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히트 친 루소 형제는 더 큰 꿈을 꾼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조·앤서니 루소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루소 형제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으로 가장 최근에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비롯해 마블의 가장 큰 영화 중 네 편을 감독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도전을 위해 LA의 맨땅에서 영화 스튜디오 아그보를 설립해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 마블,아이언맨,토르,어벤져스,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전 세계적으로 20억 달러(2조3800억원)가 넘는 수익을 거둔 는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인 영웅들의 이야기다. 루소 형제 역시 블록버스터급 영화만 인정받는 영화판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모여 의기투합했고 독립 영화 제작 스튜디오 아그보를 차렸다. 아그보 스튜디오의 핵심 멤버는 크리스토퍼 마크스와 스티븐 맥필리로, 현재 스토리 부문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은 루소 형제가 만든 등 4편의 마블 영화를 비롯해 총 6편의 마블 영화 각본을 쓴 아티스트들이다. 아그보가 루소 형제에게는 현실판 어벤져스라 할 수 있다. 현재 LA의 다운타운에 건설 중인 아그보 건물은 세 동으로 이뤄진다. 이곳은 작가, 감독, 제작자, 편집자와 스테이지, 영사실, 후제작 시설 그리고 구내식당을 수용할 예정이다. 루소 형제가 대형 규모의 제작 스튜디오를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영화 미디어 그룹 화이 브러더스로부터 2억 5000만 달러(2973억원) 상당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루소 형제가 단순히 감독을 뛰어넘어 예술적 다양성을 지닌 영화계의 거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인디 영화 제작, TV 드라마 연출, 대형 상업 영화 제작, 빠듯한 예산으로 촬영, 사상 최대의 예산으로 촬영 등 20여 년간 감독 일을 하면서 배운 모든 것을 적용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움직이려고 합니다.” 조 루소가 들려준 말이다. 루소 형제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뿌리, 즉 ‘마블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느라 진행하지 못했던 중간 규모의 영화 제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키가 크고 마른 체형, 짙은 색의 물결치는 헤어스타일, 두꺼운 안경테, 그리고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남자가 앤서니 루소다. 다른 한 명은 키가 작고 몸집이 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지만 그 열정 뒤에 코미디가 어려 있는 남자가 바로 조 루소다. 이제 앤서니 루소를 보자. 49살인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놀랍도록 소박한 폭스바겐을 몰고 돌아다니다가 슈퍼히어로들이 비밀스러운 정체로 돌아갈 때 늘 그렇듯 자신이 사는 일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어서 조 루소를 보자. 47세인 그는 역시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사우스 휴잇 스트리트에서 레스토랑 듀엘로를 운영한다. 그는 직접 주방을 돌아다니며 오늘 쓸 재료와 음식을 체크한다. 모든 점검이 끝나면 손님을 위한 식사를 영화 전개 방식과 흡사하게 배치시킨다. 애피타이저는 서두, 앙트레는 클라이맥스, 디저트는 결말 순으로 말이다. 루소 형제는 미국 오하이오주 북부의 클리블랜드에서 자랐다. 이리호 연안에 있는 최대의 공업도시였지만 그들의 유년 시절인1970년대 말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든 도시다. 미국 산업 쇠퇴의 상징, 이리 호수의 오염된 물. 호수 위에 걸린 찌푸린 하늘. 당시 10살, 8살이었던 앤서니?조 루소 형제는 세기말적 분위기의 클리블랜드를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루소 형제에게 취향을 물어보면 항상 ‘클리블랜드’라는 답이 돌아온다. “클리블랜드는 1970년대에 파산했죠. 그래서 우리 기억 속의 클리블랜드는 잿빛 도시에 실업자들이 가득한 곳이에요.” 조 루소의 말이다. 유년 시절 형성된 감수성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다. 루소 형제 역시 클리블랜드에서의 기억을 모든 작품에 반영시킨다. 물론 속 도시는 클리블랜드와 꽤나 다르지만, 뛰어나지만 한 가지씩 결함이 있는 영웅들이 수호하는 위험에 처한 사회라는 점에서 닮았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아이언맨은 루소 형제의 아버지인 버질 루소와 많이 닮았다. 클리블랜드의 유명 정치인이었던 버질 루소는 시의회의 다수당 대표이자 1979년 클리블랜드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으며, 갈등과 파산의 시대를 헤쳐나간 작은 영웅이었다. 1978년 그는 예비선거에서 당시 시장이었던 데니스 쿠치닉과 후에 시장으로 선출된 오하이오주 부지사 조지 보이노비치에게 패배했다. 루소 형제는 아버지를 통해 투지, 격동, 선거유세, 그리고 굳센 마음 등을 배웠다. 1979년의 클리블랜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루소 형제가 할리우드와 베벌리힐스로 대표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우리는 아그보의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 옆에는 어벤져스 핀볼 기계가 있고 중앙 홀 아래쪽에 사무실이 있으며 스낵 선반에는 초콜릿, 그래놀라, 러키 참스 시리얼이 가득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탁자에는 마블 각본을 쓰는 작가에게 쓸모 있을 만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같은 책이었다. 