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잡지에 이런 이야기도 실을 수 있겠어요?”
브루클린에서 낡은 찻잔에 담긴 페퍼민트 티를 마시던 앨리스 웡이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야한 섹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어른이 되면 별로 덜 야한 섹스 같은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이다. 3년 차 커플이 있다. 안정적으로 사랑하지만 육체적인 호기심은 솔직히 다 충족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너에게 아직 질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듯.
그래서 그 커플은 늘 가던 모텔에 간다. 가장 평범한 남성 상위 자세로 9분 만에 사정까지 끝낸다. 끝나고 나서 올레TV를 틀어 BBC 다큐멘터리를 본다. 이런 걸 야한 섹스라고 하기엔 좀 그럴 것 같지만 세상에는 그런 섹스 역시 적지 않다. 그와 반대되는 야한 섹스는 뭘까?
이 질문을 했더니 앨리스 웡이 물어본 것이었다.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할머니가 한국인이라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 문화를 잘 알았다. 되물어본 이유이기도 했다. “말할 수는 있지만 실을 수 있겠어요?”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나는 남자의 그거랑 손가락이 같이 들어오는 게 좋아요.” 앨리스 웡이 찻잔을 입에서 떼고 말을 이었다. “그거는 내 거기에 들어가고, 손가락은 뒤로 들어오는 거예요. 한 번에 두 부위가 자극받으니까 효율적인 느낌이 들어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정말 야한 섹스였다. O와 X로 야함과 안 야함을 나누는 10명의 섹스 배심원단 같은 게 있다면 8명쯤 O를 들었을 것이다.
앨리스 웡은 배려심이 깊었다. “이거 너무 센 이야기 아니에요?” 그의 배려에 화답하기 위해 나는 ‘붕맨꿀’처럼 귀여운 어감의 신조어를 만든 김예리 씨도 있다고 말했다. 귀여운 신조어를 만들면 좀 덜 노골적으로 보이겠지. 이를테면 고추손. “오 마이 갓. 돈 두 댓. 너무 싫다.” 앨리스 웡이 대답했다.
“나는 거울 앞에서 하는 게 좋더라고.”
권헌준 씨가 말하는 야한 섹스는 본인의 성 행동을 생각했을 때 좀 온건하다 싶었다. 그는 마트 주차장에 주차한 자신의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스포츠 안에서도 망설이지 않는 남자다(조금 좁을 텐데). “남자는 시각적으로 자극을 받잖아. 거울을 보면서 하면 다 보이니까 더 흥분될 때가 있지. 거울이 있는데도 움직이는 여자가 야하기도 하고.”
남자가 뒤에서 하면서 거울을 바라본다면 권헌준 씨의 얼굴도 거울에 비친다. 자기 표정을 보고 흥분하는 걸까? 권헌준 씨는 그 정도의 나르시시스트인가? “아, 그렇게는 안 보지. 거울과 나란히 있는 자세야.”
권헌준 씨의 이야기에는 늘 다음이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서 모텔이나 호텔에 갈 때 거울 있는 방을 찾아.” 거울 있는 방을 어떻게 찾지? 에어비앤비의 객실 검색 옵션처럼 야놀자 검색 옵션에 ‘거울 가득’이 있나? 권헌준 씨는 고개를 저었다. “객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는 거지. 이 모텔에서는 거울을 볼 수 있나. 어차피 모텔 갈 건데 거울 많은 게 좋잖아.” 다른 걸 떠나서라도 권헌준 씨가 섹스에 관심을 아주 많이 기울인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꼭 그런 것만 야한 게 아니잖아요.” 윤지희 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섹스의 진짜 정의가 뭔지는 몰라도 현대 문명은 인간의 섹스를 성기 마찰을 통한 쾌감 획득 이상의 뭔가로 만들었다. 윤지희 씨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생각하는 야한 섹스는 이런 거예요. 어슴푸레한 새벽 같은 거.”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 섹스란 무엇일까.
“남자와 여자 둘이 있어요. 둘은 친구예요.” 윤지희 씨의 이야기를 듣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집에 가기는 아쉬우니까 둘이 계속 마셔요. 그러다 밤이 다 지난 거죠. 해가 뜨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둡기도 해요. 그러면 그 남자랑 여자랑 어딜 가겠어요. 자러 가는 거예요. 그리고 둘의 사이는 거기까지일 거예요. 절교하지도, 연인이 되지도 않겠죠. 저는 그런 섹스가 가장 야한 것 같아요.”
사실 정말 야한 섹스라는 건 없다.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섹스 자체가 야할 것이다. 가슴만 만져도 야할걸. 반면 성 경험이 풍부할수록 섹스가 별로 야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암실에서 남자와 여자가 애널 섹스를 포함해 3 대 3으로 다섯 시간 동안 섹스를 하고 나서 씻고 밖으로 나오면 세상에 뭐가 야해 보이겠나.
“저는 확실히 있습니다. 69예요.” 다만 섹스에 대한 생각이 그 사람의 세계관을 닮은 건 확실하다. 야한 섹스의 정의가 69라고 말한 박현우 씨는 평소에도 매사에 견적을 내듯이 산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는 정의를 내리는 게 늘 확고하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야한 섹스’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도 망설임이 없었다. “카카오나무는 연강수량이 2000mm 이상인 곳에서만 자랍니다”라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 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확실할 것이다.
“저는 상대의 반응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한 김성원 씨가 말하는 야한 섹스도 그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이런 말은 좀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자의 그곳이 흥건해지면 야한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김성원 씨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상대를 잘 배려하는 편이다. 이런 남자라면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할 때도 “너랑 같이 갔던 해운대 거기의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제일 맛있었어. 너랑 같이 먹었으니까”라고 할 것 같다.
그러니 여러분도 한 번쯤 지인들과 무엇이 야한 섹스인지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든 애매모호하게 말하든, 아니면 혹시 거짓말을 해도. 그 말은 어떻게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것이다.
이를테면 “저는 느린 섹스가 야한 섹스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 은수현 씨처럼. 그녀는 “뭐가 느린 건지는 비밀이에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은수현 씨는 수줍음이 많지만 말하고 싶은 욕구 자체는 있는 사람이다. 더 캐물었으면 그 비밀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그녀의 비밀을 묻지 않았다. 마감에 늦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