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DE AWAYS
」멀고도 가까운 제주도 중문

세어보니 작년에만 제주도 여행을 열 번 넘게 했다. 올해도 채 여름이 되기 전에 벌써 몇 번이나 다녀왔고, 불과 2주 전에도 방문했다. ‘내키면 찾는다’고 표현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출장으로 가는 경우도 많고 친구가 제주도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제주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가장 큰 매력은 특유의 미묘한 거리감이다. 일단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여행 특유의 부담감이 없다. 사전 조사와 계획도 필요 없고, 간 김에 뭐 하나라도 더 보려고 마음을 채찍질할 필요도 없다. 장점이라 말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해외여행에 비해 확연히 사진도 덜 찍게 된다. 아예 카메라를 챙기지 않고 다닐 때도 많다. 이 페이지에 쓰인 사진들 역시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적당히 먼 곳이기도 하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도착하는 순간 일상의 사정은 문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일이 되곤 한다. 바다는 늘 생각보다 깊고 넓다. 가볍게 바람 쏘이러 오가지만 또 한편 작은 변수로 발이 묶이기도 한다. 고작 안개 때문에 제주도에 갇힌 적도 있으니까. 공항까지 가서야 결항 사실을 들었을 때, 새삼 제주도에 느꼈던 낯선 인상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억을 닮은 거리들 전남 목포

안개가 지워지지 않던 날. 이른 저녁이지만 긴 어둠을 머금은 새벽 거리처럼 모든 길이 텅 비어 있었다. 목포 가정식 식당에서 포만감 넘치는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항동 거리 뒷길로 나와 천천히 산책을 시작했고, 그 텅 빈 길을 차례로 밟았다. 항구와 시장, 그물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객지에 들른 사람들이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도 묵을 수 있던 여인숙, 빈집, 쓸쓸한 간판뿐인 좁은 길들도 지나쳤다. 상점 거리에는 전부 불이 꺼져 있었으나 내려진 셔터 사이로 아직 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들이 있었다. 외로운 집으로 만들어진 행성들 같았다. 유행을 따르지 못했던 간판들은 정보보다는 운치를 간직한 옛것이 되었고, 그만큼 어느 한 시절에 멈춰진 그 거리는 오래된 기억처럼 보였다. 어느 거리는 내가 유년을 보낸 옛 서울의 거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고, 또 어느 거리로 들어서면 내 기억을 훌쩍 뛰어넘는 근대에 도달하기도 했다.


한나절의 숨은 그림 찾기 인천

내 삶의 터전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이면 인천에 이른다. 단순히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하철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잠시 선잠에 들었다가 내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로 닿을 수 있는 곳이란 뜻이다. 그러니 매번 준비 없는 마음으로 역을 나섰다가 다소간 즐거운 충격을 얻곤 한다. 온갖 시대와 형식이 뒤섞인 건축물, 지하상가에서 유창한 한국말로 노부부에게 향로를 파는 외국인 젊은이, 목줄도 없이 역 앞을 돌아다니며 똥을 누는 새끼 강아지까지. 이런 이질적 요소는 얼핏 익숙한 풍경 속에 숨어 있기에 한층 더 생경하다. 지하철처럼 생긴 기계를 타고 평행 세계의 서울에 떨어진 사람이 꼭 이런 종류의 감동을 얻을까. 언어부터가 그렇다. 인천말은 서울말이나 매한가지지만 대화하다 보면 억양과 표현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식당에서는 메뉴판의 ‘간재미’가 뭔지 몰라 주인 아주머니와 스피드 퀴즈를 벌인 적도 있다. 음식이 부려진 후에야 나는 그게 ‘가자미’의 방언이란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경험을 기다리다 겨우 가자미구이를 먹게 된 것이 억울해 황급히 소주를 주문했더랬다.
자동차 없이 여행하는 가장 큰 호사는 역시 술이다. 나의 인천 여행은 늘 반주(飯酒)로 시작된다. 우선 인천역 한 정거장 전인 동인천역에서 하차한다.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는데, 딱히 누군가를 설득할 만한 이유를 대기는 힘들다. 인천역에서 내리면 인파에 섞여 차이나타운을 거치는 동안 ‘관광객’이라는 스스로의 정체를 선명히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랄까. 동인천역에서 신포시장 방향으로 걸으면 한결 자신과의 대화에 골몰할 수 있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기튀김은 어떨까? 스지탕은? 계절 별미인 민어회는? *하라가 헷타…! 그 일대에서는 작고 허름한 가게에 대충 들어서도 웬만큼 만족스러우니 고로상이 타고난 천운의 묘미까지 살짝 맛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해가 저물라 치면 그제야 서쪽으로 향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가장 큰 이유는 라이브 음악 공연이었다. 재즈에서 로큰롤, 포크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열리는 다양한 공연. 그러나 그런 공간이 요 몇 년 새 하나둘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인천의 밤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대충 포구까지 걸어가서 바다와 공장을 구경하거나, 부두 근처의 식당에서 술을 마시곤 한다. 제아무리 바닷가 마을 태생이라도 항구 인근 식당의 생선이 맛있을 거라는 안일한 기대는 떨치기 힘든가 보다.



