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3인의 여행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어떤 여행자는 시장에 간다. 어떤 여행자는 반드시 사원을 방문하고, 또 어떤 여행자는 공원을, 도서관을, 재즈 클럽을 찾는다. 세계 어느 도시에 당도하건 간에. 각 여행지의 필수 방문지가 있다면 각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도 있는 법. 여행이라면 이골이 난 세 명의 필자가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만의 여행을 썼다.



새 벽 거 리


새벽 거리를 걷는 일, 또는 여행을 ‘떠나는’ 일
최갑수(시인, 여행 작가)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여행을 자주 한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많게는 세 번도 한다. 여행을 ‘간다’라고 하지 않고 ‘한다’라고 표현한 건 일로 여행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이 여행 작가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행을 가서 콘텐츠를 만들어 와야 하기 때문에 여행을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은 ‘한다’라는 동사와 함께 써야 하니까.
가끔, 아니 거의 매번, 나는 여행을 ‘하러’ 가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탁발 행렬을 보며, 몰디브의 눈부신 해변을 걸으며, 프라하 카를교의 재즈 버스킹을 보며 여행을 ‘가고(떠나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휩싸이곤 했다.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내려놓고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신발을 구겨 신고 느릿느릿 골목을 걷고 싶었다.
20년 가까이 여행 작가로 살아오며 나는 누구보다 여행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탄성이 나오는 장관 앞에서 노출을 재며 사진을 찍었고,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북적이는 관광객들을 걷어내기 위해 애썼다. 숨 돌릴 틈이 생길라 치면 현지인이나 여행자를 인터뷰했으며, 내가 묵지도 않는 5성급 호텔에서 호텔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가며 인스펙션을 했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도 취재 수첩에 음식 이름과 맛을 메모하기에 바빴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시차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잡지와 신문에 보낼 원고를 마감하고자 자판을 두드렸다. 여행지에서 여행지로 이동하는 버스와 기차 칸에서 쪽잠을 자며 여행을 했다.
여행이 하기 싫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회사원이 회사에 가기 싫은 것과 같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여행 작가는 여행을 하기 싫어한다. 그러다 몇 해 전 여행이 지긋지긋해진 내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카메라를 몽땅 도둑맞은 것이다. 잠에서 깨어보니 카메라 두 대와 렌즈 네 개, 스트로브가 담긴 가방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이른 시간, 부다페스트 중앙역에 내린 나는 사막에 불시착한 펭귄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침의 역내에는 ‘글루미 선데이’의 우울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트렁크를 끌고 호텔로 가면서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낙천적이지 않고서는 여행 작가로 살아가기 힘들다. ‘각자의 인생에는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난다’, ‘오늘이 나쁘다고 내일까지 나쁘란 법은 없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 비관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낙관이다’…. 여행을 하며 가슴 깊이 새긴 문장은 이런 것들이다. 길을 잘못 들어도, 호텔이 엉망이어도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며 견뎌야 하는 게 여행 작가의 마음가짐이다. 어떤 상황에도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아무튼 부다페스트에서 나는 여행 작가가 된 지 17년 만에 아주 가벼운 여행자의 몸이 되었다. 호텔에 트렁크를 던져놓은 뒤 집업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거리로 나섰다. 비상용으로 가져온 소니 똑딱이 카메라 하나만 손목에 달랑거리면서 말이다. 호텔 밖을 나서자 분명하고 새로운 여행이 시작됐다. 거리에는 지금까지 내가 여행지에서 맡았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감촉의 공기가 떠다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부다페스트의 새벽 공기가 내 폐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신선하고 자유로웠으며 경쾌하고 강렬했다. 조금 유치한 표현이지만 ‘아, 이게 여행의 향기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두 시간 전 1500만원어치 장비를 도둑맞았다는 생각 따위는 1그램도 들지 않았다.
새벽 거리를 걸었다. 주먹만 한 돌이 깔린 길바닥은 깊고 어두운 색으로 반질거렸다. 보도 위를 서성이던 비둘기들은 여행자를 위해 기꺼이 몸을 비켜주었다. 거리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돌 향기가 났다. 갑자기 이런 여행의 순간을 맞게 될 줄이야. 나는 아무런 감정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거리를 걸으며 모든 것을 즐겼다. 햇살은 바닥에서 벽을 물들이며 점점 차 오르고 있었고 거리는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황금빛 너머에서 사람들이 걸어왔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이었다. 어깨를 움츠린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누구 하나 이방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트램은 댕강댕강 종을 울리며 느리게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갔고 말을 탄 동상의 주인공은 동이 터오는 먼 하늘을 향해 창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잎을 떨어트린 가로수들은 쓸쓸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자전거 한 대가 그 가로수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개를 끌고 산책하는 노인은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거리의 겨울이 궁금해졌다. 노인이 사라지자 어디에선가 세탁 비누 향이 풍겨왔다. 샴푸 냄새일 수도 있다. 아마 지금 이 도시 사람 중 적어도 3분의 1은 머리를 감거나 칫솔질을 하거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겠지. 도시는 부스스한 표정의 피곤한 얼굴로 깨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풍경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멀리 성당의 종소리가 날아와 내 발치에 떨어졌다. 아주 친밀한 광경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부다페스트의 아침 풍경들. ⓒ최갑수