인터뷰 중에 루소 형제는 이따끔씩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나무, 낮게 쌓인 벽돌, 창고, 사무용 건물, 그리고 멀리 현재와 과거, 즉 동부와 서부 사이에 단단한 선을 긋고 있는 눈 덮인 산맥이 보였다. 전망이 참 좋았다. 아그보의 골목?? 건너편에 위치한 새 구역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더 좋은 전망과 공용 공간, 영사실, 그리고 미국 서부 느낌이 나는 큰 고리 모양의 바가 설치된 사무실이 들어설 예정이다. 루소 형제는 이곳을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받는 여가 공간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바람직한 오하이오 출신 가족의 모습이었고, 다 같이 완벽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이상적인 클리블랜드의 모습이기도 했다. 클리블랜드 시절 루소 형제는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숙모, 삼촌, 사촌에 먼 친척들까지 근처에 살 정도로 대가족이었다. 그들은 루소 형제가 만든 최고의 작품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괴상하고 정신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이를테면 루소 형제가 제작한 네트워크 TV 드라마 시즌 1의 10화에서 루실 투의 현기증을 치료하기 위해 버스터가 조지 마이클을 보내 마약을 사게 하는 장면이나 또 다른 드라마 시즌 2의 8화에서 스터디 그룹 구성원들이 그들 중 한 명인 펜 도둑을 찾는 장면 등이 대가족으로 살아본 경험에서 탄생한 장면이다. 정치가 아버지인 버질 루소가 원리원칙주의자라면 어머니 패트리샤 루소는 루소 형제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여유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버질 루소의 조부모가 이민자였기 때문에 그는 루소 형제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직장을 다니기를 원했다. 보통의 이야기가 그렇듯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었고, 반대를 했으니 하마터면 나 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어머니의 설득으로 루소 형제는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볼 수 있게 됐다.루소 형제는 동네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화 등 주로 아트하우스 영화를 상영하던 시네마테크였다. 두 소년은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보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리의 주식은 외국 영화였어요. 프랑스의 뉴웨이브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좋아했죠.” 조 루소의 말이다. 앤서니 루소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대형 상업 영화도 좋아했어요. 그 시절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 광팬이었죠.” “도 좋아했잖아?” 조 루소가 덧붙였다. 루소 형제는 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덧붙이거나 자세히 설명했다.이런 모습을 두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둘이 다투는 걸 보는 게 제일 즐겁습니다. 제가 11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루소 형제와의 인터뷰는 두 대의 기타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리드기타는 동생 조 루소의 몫이고, 리듬기타는 형 앤서니 루소가 맡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 를 함께 봤어요. 옛날 코미디 영화인 도 함께 보곤 했죠.” 조 루소가 얘기했다.루소 형제는 어린 시절 함께 성장하면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하나 세우게 됐다고 했다. ‘지루해지지 말자’였다. 루소 형제의 말에 따르면, 영화를 통해 세계 평화의 메시지를 퍼뜨려도 상관없지만 그 과정에서 관객을 잃는다면 그 이후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원칙은 루소 형제의 작업 전반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관객들을 뒤집고 놀라게 할 게 아니라면 관객을 갖고 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12살 때 완성된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니었어요.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풋내기였을 뿐이죠.” 조 루소의 말이다.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대학교에 진학했다. 앤서니 루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가서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경영학을 배우다가 영문학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조 루소는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둘은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앤서니 루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를 할 계획으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조 루소는 연기를 공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를 보고 난 뒤였다. “형은 자신이 로스쿨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저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7000달러(830만원)로 를 만들었어요. 