겨울 가파도에서 찾은 것들 가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던 초창기에는 외부와 단절된 고요가 반가웠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게 되었고, 네모반듯한 컴퓨터와 휴대폰 세계에서 이뤄지는 소동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 현장보다 부산스럽고 요란하다. 전화벨은 아침부터 울린다. 이메일은 순식간에 쌓인다. 오히려 바깥 생활을 하는 쪽이 여러모로 건강했다. 이럴 때면 허기가 진 것처럼 어디론가 피하고 싶다.
2018년 가을부터 2019년 이른 겨울까지 제주 가파도에 있는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제주공항에서 40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모슬포였다. 대정읍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밀면집에서 먹은 수육은 흑돼지여서 그런지 굉장히 부드러웠다. 수육을 질겅질겅 씹으며 음미하고 있는데 밀면집 창문 너머에 담벼락을 현무암으로 쌓은 집이 보였다. 흑돼지와 현무암이라. 이 섬을 상징하는 저 두 존재의 흙빛 속에는 내가 밝히지 못할 어떤 기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감각이 다른 감각과 엮일 때 기억은 한층 오래가는 법이다. 밥을 먹고 나오니 바람이라는 또 다른 감각이 덧대어졌다. 차가 바람길을 따라 달렸다. 바람의 시작점에 운진항이라는 새로 생긴 터미널이 있었다. 마라도와 가파도로 가는 배는 운진항을 거쳐야만 한다. 오후 2시 배를 타고 가파도로 들어갔다. 멀리 있는 낮은 섬을 담은 그때의 광경이 아직도 선하다.
가파도 선착장은 한산했다. 운진항에서 가파도로 오는 20분 동안 심하게 요동치는 배 안에서 불안해하는 건 나밖에 없는 듯했다. 다른 이들에겐 그 요동이 그저 일상인 듯 창문을 핥고 간 파도의 맹렬한 포말과는 무관하게 침묵이 흘렀다. 파도의 포위마저 없어진 가파도 선착장은 고요했다. 오직 파도 소리만 허락된 곳이었다. 테트라포드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낚시꾼을 제외하고는 그 흔한 관광객도 없었다. 일부러 을씨년스러운 사진을 얻기 위해 채도를 낮추거나 조도를 반 스톱 낮출 필요도 없었다. 찍으면 찍는 대로 묘한 섬의 색이 그대로 사진에 반영되었다. 산방산과 송악산이, 휘청거리는 청록색 파도가 놀랍도록 가까웠다. 가파도에서만 칠십 평생을 살았고 지금은 레지던시 관리를 맡고 있는 김 감독님이 훗날 얘기하기로, 기상예보가 정확치 못했던 옛날에는 송악산 절벽에 닿는 파도 높이에 따라 다음 날 어획 여부를 결정했단다. 이것이 내가 겪은 가파도의 첫인상이다.

