음식을 다루는 일은 큰 결심이 따르는 만큼 각자가 품은 뜻이 있을 터이다. 임정식 셰프의 사례는 평화옥 홍보를 맡은 ‘맛있는 책방’ 장은실 대표를 통해 그 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임 셰프는 정식당으로 ‘한식의 파인다이닝’이라는 새 챕터를 열었어요. 그 후 10년을 보내며 정식당으로는 더 이상 한식과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게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죠. 미슐랭 3스타까지 오르면 더 올려다볼 곳도 없고요. 그때부터 본인과 한식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았던 것 같아요.” 실제로 뉴욕 트라이베카에서 정식당을 운영하는 임 셰프는 세계 다이닝 시장에서 몸소 부딪치며 누구보다 간절히 한식의 세계화를 바랐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라멘을 통해 일본을, 얌꿍을 통해 태국 음식을 가까이 느끼잖아요. 임 셰프는 외국인들이 한식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라멘이나 얌꿍 같은 메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라멘, 얌꿍은 물론, 가장 많이 알려진 쌀국수 등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아시아 음식을 보며 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한 탄수화물 음식이라는 힌트를 찾아낸 임 셰프는 그때부터 곰탕과 냉면에 집중했다. 냉면기와 육수용 솥을 구해 직원 식사용으로 도전을 시작한 그는 더 많은 연습 기회를 갖기 위해 팝업 행사를 생각해냈고, 장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작년에 스무 번 가까이 팝업 행사를 가졌어요. 좋은 고기를 넣고 끓이면 무조건 맛이 날 거라고 여겼는데, 어느 때는 국물 맛이 아예 이상하고 또 어느 때는 채소 향이 너무 강해서 버리기를 반복했죠. 그래서 팝업 초기에는 80그릇밖에 팔지 못했어요.” 고전을 면치 못하던 임 셰프는 팝업 행사를 꾸준히 거듭한 결과, 막판에는 하루에 700그릇을 파는 경지에 올랐다. “그 경험들이 뒷받침됐기에 지금의 평화옥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 평화옥을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1000명에 달해요. 덕분에 대중식당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임 셰프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작년 한 해 동안 팝업 행사를 통해 예행연습을 무한 반복하며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에요.” 지난 1월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문을 연 평화옥은 150석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첫 시도인 만큼 위험부담이 클 텐데도 과감하게 초기 투자를 한 대목에서, 평화옥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워 한식을 더욱 널리 알리겠다는 임 셰프의 사명감이 깃든 포부를 읽을 수 있다. 목표가 남달랐기에 지난 1년간 가열하게 팝업에 참여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특별히 배운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빵 만드는 일을 즐겼어요. 그동안 레스토랑에서 쓰는 빵도 가게에서 직접 만들 정도로요. 그래서 가게에서 쓸 빵도 만들 겸 아예 식빵집을 차렸어요.” 지난 9월 식빵 전문점 ‘식부관’을 연 김대천 셰프의 설명이다. 김 셰프가 식부관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건 가간 아난드 셰프의 팝업 행사에서였다. 장은실 대표가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1위를 차지한 아난드 셰프를 초대하려 마련한 팝업 행사였는데, 그때 김 셰프도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행사가 성황리에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김 셰프가 식빵 전문점을 차린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 순간 정말 크게 놀라고 말았다. 2017년 초 CNN이 전 세계 최정상급 셰프들에게 그해 미식의 트렌드를 물었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난드 셰프가 ‘버터와 빵’이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분자 요리에 피로감을 느끼는 동시에 파인다이닝 시장은 포화 상태라며 앞으로 버터와 빵 등 편안하면서도 식사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조명받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빵을 트렌드로 손꼽은 셰프와 새로운 도약으로 빵을 선택한 셰프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며 둘이 그사이 정보를 주고받기라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식빵처럼 식사와 어울리는 빵은 활용 가치가 높잖아요. 일단 제 레스토랑에서 쓰고 있고요. 현재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돈신당’이라는 바비큐 립 팝업을 하고 있는데, 식부관에서 만든 번을 활용하는 중이에요. 3월부터는 식부관에서 하루에 15개씩 샌드위치를 한정 판매할 생각이고요. 먼 미래에는 피자집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이에 앞서 식부관에서 피자 도를 연구할 수도 있겠죠. 일종의 랩처럼 쓰려고 차린 거예요.” 김 셰프는 좋아하는 빵, 그중에서도 확장 가능성이 있는 식빵을 만듦으로써 생각과 활동의 확장을 꾀하는 격이다. 지난 연말, 한 달여 동안 한정 판매한 트러플 식빵이 매일같이 매진된 걸 보면 김 셰프가 의도치 않게 미식의 세계적 트렌드에 잘 편승한 것 같다. 한편 오랫동안 운영해온 레스토랑을 접고 한동안 종적을 감췄던 정창욱 셰프는 다소 엉뚱하게 탄탄멘을 들고 나타났다. 오직 1만2000원짜리 탄탄멘만 내는 식당 ‘금산제면소’를 서울과 대구에 하나씩 낸 것. 평소 입버릇처럼 단일 메뉴를 내는 작은 식당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정 셰프가 글루텐 소화 장애가 있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가 가장 편하게 먹은 밀가루 음식이 탄탄멘이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로 새 출발을 결심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식도락가로서 이러한 트렌드가 오히려 셰프들이 제 역량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오히려 점점 좁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겨우 지탱하고 있는 파인다이닝 시장이 셰프들이 트렌드를 좇아 한둘씩 빠져나가면서 붕괴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시장은 소멸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음식 하나하나의 캐릭터를 고급스럽고 섬세하게 완성하는 가게들이 생겨나면 그것이 파인다이닝의 또 다른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음식 앞에는 자연스럽게 ‘파인’이라는 단어가 붙겠죠.” 장은실 대표의 말에 귀 기울이며 ‘다이닝’이라는 큰 카테고리가 아닌, 파스타, 샌드위치 등 특정 음식 이름 앞에 ‘파인’이 붙는 상상을 잠시 했다. 당장은 다소 어색해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오늘은 평소 너무나 좋아하는 셰프가 치킨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건너 들었다. 원하면 언제나 그의 파인다이닝을 찾아 정찬을 즐길 수 있는 가운데, 그가 축적한 노하우를 집중 투하한 치킨도 맛볼 수 있으리라 상상하니 당분간 이 트렌드를 반길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