그걸 보고 수많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를 하고 싶어 했는데 저희도 마찬가지였죠.” 조 루소의 말이다.앤서니 루소는 아버지에게 로스쿨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셨는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죠. 처음에 잠시 그러다 마시겠지 했는데 그 뒤로 6개월간 아버지와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요. 6개월이 지난 날 아버지가 ‘그렇게 할 거라면 최선을 다해서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의지를 보고 얼어붙었던 마음을 푸셨던 것 같아요.”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루소 형제의 첫 번째 각본은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앤서니 루소는 “우리는 삼촌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미용실에서 일하면서 도둑인 세 명의 형제라는 아이디어를 그곳에서 얻었죠. 스스로 영화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완전한 부조리극이었어요”라고 얘기했다. “우린 영화 중반에 각본을 바꿨어요.” 조 루소가 웃으며 얘기했다. 앤서니 루소도 “이렇게 말하려고 했죠.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영화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고”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클리블랜드 그 자체인 시끌벅적한 정신이 각본에 담겨 있었어요. ‘신경 안 써. 잃을 게 뭐야’ 같은 거죠.” 조 루소의 말이다.루소 형제는 기본적인 오해로 갖고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 만들기가 저렴하고 쉬울 것이란 생각이었다. 둘은 카메라 한 대와 기타 촬영용품을 외상으로 구입했다. 몇 년에 걸쳐도 갚지 못할 빚이었다. 절약하면서 촬영을 했는데도 돈이 빠르게 바닥났다. 조는 그때를 회상하며 “돈이 없어서 필름을 6개월 동안 현상하지 못했어요. 차고 냉장고 안에 필름을 보관했는데, 만약 정전이라도 됐다면 영화 전체를 날렸을 거예요”라고 말했다.“평판 필름 편집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던 즈음이었어요. 사촌의 밴을 빌려 뉴욕에 가서 200달러쯤 주고 구식 필름 편집기인 스틴벡을 한 대 구했죠. 무게가 수백 파운드나 되는 거대한 구식 기계였어요.”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 “3층 계단을 올라 제 방에 들여놨어요. 방 이곳저곳에 필름을 널어둔 채 2년 동안 살았어요. 필름 냄새는 아주 독특해요. 밤에 자러 갈 때도 그 냄새가 날 정도였죠.” 조 루소의 말이다.가진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서 형제는 영화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영화 학교에 입학하면 학생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영화 촬영용 장비를 무료로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미처 완성하지 못한 영화를 얼른 끝내버리자’가 1993~1994년의 유일한 목표였다.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던 앤서니 루소는 컬럼비아 대학교로, 빅 텐을 다녔던 조 루소는 UCLA대학교로 갔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협력 작업을 하며 1996년 첫 번째 장편 영화 를 완성했다. 루소 형제는 를 ‘떠들썩한 고향의 영화’라고 표현한다. 당시 이 영화는 공개되지 않았다.는 이듬해인1997년 슬램댄스 영화제에 출품됐고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지만,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남은 관객은 단 2~3명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었다. “그가 거기에 왔는지도 몰랐어요. 그는 슬쩍 왔다가 슬쩍 가버렸다고 나중에 연락이 왔죠.”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스티븐 소더버그는 를 본 소감에 대해서 묻자 “그 영화를 봤을 때 엄청난 양의 에너지, 상상력, 자신감을 느꼈어요.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저는 루소 형제의 팬으로 시작한 관계라 볼 수 있죠”라고 답변했다.“우리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쿠바 음식점 베르사유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스티븐 소더버그는 저희 영화를 맘에 들어 했고, 다음 영화를 만들 때 돕고 싶다고도 얘기했어요. 우리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란 걸 빠르게 알아챘죠.”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고 시네마테크에서 자랐죠. 그래서 우리는 ‘주제가 내러티브보다 중요하고 정신없는 기법이 기존의 기법보다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아트하우스의 관점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어요. 스티븐 소더버그는 그런 점에서 신과 같았죠. 그는 을 만들었고 기본적으로 업계에 중지를 날리는 위치였어요. 그는 이처럼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이렇게 말했죠. ‘별로야, 왜냐하면 이후에 만든 과 그 외 모든 영화는 돈이 되지 않았거든.’ 그는 이어서 ‘이건 쇼 비즈니스야. 사람들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게 할 방법을 모른다면 영화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라는 충고도 해줬죠.”스티븐 소더버그가 루소 형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한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98년 이란 영화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은 감독이 됐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를 ‘쇼 비즈니스’라고 했을 때만 해도 형과 저는 의아했습니다. 