다시 한번 모퉁이를 돌자 조그마한 카페가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몇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앞에 두고 신문을 읽는 중년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흔히 만나는 직장인 얼굴과 똑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았고 집게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쥐는 시늉을 한 뒤 입으로 가져가며 “에스프레소 더블”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주인은 왼쪽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똑딱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카페를 나와 호텔로 돌아가면서도 사진 두세 컷을 찍었다.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빛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었고 그 빛은 벽과 길과 사람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나는 그 빛이 상하지 않도록, 가늘고 부드러운 붓으로 조각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부다페스트의 새벽 이후 여행을 하러 갈 때마다 나는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새벽 거리로 나선다. 프라하, 리스본, 더반, 쿠스코, 이스탄불, 도쿄에서 새벽 거리를 걸었다. 소매치기며 강도며 나쁜 놈들은 모두가 곯아떨어져 있을 시간이었다. 관광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안심했고, 새벽 거리를 걸을 수 있어 안도했다. 거리의 빛은 셔터를 누르기에 충분했고, 각자의 아침에 골몰한 현지인들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 여유로웠다.
나는 새벽 거리를 렌즈에 담았다. 새벽 6시의 거리는 오전 10시의 거리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빈자리가 드문드문 있는, 현지인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는 카페는 비로소 카페 같았다. 여행을 하러 와서 나는 새벽마다 여행을 ‘갔다’. 새벽 거리를 걷는 것은 여행을 ‘하러’ 온 내가 잠시 여행을 ‘떠나는’ 방법이다.





뷰 포 인 트


때로는 볼품없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이유
허태우(피치바이피치 발행인, 전 〈론리플래닛〉 편집장)

