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그림책이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닌 이유

그림책에는 어른이 되고 쉽게 놓쳤던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BYESQUIRE2020.06.02
 
 

그림책 이야기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안녕달의 〈수박 수영장〉.존 쇤헤르와 제인 욜런의 그림책 〈부엉이와 보름달〉.김상근의 〈두더지의 고민〉.하이케 팔러의 〈100 인생 그림책〉.김성라의 〈고사리 가방〉.김성라의 〈귤 사람〉.숀 탠의 〈빨간 나무〉.
“이것 봐.” 아이가 아빠에게 그림책을 가져가 건넨다.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했을 나이. 일을 멈추고 그들의 모습을 훔쳐본다. 아빠는 아이가 내민 책을 받아 몇 장 넘겨보다가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힌다. 자연스럽다. 아마 저 두 사람에게는 일상이겠지.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소리,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서점을 한 칸 한 칸 채워간다. 아이는 숨죽여 다음 장, 그다음 장에서 벌어질 일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가 닫히고 잠시 침묵하던 아이가 말한다. “또 읽어줘.” 아빠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 읽는다는 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다.
어떤 독자가 가장 반갑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서슴없이 어린이 독자라고 대답한다. 어린이는 어린이여서 소중하다.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반응을 알아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없다. 한편으론 서점에 찾아와 책을 뒤적이고 읽는 것이 고맙다. 세상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것 대신 고색창연한 서점으로 와주는 것만으로 감사 인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그림이 있는 책을 좋아한다. 막연히 글자가 적어서 그런 모양이다 여겼다. 서점을 열고선 그 생각을 고쳤다. 아빠 무릎에 앉은 아이가 굳이 그림책을 읽어달라 청하는 것은 그림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텍스트의 세계와 그림의 세계는 각기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겠는지.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들의 이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점지기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은 어린이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들이다. 어느 쪽이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읽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림책은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덤덤하거나 심드렁한 손길로 서가에 꽂힌 책을 뽑아 팔랑팔랑 넘겨보고 그만이다. 책에 적힌 글자를 읽고 내용을 파악했으니 다 읽었다 싶은 것일까.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그런 ‘때’가 몹시 잦은 편인데) 안타까운 까닭은, 그가 내려놓은 한 권의 책에 들인 작가의 오랜 시간과 노고를 떠올려서도, 구매해서 볼 것을 서서 읽고 끝내는 그가 얄미워서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느긋한 마음을 가지면 좋으련만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오래도록 줄거리 파악 위주로 진행된 한국 독서 교육의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집을 보면 난감해하고, 그림책은 어린이나 봐야 마땅한 책이라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책을 꼭 봐야 하느냐고? 누구나 꼭 봐야 하는 책은 없다. 세상에 그런 일이란 게 있기나 할까. 그럼에도 그림책 읽기를 추천한다.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치고 마는 것들.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그림책 안에는 ‘있다’. 조금 더 힘줘 말하면, 그림책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종일 그런 것만 생각하는 딴생각의 전문가다. 무엇 하나 허투루 보는 일 없이 살피고 따져서 숨은 작은 것들을 몰래 끄집어내고 딴청을 부리는 존재다. 그런 이들이 풀어놓은 그림이, 이야기가 간단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들이 엉뚱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도 누구나처럼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한 권의 그림책은 미술관과 같다. 뛰어다니며 미술 작품을 관람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림책을 읽을 때는 뒷짐 지고 걷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린 마음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다. 휴일 늦은 오전, 느슨한 볕 아래면 더없이 좋다. 따뜻한 차나 커피 한잔과 같이해도 좋을 것이다. 일부러 동심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은유의 신비, 발견의 놀라움 앞에서는 누구나 작지만 큰 가능성을, 여리지만 언제고 힘찬 발돋움을 준비할 테니. 그러니 별다른 각오 없이 그저 느려지기만 하면 된다. 마음에 여백을 두고. 거기 여유를 잔뜩 담아서. 휴일의 늦은 오전쯤 없는 셈 치더라도 아쉽지 않을 테니까.
멋진 마음을 가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을 추천한다. 여름과 수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안녕달의 〈수박 수영장〉이 좋겠다. 겨울밤에는 존 쇤헤르와 제인 욜런의 그림책 〈부엉이와 보름달〉이 제격이다. 김상근의 〈두더지의 고민〉은 어떤가. 역시 훌륭하다. 근사한 고찰이 필요하다면 하이케 팔러의 〈인생 100 그림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성라의 〈고사리 가방〉이나 〈귤 사람〉을 보면 당장 제주행 티켓을 끊고 싶을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숀 탠의 그림책을 빼놓을 수 없지. 그의 〈도착〉이나 〈빨간 나무〉는 당신의 며칠을 사로잡고 말 것이다.
얼마 전 그림책 작가 백희나 씨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그마치 한국인 최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이나 한강 작가의 맨 부커 상 수상만큼 의미 있고 중차대한 사건임이 분명한데도 질병의 유행 때문인지, 국회의원 선거로 떠들썩했기 때문인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가버렸다. 사실 알게 모르게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국내외 가리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딴생각의 전문가들이 부려놓은 환상적인 다른 세계를 정작 우리는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너무 각박하기 때문인가. 아마 그렇겠지. 그럴 때 그림책 한 권을 골라 펼쳐보길 권한다. 가까운 휴일, 늦은 오전에. 따뜻한 것을 곁에 두고서. 아이를 안고 책을 읽어주듯 중얼중얼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좋겠다. →
 
 

이달의 그림책

〈도착〉 숀 탠 지음, 엄혜숙 옮김, 사계절, 2008

〈도착〉 숀 탠 지음, 엄혜숙 옮김, 사계절, 2008

2011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그림 작가 숀 탠의 대표작이다(백희나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상을 받았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숀 탠은 아시아계 호주 작가인데, 이 작품은 이주민인 그의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유의 어둠과 빛 그리고 온도를 놀라운 솜씨로 그려냈다. 단 한 줄의 텍스트 없이 완벽한 이해와 아름다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단연 내 인생 최고의 그림책이다. 그리고 아마 당신에게도 그럴 것이다.

 
Who’s the writer?
유희경은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 나무로 자라는 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등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자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는 서점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