그 만남이 있고 1년 반 뒤에 을 보고 나자 그의 말이 단번에 이해됐습니다. 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최고 영화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 형과 함께 ‘지금까지의 가식적인 스토리텔링을 그만두고 보다 대중적인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궁리하자’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 루소의 말이다.스티븐 소더버그는 루소 형제의 멘토였고, 학교를 떠나 영화감독이 됐다는 점에서 롤모델이었다. 그들은 조지 클루니, 윌리엄 메이시, 샘 록웰 등 최고 배우를 기용한 의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루소 형제가 마블로 향하기 전에 내놓은 두 편의 영화 중 첫 번째 것이었다. 이어서 두 번째 작품은 2006년 오웬 윌슨, 케이트 허드슨, 맷 딜런이 출연한 코미디 영화 였다. 소기의 성과는 냈으나 소위 말하는 흥행 대박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루소 형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게 된 또 하나의 수단이었다. 사실 루소 형제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 제작자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영화에서 왔지만 감수성은 텔레비전에서 왔다. 어린 시절 바보상자 앞에 앉아서 등 좋아하던 옛 시트콤의 언어를 흡수했다.이러한 경험은 2002년에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가 흥행에 실패한 뒤 루소 형제는 한동안 출발점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드라마 가 득세하던 때였다. 9?11의 여파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무너진 모든 것이 새로운 패턴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는 사실 드라마라기보다는 영화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주제뿐만 아니라 텍스처도 중요했다. 경쟁력을 유지하길 원했던 TV 네트워크는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기 위해 영화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틴 스콜세지급을 모셔올 만큼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디 영화 신에서 찾았다. 당시 루소 형제는 실패작 하나와 미개봉작 하나뿐인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찾는 수요가 많았다.“FX에서 방영한 의 에피소드 하나를 맡아서 핸드 헬드 카메라 한 대로 찍었어요. 우린 그 에피소드를 아주 신랄하게 만들었죠. 파일럿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존 콜벳이 전처의 부모에게 전처를 위한 돈을 건네줄 때 흐느끼게 만들었죠. 그가 말리지 않아서 전처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어요. 당시 텔레비전에 그런 내용은 많지 않았죠. 그게 를 구상 중이던 론 하워드의 주목을 끌었어요. 그는 미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젊고 맹렬한 인디 영화 제작자를 찾고 있었거든요.” 조 루소의 말이다. 괴상한 가족을 다룬 는 를 작업했던 시트콤계의 베테랑인 미첼 허위츠가 제작했다. 그는 “파일럿의 개요를 잡아서 아주 유망한 TV 감독들에게 보냈지만 아무도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루소 형제는 바로 이해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파일럿은 너무 크고 거칠다고 해요. 하지만 루소 형제는 파일럿을 줄이기를 원치 않았죠.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가고 싶어 했고 오히려 더 크게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들은 ‘네트워크 쪽 사람들이 당신을 겁주게 놔두지 마세요. 우린 이걸 할 수 있어요’라고 얘기했습니다”라고 말했다.당시 드라마 제작 총괄이었던 하워드는 루소 형제에게서 시트콤에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을 봤다. 앤서니 루소는 “파일럿 하나에서 30개의 로케이션을 원하던 게 하워드였죠. 당신이 이 바닥을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냥 말할게요. 그건 정말 미친 짓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1990년대를 주름잡은 같은 시트콤도 에피소드당 5개의 로케이션이 일반적이었다.조 루소는 형에 이어서 “하루에 로케이션을 하나 바꾸는 게 기존 프로덕션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죠. 하지만 우린 못한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가 세운 새로운 규칙을 존중해준다면 하겠다’고 했어요. 필름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필름으로 찍지 않고 앞으로는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겠다고 했죠. 당시만 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라고 말했다.“폭스는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은 ‘싸구려 다큐멘터리처럼 보일 텐데’라고 걱정하기도 했죠. 그때 우리는 ‘우린 이 드라마가 정확히 싸구려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길 원해’라고 말했어요.”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루소 형제가 감독한 파일럿(??)은 네트워크 쪽 사람들을 분열시켰다. 고참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파일럿을 싫어했다. 