두바이 부르즈칼리파에서 내려다 본 경관. ⓒ허태우

두바이 부르즈칼리파에서 내려다 본 경관. ⓒ허태우


스위스 몽트뢰. ⓒ허태우

스위스 몽트뢰. ⓒ허태우

퓨니큘러에서 내리자 저녁 어스름을 침범한 안개비가 슬그머니 외투를 적신다.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라고 명명된 장소에는 인적이 드물다. 재킷 깃을 잔뜩 올린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몇 명의 남자뿐. 축축하고 처량하기도 하지. 나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배양하듯 품고 두리번대며 전망을 찾는다. 검은 하늘은 원근감과 방향 감각을 불구로 만들고, 물안개에 뒤덮인 카스피해가 무슨 풍경을 만들 일은 만무하지만 말이다. 이 지경에도 버릇을 좀처럼 버릴 수 없다. 조망하기 좋은 곳을 찾는 버릇. 에둘러 말해 그렇다는 것이다. 한때의 직업에 기인한 이 버릇은 내려다보는 풍경을 끊임없이 탐색하도록 추킨다. 어차피 이런 날에는 낮은 혈압처럼 불분명한 장면만 드러날 터이지만 나는 거리낌없이 하이랜드 파크에 와버렸다. 습기에 젖은 렌즈를 몇 번씩 닦고 뷰파인더에 눈을 맞춘다. 카메라의 ISO를 최대치로 올리고 희미한 해안선을 따라 뭉쳐진 검은 풍경을 몇 컷 찍는다. 2014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의 야경은 그저 그랬다. 안개비가 내렸고, 인적은 드물었고, 눈앞은 캄캄했다. 여행 기사 사진으로는 쓸모없음에 가까웠다. 또 하나의 풍경을 리스트에 넣었다고, 애써 만족하며 공원을 빠져나왔다.
올라가면 보이는지, 올라가야 보이는지. 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의식처럼 조망지(眺望地)를 찾는다. 거리에서 언덕에서 섬과 산맥에서, 낮은 자리와 높은 지점에서. 거창하게 말해 조망지는 장소성을 총체적으로 함의한다. 이른 아침 숙소의 커튼을 걷을 때 등장하는 우연의 장면까지도 물론 거기에 포함된다. 스멀스멀 몰려오는 낮은 구름과 붉은 태양이든지, 밤사이 눈이 내려앉은 소도시의 새하얀 결이든지. 풍경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곳의 역사가 직조한 생김새를 잃고, 충돌과 변화를 감지한다. 수백 년간 전쟁에 시달린 요충지의 지정학적 특성, 구시가의 어지러움과 신시가의 반듯함, 근대화에 따른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변천 등. 이성과 감성이 뽑아낸 도출물이 그 풍경 안에 숨 쉬고 있다. 가이드북이나 참고서가 온전히 담기 어려운, 살아 있는 인포그래픽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까. 조망지에 올라 바라보면서 나는 그곳에 한발 더 다가간다.
지대가 높고 사방이 트인 곳. 이건 자연적 조망지의 전제 조건이다. 이때 고도는 상대적이다. 이를테면 알프스산맥은 해발 2000m 후반부터, 히말라야산맥은 3000m부터 걸출한 시야를 선사한다. 수평의 세계는 조망의 고도가 낮다. 캐나다 내륙 서스캐처원의 프레리 한복판에서는 1000m 정도만 올라가도 지평선 끝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들 조망지에 올라서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읽게 된다. 스위스 알프스의 쉴트호른, 고르너그라트, 필라투스 등의 지명은 그 자체가 전망대와 다름없고, 19세기부터 형성된 유럽 상류층 관광의 증거 자료다. 히말라야의 주요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EBC, ABC 트레일 등은 수일간 조망의 정점으로 치닫는 과정이자 자연을 신처럼 섬기는 토착 문화에 접근하는 통로 같고. 캐나다의 대평원에는 신대륙 이주자에게 적용된 국가 정책의 단면을 그대로 새겨놓았다. 당시에 배당된 토지의 구획선이 바둑판처럼 펼쳐지니까.
배산임수는 조망지의 전형적인 요건이다. 특히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탐색할 때마다 배산으로 향하면 어렵지 않게 멋진 조망과 마주친다. 그런 장소에는 으레 값진 문화 유적이 들어서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 리옹이나 이탈리아 타오르미나(Taormina)의 고대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처럼 말이다. 한편 가파른 절벽을 낀 반도나 섬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점에서 조망이 완성된다. 십수 미터 높이에 서더라도, 짙푸르게 반짝이는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등성이 물결친다. 나의 기억엔 그런 장면이 새겨 있다. 아일랜드 서쪽 끝 딩글반도(Dingle Bando)의 해안 절벽에서 목격한 대서양과 삶의 터전 간의 충돌은 고독하기 그지없었다. 주민이 모두 떠나가버린 블래스켓섬(Blasket Islands)의 자태 때문이다. 고유의 방언을 구사하던 그곳의 주민은 1953년 국가 정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모두 이주해버렸다. 텅 빈 집들과 양 떼만 남긴 채. 이와는 달리 호주 남서부의 셀릭스 해변(Sellicks Beach)을 떠올릴 때면, 풍경은 화창하고 기쁜 순간만 소지한 것 같다. 태양광이 충만하기 이를 데 없는 대기의 빛깔과 눈부시고 푸르고 손에 잡힐 듯한 모래사장이 선명하게 재생된다. 오후의 해변에서 연극처럼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때로는 하늘로 솟구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충실히 재현한 고층 빌딩이나 타워도 훌륭한 선택지다. 건축물의 전망대는 장소에 어울리는 적절한 높이를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에펠탑은 몽파르나스 타워보다 한결 로맨틱한 파리의 풍경을 보장하며, 근대 계획도시인 파리의 실체는 개선문에 올라가 확인하는 방법이 직설적이다.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무심한 전망대가 지역을 대변하기도 한다. 스위스 취리히 웨스트의 프라이탁 매장 옥상처럼. 이곳의 조감은 프라우 게롤즈 가르텐(Frau Gerolds Garten)의 불규칙한 생김새와 현지인의 오밀조밀한 움직임, 취리히 웨스트의 자유로운 생기를 여실히 전한다.
세계 최고층 빌딩에서 최고의 전망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신기루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볼품없는 투쟁사를 그려내는 것 같아 서늘하기도 하다. 이곳의 스카이 덱에서 관광객은 지구 사막화에 영향을 끼치는 화석 에너지의 땅을, 그 위에 오일 머니가 지은 신도시가 힘들게 확대되는 현상을 감상한다. 그마저도 희뿌연 대기가 결코 가시지 않을 듯하지만.

