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 할머니의 추억이 곁들어 있는 작은 책방, 장미서림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작은 책들.



작은 책들


장미서림은 길 건너에 있었다. 어린 내게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너기란 어지간한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거의 매일 장미서림에 갔다. 서점의 유리문을 열면 문가에 달린 종이 건성으로 울려내는 소리, 풍겨오는 새 책 냄새, 그에 맞춰 서점 곁방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나타나는 호호 할머니의 흰 올림머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오래 머물기 위해 나는 책을 오래오래 골랐다. 호호 할머니는 그런 나를 번거롭다 여기지 않았다. 외려 문간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바느질거리의 코를 찾으며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주시곤 했다.
치티치티 뱅뱅. 명탐정 셜록 홈스와 괴도 루팡. 용감한 갈매기 조나단과 신비로운 데미안. 장미서림에서 만난 나의 친구들.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는 장미서림에 큰 빚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시절이 없었다면 글 쓰는 삶을 살고 있었겠는가.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에 마냥 만족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불행히 여긴 적도 없으므로. 한편으로 후회가 된다. 장미서림을 찍어둔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호호 할머니에게 그간 참 감사했노라고 인사를 전할 기회라도 있었더라면. 이제는 없는 서점을 나는 나의 서점에 앉아 그리워하고 있다.
손님 둘이 들어와 감탄한다. “어쩜 책들이 이리 예쁠까. 요즘은 참 책을 잘 만들어.” 아닌 게 아니라 신간이 놓여 있는 매대는 꽃밭을 연상케 한다. 갖은 색과 모양으로 자신을 집어달라고 어필하는 중이다. 예전 장미서림의 책들은 어땠더라. 나는 다시 한번 호호 할머니의 작은 책방을 회상한다. 범우사의 사루비아 문고(이제는 ‘사르비아’라고 한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그 시리즈의 책은 평생이 걸려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낡은 책꽂이에 꽂힌 책을 한 권 한 권 꺼내어 살펴보며 그 책들의 비밀스러운 제목과 표지를 탐내곤 했었다.
가로 106mm, 세로 148mm. 문고판이라고도 하고, 국반판이라도 하는 책이다. 보관하기에 좋고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하다. 작은 만큼 가격도 싸서 주로 세계 명작선같이 검증된 책이 문고판으로 출간되곤 했다. 그런 문고판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가볍고 싸다’라는 정서가 한국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옆 나라 일본만 해도 여전히 많은 문고판이 나오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하나의 책이 페이퍼백과 하드커버로 나뉘어 출간된다. 소형차가 한국에선 인기가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그래서 문고판을 좋아하는 것은 유별난 나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장미서림에서 나를 유혹하던 그런 책들을 그리워하면서 그저 옛일로만 여겨야겠구나 싶었다. 한데 얼마 전부터 다시 조그마한 책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민음사의 〈쏜살문고〉, 제철소-위고-코난북스가 연합해 내놓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물론 예전과 같은 감각은 아니다. 규격화된 ‘작음’이 아니라 표지도 본문 디자인도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형식으로 내용을 정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두꺼운 책을 시간 들여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명의 독자라도 더 유치해야 하는 출판사 측에서 내놓은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책이 작아지고 얇아지는 것이 시대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쓰고 파는 입장에서 썩 달가운 기획은 아니다. 그러나 어딜 나가든 책 한 권 들어야 마음 편한 사람이고 보니 용이함 앞에서는 금방 좋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단점이 없겠는가. 당장 나이 든 독자들이 불편해한다. 책이 작아진 만큼 글자 역시 작아지기 때문이다. 안경을 들어 올려 책 제목을 확인하고 이러저리 뒤적이다가 못내 내려놓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울 리 없다. 내용이 가벼워지는 것 또한 불만이다. 담을 수 있는 내용이 한정되다 보면 쓰는 이의 사유에도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다. 책이 작아져서 다 담을 수 없다면 책의 의의란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독자들 역시 짧은 내용에 익숙해질 테니까, 읽는 습관이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들이 책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긴다면 당장은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사람들마다 장미서림을 하나씩 갖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기왕이면 나의 서점이 장미서림이 되고 내가 호호 할머니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 사실 책의 꼴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집어 들 수만 있다면, 읽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어릴 적의 내가 떠오른다. 언덕길 따라 내려가 문방구를 지나, 슈퍼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몇 발짝 뒤에 나타나는 왕복 2차선 도로 건너 장미서림. 엄마에게 받은 1000원짜리 몇 장을 쥐고 책을 사러 가던 나. 나는 장미서림도 좋았지만, 장미서림 가득 꽂혀 있던 그 책들을 더 좋아했다. →


이달의 문고본

〈아무튼, 택시〉, 금정연, 코난북스, 2018

〈아무튼, 택시〉, 금정연, 코난북스, 2018

‘하나의 시리즈는 하나의 출판사에서’라는 통념을 깬, 제철소-위고-코난북스의 연합 시리즈물 〈아무튼 시리즈〉는 현대식 문고판의 절정이다. 술, 식물, 문구 같은 보편적 일상물부터 순정 만화, 예능, 떡볶이 같은, ‘이 주제로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고?’ 싶은 ‘덕질’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문고판을 선보이고 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책은 〈아무튼, 택시〉. 서평가 금정연의 촌철살인적 매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우리가 택시를 이용하며 느끼는 희로애락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풀어놓았다. 우연히 서점에 들렀고, 심각해지고 싶지는 않고, 그럼에도 책을 한 권 사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무조건 이 책을 들어야 할 것이다.


Who’s the writer?
유희경은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 나무로 자라는 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등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자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는 서점지기다.
작은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