빠르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했으며 ‘싸구려 다큐멘터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방영하자고 주장했다.는 2003년부터 3년간 세 시즌을 방영했고 루소 형제는 다수의 에피소드를 감독했다. 루소 형제의 여러 초기 프로젝트처럼 이 시리즈는 상업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형제는 에미상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다가올 텔레비전 시리즈 전성기에 일종의 프리패스가 됐다. 또한 의 촬영은 텔레비전 기법의 집중훈련과도 같았다. 텔레비전 기법은 영화 제작 기법과 비교할 때 테니스와 줄다리기만큼이나 아예 다른 분야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영화는 감독이 모든 디테일을 통제하는 반면에, 텔레비전 시리즈는 상호 간의 협업을 강조하며 작업과 크레디트를 공유하고 한 집단의 비전을 구현하는 작업이다. 바로 마블 스튜디오에 합류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상적인 방식이었다. “우린 텔레비전 시리즈에 영원히 머무를 수도 있었어요. TV를 좋아하고 TV를 보며 성장했으니까요.” 루소 형제의 말이다.마블을 향한 그들의 도약대는 또 다른 텔레비전 시리즈인 로, 제작자 댄 하먼의 인생 경험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그는 위스콘신에서 자라나 캘리포니아의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루소 형제는 미국 중서부의 정체성을 지닌 채 연고도 없는 곳에서 보낸 몇 개월이라는 소재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에 합류를 결정했다. 는 2009년에 NBC에서 첫 방영된 후 6년간 이어졌다. 루소 형제는 첫 세 시즌 동안 프로듀서로 일했고 다수의 에피소드를 감독했다. 이 드라마는 시즌 1의 막바지로 향하던 한 패러디 에피소드에서 그 기반을 확립했다. 학교 전체에서 벌어진 페인트볼 전투는 마치 오우삼의 액션 영화처럼 촬영했다. 시간이 갈수록 는 이런 종류의 패러디에 몰두했다. 전쟁 영화나 감옥 영화, 세기말 분위기를 자아내는 같은 영화까지 모든 고전 영화 장르를 실험했다.앤서리 루소는 당시를 회상하며 “페인트볼 에피소드는 우리가 보고 자랐던 액션 영화의 패러디였죠. 마니아 팬층에게는 크게 성공적이었어요. 그래서 시즌 2의 마지막에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세르지오 레오네를 바탕으로 한 번 더 시도했죠. 제목은 ‘페인트볼의 무법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인 케빈 파이기는 당시 를 보고 루소 형제에게 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케빈 파이기는 한 인터뷰에서 “루소 형제는 코미디를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인 동시에 액션이 뭔지도 아는 감독이다. 언젠가 꼭 마블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다”라고 말한 것은 영화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루소 형제의 성장기로 돌아가보면, 마블 코믹스는 수줍은 아이들, 헤비메탈광, 왕따들의 가장 이상하고 괴짜스러운 모습에 호소했다. DC 코믹스의 슈퍼맨은 깔끔하고 잘생기고, 사회에 잘 적응했으며, 누구도 그를 공격하지 않고, 결점 하나 없었다. 그에 비해 스탠 리와 잭 커비의 마블이 창조한 헐크는 뒤틀리고 분노로 가득한 과학자다.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4는 전부 괴상하고 결함투성이의 인물이다. 따라서 마블의 캐릭터들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한창일 때 뒷전에 머물렀다. 1978년의 과 그 후속편, 1989년의 과 그 자손들을 생각해보면 답은 뻔하다. 하지만 미국 문화가 점차 21세기로 이동하면서 마블은 힘을 얻게 되었다. 비주류로 보였던 캐릭터들이 최종 단계로 진입 중인 어떤 사회의 핵심적인 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이러한 히어로의 세계, 즉 마블의 지적재산이 지닌 숨겨진 가치가 갑자기 빛을 발했다. 2007년 마블 스튜디오 대표가 된 케빈 파이기는 이를 조각 내서 팔아치우는 대신 연결된 영화 목록을 만드는 사내 프로젝트를 구축하기로 결심한다.그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이고, 이 영화는 후속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은 잘난 척하는 주인공과 코미디의 매력이 잘 어우러진 액션 영화다. 그 결과 이후 등장한 인피니티 사가의 22편의 영화들은 할리우드 역사상 오직 조지 루카스의 만이 겨룰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 됐다. 의 존 파브로 감독을 시작으로 쉐인 블랙, 루이 르테리에, 케네스 브래너, 앨런 테일러, 타이카 와이티티, 조스 웨던, 제임스 건 등 많은 영화감독이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를 만들었다. 케빈 파이기는 를 감독할 사람을 찾을 때 특수효과와 코미디, 그리고 스타를 잘 다룰 수 있고 전통을 소중하게 유지하면서도 새로움을 가미할 수 있는 일꾼을 원했다. 다시 말해 케빈 파이기는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결국은 루소 형제를 찾고 있었다.“하루는 우리 에이전트가 전화를 해서 ‘마블이 10명의 감독 후보 리스트를 짰고 그중에 루소 형제의 이름이 있다”고 말했죠.”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여기서 마블 스튜디오가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 루소 형제는 평생 마블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숨겨진 마블 덕후였다.“우리는 만화책을 모으며 자랐죠. 아직도 컬렉션을 갖고 있는데 전부 마블이에요. 물론 형은 판타지도 좋아해서 을 성격책처럼 끼고 다니긴 했습니다.” 조 루소의 말이다.