아르헨티나 엘찰텐 콘도르 조망지의 경관. ⓒ허태우

아르헨티나 엘찰텐 콘도르 조망지의 경관. ⓒ허태우

인간의 투쟁이 볼품없기에 오히려 풍경은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남쪽 끄트머리, 파타고니아 엘찰텐(El Chalten) 초입의 낮은 언덕에는 콘도르(Cóndores) 조망지가 자리한다. 마을 경계를 지나 30여 분만 걸어 오르면 만날 수 있는 곳. ‘파타고니아’라는 대명사가 제법 비장한 분위기를 만들지만, 당도해보면 실체는 여느 외딴 마을마다 하나씩 있을 법한 뒷동산이다. 잡초 사이로 무명의 야생화가 드문드문 보이고, 오랜 바람에 풀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산. 물론 콘도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동산에 견주는 게 불가능한 장관이다.
남반구의 여름이 한창인 2월의 어느 날, 나는 윈드 재킷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해 질 무렵의 콘도르 조망지에 올랐다. 이미 어떤 일행이 삼각대에 카메라를 거치하고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을 못 이긴 그들의 삼각대는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몇 겹의 목도리와 우모복으로 무장한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오더니 “이 사진을 여기서 촬영한 게 맞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해시태그가 줄줄이 달린 인스타그램 속 그 사진을 어디에서 촬영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초행이었고, 나의 조망지 리스트에 이제 막 새로운 지명을 올릴 참이었으니까. 두꺼운 목도리의 사내는 소득 없이 되돌아가 삼각대와 카메라를 껴안았다.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다행히 하늘은 청명해 구름 더미는 적었다. 그리고 마법 같은 풍경이 예고 없이 펼쳐졌다. 그건 두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면서 봐야 할 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동시에, 보는 이를 한참이나 얼어붙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파타고니아 안데스산맥의 거친 암봉들과 그 아래 다소곳하게 낮은 호흡을 이어가는 마을 엘찰텐의 어우러짐은 낭만주의자의 숭고미를 소환했다. 조망지를 찾는 나의 버릇에 찬사를 내려주려는 듯이.





묘 지


이토록 기나긴 한 번의 독서
김인정(광주MBC 기자, 〈보스토크〉 편집 동인)