캡틴 아메리카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미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캡틴 아메리카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존 캐릭터를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은 도전을 즐기는 루소 형제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안전하게 가는 것을 거부하고 캡틴 아메리카를 재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그 캐릭터를 과격하게 재창조하려고 했어요. 어린 시절 를 읽으며 매우 지루했거든요. 결점이 없이 완벽한 캐릭터는 확실히 어려워요. 하나의 이야기는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힘이 빠져버리죠. 그래서 우린 이렇게 말했죠. ‘자, 그는 얼음 속에 갇혀 있었지. 그는 현대에 깨어나게 될 거야. 우리는 그걸 일종의 리셋으로 쓸 수 있을 거 같아. 우린 분위기와 캐릭터를 리셋할 수 있어. 우리가 감정적인 복잡함을 만들어낼 수 있어.’”“우리가 어떻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캡틴 아메리카를 뒤집고 재창조했을까요?” 앤서니 루소가 말했다. “캡틴 아메리카는 깃발을 몸에 두른 멈출 줄 모르는 남자예요.” 조의 말이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이해가 쉬운 캐릭터죠. 우리는 그걸 해체하는 데 흥미를 가졌죠.”“우리는 를 과 연결시키려 했어요.” 조 루소는 CIA가 자기 요원을 죽이려 하는 내용을 다룬 시드니 폴락의 1975년 작을 언급하며 말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든 가치, 즉 명예, 정직, 신실함을 지닌 한 남자가 현대의 미국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캐릭터는 여전히 고결한데 세상은 엉망으로 변했다? 그것이 바로 루소 형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였던 거죠.”“우린 소더버그에게 연락해서 물어봤죠. 파이기에게 연락해서 우리를 보증해줄 수 있어요? 소더버그가 말하길 ‘왜 만화책 원작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그래서 저는 ‘스티븐, 아직 난 만화책 컬렉션을 갖고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조 루소의 말이다.“난 이메일로 기억해요. 난 조에게 먼저 그와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들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원하기 때문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조의 전화를 받았고 그는 자신의 만화책 컬렉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좋아, 좋아, 좋아’라고 말한 뒤 결정했죠.” 스티븐 소더버그의 말이다.“어릴 때 영향을 주었던 이야기는 마음속 특별한 곳에 영원히 자리를 잡죠. 그건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지닌 의미에도 맞는 말이에요. 그 이야기 속에는 주제를 녹여낼 수 있고 광범위한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신화가 존재해요. 우린 이야기꾼으로서 정신 나간 경험을 이어왔죠. 우린 온갖 이상한 것을 해봤어요. 완전히 엉망이었던 를 만들었고, 괴상한 코미디인 를 만들었어요. 본질적으로 부조리극인 도 만들었고요. 우리는 도 했어요. 그건 부조리극이자 해체극이었어요. 이제는 뭔가 대중적인 걸 시도하고 싶었죠.” 조 루소의 말이다.많은 감독에게 연속으로 두 편의 마블 영화를 찍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작업은 힘든 것으로 유명하다. 대형 스케일의 제작 과정, A급 배우 군단과의 관계, 거대한 촬영 세트와 로케이션 등 챙겨야 할 것이 많은 것은 물론, 한 편 편집하는 데만 거의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루소 형제는 연달아 찍은 마블 영화 중 와 을 올해 안에 모두 마쳤다.이는 루 게릭에 비견할 만한 성과다. 조 루소는 마블의 마지막 두 편을 연달아 찍느라 애틀랜타로 이사했고 앤서니 루소는 집에서 오갔다. 각자 드물게 얻은 남은 시간에만 아이들을 돌봤고, 일이 너무 많아서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교대로 업무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단순한 마블 영화가 아니었다. 이건 어벤져스였기 때문에 마블 세계관 속의 모든 캐릭터와 뒷이야기를 담아야만 했다. 그건 또한 루소 형제가 고작 2~3명 정도가 아니라 두 다스가 넘는 A급 영화 스타를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마지막 두 편은 마블의 노력 전체의 머릿돌과도 같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모든 마블 대본은 암호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의 대본은 뭐였게요?” 그가 웃으며 질문했다. “라스푸틴, 아주 길한??? 이름은 아니죠. 와 은 체조 선수 메리 루 레튼의 이름을 따서 각각 ‘메리 루’와 ‘메리 루 2’로 불렀어요. 완벽하게 착지해야만 마블 인피니티 사가 24편의 연결 고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습니다. 착지를 못했다면요? 그러면 그동안 쌓아온 세계관 전체를 망쳤겠죠.” 는 마블 인피니티 사가 주요 히어로들의 절반이 죽으며 끝난다. 당신은 이를 카포네처럼 세어볼 수 있다. 블랙 팬서 사망. 스파이더맨 사망. 닥터 스트레인지, 팰컨, 스타로드 사망, 사망, 사망. 그리고 여느 죽음과는 다르게 그들은 창세기처럼 먼지로 돌아갔다.“헐크를 연기한 마크 러팔로는 16살짜리 아들,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뉴욕의 어느 극장에 있었죠. 그리고 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반응을 촬영했어요.” 조 루소가 말했다. “마크는 모자와 안경을 쓰고 숨어 있었죠. 그가 내게 그 비디오를 보내줬어요. 그는 극장 주변을 돌아다녔고 영화가 끝나고 넉넉히 5분이 지난 뒤였어요. 사람들은 입씨름 중이었고 어떤 친구는 셔츠를 찢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죠. 왜?”“당신은 이 영화 속에서 세상의 운명을 만나게 되죠.” 앤서니 루소의 말이다. “당신은 무거운 문제를 대면해요. 하지만 그건 판타지의 영역이에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방식으로 문제와 마주치는 것이죠. 