토리노 기념 묘지 전경. ⓒ김인정

토리노 기념 묘지 전경. ⓒ김인정

이곳에 누운 이들의 입술은 어떤 말도 속삭일 수 없게 썩어버렸다. 멀리, 장례를 치르는 이들과 참배객들이 보였다. 차디찬 땅 위에 내려앉은 아침 안개로 마치 유령처럼 허리춤까지 뿌옇게 지워져 있었다. 이 공동묘지에 오기 위해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탔다. 이탈리아 토리노라는 낯선 도시에 도착한 건 전날 밤이었다. 토리노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죽은 프리모 레비의 삶에 대해 읽었기 때문에 도시 이름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포로 생활을 한 유대인 작가다. 11 달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고, 살아남아 돌아온 뒤에는 43년 동안 나치의 만행을 증언했다. 증거까지 모조리 말살해 역사의 영원한 승자로 남으려 했던 나치의 시도에 맞서듯 증언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 혹은 희망이라 불렀다. 그리고 1987년 4월 11일, 레비는 자신이 태어난 토리노의 집 4층에서 떨어져 돌연 목숨을 끊었다.
나는 묘비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꽃다발을 고쳐 안았다. 무덤을 손질하는 인부들과 관리인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누구도 레비를 알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이미 28년째였다. 기약도 없이 거대하고 복잡한 묘지 속을 헤맸다. 빼곡하게 들어찬 비석들을 지나고, 망자들의 작은 흑백사진 액자가 수백 개씩 걸려 있는 비석을 지났다. 지쳤다 싶을 즈음, 언젠가의 아우슈비츠가 그러했듯 가장 외진 곳에 내몰려 창살로 가로막혀 있는 유대인 묘역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굵직한 묘비가 경쟁하듯 뻗친 다른 묘역과는 달리 사뭇 검소한 느낌이었다. 검고 반질반질한 장방형 묘비석이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지는 일 없이 흙과 비슷한 높이로 나지막이 누워 있었다. 빈틈 하나 없이 종과 횡으로 열을 지어 들어찬 묘비 사이를 잰걸음으로 걸었다. ‘레비’란 성이 자주 눈에 띄었다. 성에 놀라고 이름에 낙심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미 너덜거리는 공동묘지 지도를 고쳐 쥐며, 당신을 만나러 한국에서 이탈리아 토리노까지 날아왔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묘역 끄트머리에서 지친 눈을 비빌 때쯤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묘. ⓒ김인정

프리모 레비의 묘. ⓒ김인정


포르토의 뢸르 서점. ⓒ김인정

포르토의 뢸르 서점. ⓒ김인정

174517. 잊을 수 없는 그의 수인 번호와 ‘프리모 레비’라는 단정한 이름이 각인된 묘비에 시선이 들러붙고 말았다. 몇 번이나 읽고, 옮겨 적고, 흠모하고, 경외해온 이름이었다. 검은 비석 주변으로는 흰 조약돌이 화사하게 뿌려져 있고, 묘비는 덩굴나무 두 그루에 살뜰하게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이 땅 아래 당신의 유해가 있다. 당신은 분명 존재했었다. 이 조그만 무덤 밑에, 정직했던 증언자의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 묘비에 드리워진 작달막하고 아담한 나무가 왜소했던 레비의 생전 모습과 닮아 있었다. 가져온 꽃다발을 묘비 위에 올렸다. 조심스레 곁에 앉아 매끄러운 묘비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생몰년과 함께 새겨진 숫자는 아우슈비츠 수감 당시 그의 왼팔에 새겨져 있던 수인 번호였다. 야트막하게 음각된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슬쩍 더듬었다. 내내 아픔이었을 그의 팔을 어루만지듯이. 묘비에 대고서 살아 돌아와서, 기록을 남겨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스물네 살의 한 새벽, 토리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서울의 한 하숙방에서 당신이 아우슈비츠 생활에 대해 증언한 책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노라고. 당신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체험을 관망하기만 하는 무책임한 독자였지만, 증언을 읽고 나서는 내 영혼도 활활 타는 것 같았다고. 당신은 나에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의 원형이라고.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반복해서 꾼 최악의 악몽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 수용소의 일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여동생이 일어나 자리를 뜨는 꿈이었다. 그는 증언에 대한 무관심을 두려워했다. 증언을 아무것도 아닌 말로 만들고, 증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무관심을. 묘지에 도달하기 전날 밤, 나는 중앙이 텅 빈 나선형 계단 구조의 호텔 꼭대기 층 층계참에 앉아 한참이나 바닥을 들여다봤다. 레비는 꼭 그런 구조로 생긴 자택 계단 난간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잿빛 어둠 속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버렸다. 레비는 11달에 걸친 아우슈비츠 생활의 증언자였으며 동시에 아우슈비츠 이후의 43년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 레비가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건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과 반성이 이 세계에서는 어쩌면 더는 불가능하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모두가 그의 생환만을 축하했을 뿐 43년간 이어져야만 했던 기나긴 증언을 손쉽게 불신하거나, 손쉽게 망각해버리고, 또 자리를 떠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 ‘이후의 세계’가 결국 그를 죽이고 만 건 아닐까. 레비는 썼다. 인류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레비의 죽음은 아우슈비츠라는 절망과 생환했다는 희망으로만 나뉘어 있다고 부박하게 믿어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레비는 왜 죽었을까. 모른다. 알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묘비를 어루만졌다. 노인이 되어버린 레비 곁에서 어깨를 토닥여줄 행운을 얻은 듯이 아주 오랫동안. 당신의 증언이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고, 시공간을 초월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개인적으로나마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 묘역 밖에서는 인부들이 느릿느릿 잔디를 깎고 묘비를 닦으며 청소를 이어갔다. 영원히 잊지 못할 대화를 마친 셈이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레비와 같이, 자신의 글에 생명력을 모조리 양보한 채 세상을 떠나가는 작가들이 있다. 생생하게 타오르는 듯한 목소리가 그들의 문장 위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바람에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때로 그들과 열띤 대화를 나눈 듯 달뜨게 만드는 작가들이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답답해지곤 했다. 이렇게 영혼의 갈래가 비슷한, 혹은 존경할 법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껏 알게 됐는데 그런 막대한 위로와 실제로 조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시공을 초월한 대화에 마음을 빼앗길 때면 그래서 늘, 그들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여행을 하며 작가들의 무덤에 가고, 또 작가들의 무덤에 가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건 그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들 역시 지구에서 살았으니, 나의 오늘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조그만 행복과 끊임없는 눈물이, 불평등과 빈곤이, 부와 무료함이, 부조리와 폭력이, 우정과 배신이, 사랑과 상실, 모순과 광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위해서. 그런 세상을 고통스럽게 통과해 나가면서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때론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무언가를 끝내 썼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작가의 무덤 앞에 서 있노라면 그러한 희망 몇 개가 내 안에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꾸로, 그들의 말과 글이 시간 속에서 끝끝내 잊히지 않고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는 증거로서, 또 망자의 증언을 오랫동안 지켜주는 미래의 증인으로서 그 앞에 선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파리에 갔을 때는 당연하게도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갔다. 수전 손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기자로 일하는 동안 타인의 고통과 공포, 절망을 파헤치고, 때론 후벼 파며 느낀 모종의 수치심이 내 안에 있다면, 그녀의 책은 그에 대해 함께 토론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막막한 질문에 용감히 맞서는 힘을 어디서 찾아냈는지 물었다. 무덤은 납작한 채 말이 없었지만, 고요히 반짝이는 화강암 묘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답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손택 이후의 인간, 손택의 글을 읽은 인간이라면, 답이 없는 오늘의 질문에 용감히 맞설 수 있는 무기 하나는 이미 쥔 것 아닌가, 하고.
손택을 만나러 간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는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40살 연하의 연인에게 뜨거운 연서를 남긴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다정하고 짓궂은 농담을 건넬 수 있었다. 대담한 사랑의 실험을 했던 세기의 커플,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분홍빛 합장묘 앞에서는 둘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미 알고 있는 후대의 특권을 누리며, 두 사람의 저서에서 각각 읽은 문장을 떠올리고, 또 웃음 지을 수 있었다. 내 방 한구석에서 시작되어 작가의 무덤 앞에서야 마무리되는 이 기나긴 독서는, 영원이라는 서가에 잠들어 있는 위대한 작가들이 썩기 쉬운 육신을 가지고 짧디짧은 삶을 허락받았을 뿐인 평범한 인간이라는 진실을, 그런데도 그들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쓰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신비를 동시에 입증한다.
여행하며 작가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 무덤 앞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작가의 묘지를 찾기 힘들 때면 그가 살았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그저 작가가 태어난 나라의 서점에 불쑥 들어가 그들 모국어로 출판된 원서에 코를 묻어보기도 한다.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얼굴을 그려 넣은 작은 커피잔을 사거나 포르투갈어로 된 그녀의 시집을 뒤지고 다니는 것만으로 즐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작가들이 우리와 비슷한 삶의 조건 안에 포획된 채로도,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인 채로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써나갔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가장 명징하게 느끼게 하는 장소는 늘 작가의 무덤이다. 그 가슴 떨리는 존재와 부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여행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독서다.
어떤 여행자는 시장에 간다. 어떤 여행자는 반드시 사원을 방문하고, 또 어떤 여행자는 공원을, 도서관을, 재즈 클럽을 찾는다. 세계 어느 도시에 당도하건 간에. 각 여행지의 필수 방문지가 있다면 각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도 있는 법. 여행이라면 이골이 난 세 명의 필자가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만의 여행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