그래서 난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가장 괴상한 우려와 걱정과 긴장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지만 진짜 공포와 긴장과는 한 발짝 떨어진 방식으로 느끼게 되죠. 그건 이러한 감정을 처리하는 보다 안전한 방법이에요.”“우리는 진심으로 해체주의자예요.” 조의 말이다. “우리는 뜯어내는 걸 좋아해요. 우리는 이야기의 일부를 해체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마블에 합류했어요. 이야기를 만들고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거죠. 는 기반 설정을 해체했어요. 여기 쉴드라는 조직이 있어요. 지금까지 좋은 친구들이었죠. 우리는 이들을 나쁜 놈으로 만들었어요. 에서 우리는 어벤져스를 해체했죠. 우리는 가족 같은 이들을 모았다가 흩어버렸어요. 에서 우리는 캐릭터의 절반을 모은 뒤 죽여버렸어요.”그들의 첫 번째 원칙을 떠올리자. ‘지루해지지 말자!’“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들이 입소문 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사람들이 화제로 삼지 않는다면 성공적이지 않은 거죠.” 조 루소의 말이다.새로운 영화인 은 의 마지막 질문의 답이 될 것이다. 슈퍼히어로도 죽을 수 있나? 영화 스튜디오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결말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벌이를 희생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일종의 깜짝쇼로 그들이 부활하게 될까? 촬영장에서 보안이 최우선이었다. 스포일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배우조차 깜깜한 상태를 유지했고, 엄격하게 필요할 때 필요한 것만 알려주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가끔 루소 형제는 가짜 장면을 만들어서 주위에 뿌리는 등 거짓 정보를 흘렸다. “내 트레일러에 아무것도 남겨두려 하지 않았죠. 대본을 찢어서 잘게 잘랐어요. 그들이 가짜 대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유출 경로를 역으로 탐지했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말이다.물론 더 큰 수수께끼이자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다. 이 의 20억 달러가 넘는 수익과 맞먹거나 넘는다면, 아직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 있지 않은 감독들은 조지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과 함께 판테온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루소 형제의 상황은 다르다. 카메론과 루카스가 각자 자신만의 세계와 그들 고유의 지적재산을 창조한 반면 루소 형제는 그저 다른 이가 창조한 세계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을 뿐이다. 는 미첼 허위츠가 창조했다. 커뮤니티는 댄 하먼이 만들었다. 마블 유니버스는 스탠 리와 잭 커비가 대부분을 만들었다. 아그보에서, 루소 형제는 바닥에서부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그들이 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아그보는 소재가 주가 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이를 온갖 적절한 방법으로 배포할 것이다. 어떤 것은 극장, 어떤 것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루소 형제는 그곳에서 자기만의 영화를 만드는 한편 젊은 작가와 감독을 지원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이용할 것이다. 아그보의 첫 번째 작품 중 하나인 는 납치된 아들을 찾는 인도의 범죄 조직 두목에 관한 이야기로, 루소 형제의 마블 영화 세 편에서 스턴트 코디네이터를 맡았던 샘 하그레이브가 감독을 맡고 있다. “아그보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소더버그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것으로, 세상에 진 빚을 돌려준다는 것이죠.” 조 루소의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앤서니와 내가 작가의 소유권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프로젝트에 완전히 창조적인 컨트롤을 하는 데 집중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 프로젝트에 돈을 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아티스트가 운영하고 수익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독립 스튜디오를 만드는 꿈은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nited Artists)예요.” 조 루소가 말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100년 전에 아그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D.W.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 스, 찰리 채플린이 설립한 스튜디오다. 하지만 그건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카첸버그, 데이비드 게펜이 드림웍스(Dreamworks)에서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아니면 실패로 끝난 제리 와인트라웁의 와인트라웁 엔터테인먼트? 그건 거의 달성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에 대형 영화 제작사는 너무 강력했고 배급에 있어서도 대형 제작사 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독립 스튜디오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영화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대부분을 만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도 1980년대가 되자 빈껍데기만 남게 되었다.하지만 루소 형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등 온갖 신기술이 거대한 조직(Monolith)을 해체시키고 있다. 다들 릴을 돌리는 동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가 왔다.조 루소에게 아그보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독립 스튜디오의 역사가 실패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회는 전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6년 반 동안 4편의 마블 영화를 만들었고 수십 억 달러를 벌어들였죠.” 그는 말했다. “이건 영화 제작자에게 특이한 환경이에요.”“그리고 중국의 영화 산업이 국외로 확장을 모색하던 시기와 우연히 맞물렸죠.” 앤서니가 덧붙였다. “우리 영화는 중국에서 반응이 아주 좋아요. 결국 제대로 된 인물, 그러니까 중국의 가장 큰 영화사에 속하는 화이 브러더스와 연결됐죠. 그들은 우리의 비전에 투자하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회사에 대한 완전한 창조적 통제력을 갖고 있죠. 이렇게 말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이봐, 우리는 다르게 해볼 거야. 우리는 할리우드 시스템 밖으로 나갈 거라고. 우리는 물건을 마구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야.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것에 아주 특화될 거야.’”넷플릭스, 아마존, 훌루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폭발적 성장은 초기 독립 영화사들을 괴롭혔던 배급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그보는 콘텐츠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기업에 맡기면 된다. 아그보는 첫 4편의 작품을 곧 공개할 예정이다. 그중 아랍 지역에서 전부 촬영한 은 아그보의 스토리 부문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각본 및 제작 파트너 크리스토퍼 마커스와 스티븐 맥필리가 제작했다. 이 둘은 루소 형제가 만든 4편의 마블 영화를 비롯해 총 6편의 마블 영화 각본을 썼다. 맥필리는 이 영화를 중동판 으로 홍보해서 조를 납득시켰다. 루소 형제 본인들은 를 감독할 예정이다. 이 영화는 니코 워커 소설 원작으로 이라크에서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육군 위생병이 은행 강도가 되는 이야기이다. “루소 형제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담을 비전을 갖고 있어요. 그들은 새로운 목소리를 많이 가져오고 자신들에게 온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죠.” 스티븐 맥필리의 말이다.이제 밤이 됐다. 하늘은 파란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루소 형제는 듀엘로에 모여 있다. 듀엘로는 현지 산물에 집중한다. 조 루소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에 있는 학교에 딸을 데려다주다가 우연히 어느 바에 들렀다. 칵테일이 마음에 들었고 그걸 만든 믹솔로지스트 야인 맥퍼슨을 알게 됐다. 조는 그를 고용해 LA에서 칵테일을 만들게 했다. 조는 이곳의 시그너처 칵테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마블의 속편 같은 ‘뉴 오더’라는 이름이 붙은 이 칵테일은 음료라기보다는 특수효과처럼 등장한다. 즉 슈퍼히어로 장르의 스릴과 단점에 관한 적절한 은유로 기능하는 칵테일인 뉴 오더는 손님 앞에서 연기를 채운 잔에 준비된다. 연기는 물결치며 변화한다. 덮개를 치우면 연기가 사라지고 마가리타 같은 것이 드러나는데 스모키한 맛의 메스칼(멕시코 화주)과 시트러스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조가 말했다. “맛의 조화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조는 아그보를 지은 것과 같은 이유로 듀엘로를 열었다. 그는 친구들과 모일 장소를 원했다. 원래 아티스트가 된다는 건, 어떤 종류의 아티스트든지 간에, 심지어 두 다스의 영화 스타와 군대 규모의 수하 직원에게 둘러싸인 사람에게도 외로운 일이다. 루소 형제는 어린 시절의 따뜻함을 재현하고 그러한 외로움을 해소할 모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일은 메스칼이고 가족은 연기다. 연기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따뜻함은 남을 것이다.조 루소에게 형을 빼고 식당을 연 이유를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대학 시절을 빼면 그들은 모든 걸 함께 했다. 조는 형을 바라보았다. 앤서니는 어깨를 으쓱하고 조를 쳐다봤다. 사실은 형제 간에도 서로를 따라가지 않는 일이 있다.루소 형제와 함께 앉아 있으면, 당신은 두 명의 평범한 친구들, 분명히 똑똑하지만 내부의 성스러운 구역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감지 장치와 경보 장치를 어떻게든 통과해온 순수한 중서부의 캐릭터를 느끼게 된다. ”우린 클리블랜드에서 온 두 명의 자급자족적 인물이죠.” 조가 반복해서 말했다. “몇 년 동안 클리블랜드는 미국의 농담거리였죠.” 앤서니가 덧붙였다. “자니 카슨은 매일 밤 우리를 놀렸어요. 시장의 머리에 불이 붙고 강물에도 불이 붙는다고 말이죠.(역주: 1972년 미국 금속 박람회 개막식에서 티타늄으로 만든 리본을 용접 토치로 절단하다가 당시 클리블랜드 시장인 랠프 퍼크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사건과 , 1969년에 쿠야호의 기름 유출로 강에 화재가 발생한 사건을 말하는 것) 그래서 당신은 열등감을 키우게 되죠. 당신의 정체성은 모욕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 속에는 자유도 있죠. 이미 바닥에 있으니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바닥에 머무르든지, 아니면 기어오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