가파도의 첫인상은 마지막까지 쭉 유지되었다. 겨울, 그곳에는 침묵이 있었고 보리가 없는 낮은 곳을 시원하게 통과하는 바람이 있었다. 보리가 사라지면 소라와 멍게가 있었다. 떠나기 전 나를 축복해주기 위해 험난한 겨울 바다를 뚫고 직접 마라도 어귀까지 가 방어를 잡아 온 김 감독님의 쭈뼛쭈뼛한 마도로스 사랑도 있었다. 또 1970년대에 물질을 하러 일본까지 원정을 갔다 왔다는 일지 이모님께서 직접 챙겨주신 몸국으로 속을 다독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방치된 어린아이처럼 처음에는 당황스럽다가도 모든 간섭으로부터 단절된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어질러졌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기까지는 길고 고된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도 없는 가파도 밤바다에 나가면 비릿한 해양풍이 건강한 입맛을 돋운다. 별은 별일 없는 이상 밝다. 별이 마구 흩어져 있어 침묵에 금을 낸다. 얼굴에 미소로 작은 균열을 만든다. 침묵이거나 음악이거나, 둘을 왕래하면서 인생의 멜로디를 조율해가는 바람과 파도가 보인다. 가파도는 침묵에 가깝다. 깜깜한 가파도의 밤은 소리마저 보이지 않는다.
이 기사의 주제가 ‘혼자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찾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다. 물리적 문제가 있으니 가파도를 수시로 찾지는 못한다. 다만 나는 속이 복잡할 때면 늘 가파도를 더듬곤 한다. 그곳에서 나는 침묵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서울에서 들리는 소리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노이즈가 섞여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산 자락을 달리는 폭주족들의 과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금 새벽 3시 반에, 가파도는 꿈만 같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섬진강변

올 2월에 다녀온 도쿄 여행을 마지막으로 기약 없이 옛 사진첩 속 먼 곳들을 들춰 보며 아련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국땅에서는 이방인이기에 갖게 되는 반쯤의 긴장과 반쯤의 자유로움이 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많은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국내 여행은 다르다. 익숙한 곳이 아니라면 혼자 발걸음을 떼어 새로움을 탐험하거나, 온전히 쉼을 만끽하거나, 모르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 밥 한 끼 홀로 먹기도 쉽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약속도 짐도 없이 훌쩍 다다를 수 있는 곳을 그리게 된다. 바쁘고, 여유가 없고, 답답한 마음을 돈과 글과 말로도 풀어놓을 길이 없을 때 특히 그렇다. 내 일상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 그럼에도 오고 감에 피로감이 없을 곳. 언어의 뉘앙스가 달라질 곳. 자연의 여백에 혼자인 나를 풀어놓을 수 있는 곳. 내게 그 답은 섬진강변이다.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에서 시작해 임실, 순창, 곡성, 구례를 거쳐 경남 하동 쪽으로 이어지는, 흔히 ‘오백리길’이라고 일컫는 길고 온화한 강이다. 강의 이미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기다란 다리 아래로 시원시원하게 굽이치는 그런 강이 아니다. 얕고 맑게 실개천으로 흘러 작은 마을을 굽이굽이 휘감고 들판을 조용히 물들이며 느슨하게 흐른다.
바라만 봐도 발목이 찰랑찰랑 간지러울 것 같은 섬진강 곡선을 따라 굽이굽이 들꽃과 억새와 이름 모를 풀, 그리고 차가 지나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이 놓여 있다. 소란함 없이 온통 빛으로 가득한 길. 새소리와 물소리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계속 걷게 되는 길. 얕은 강물 속에서 재첩을 따는 아주머니들을 발견할 때, 좁은 강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반대쪽으로 가서 내가 걷던 길의 풍경을 감상하고자 할 때, 걸음은 오직 그런 때 멈춘다.
2012년 가을, 나는 친구와 함께 임실 구담마을에서 천담마을로 이르는 3km 길을 걸었다. 걸음마다 이유 모를 안도감과 아늑한 기운이 푹 안겨와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지도 가늠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면 그저 지나쳤을 나무의 이름을 엉터리로 헤아리며 밤과 잎사귀를 주웠고, 시골길에 드문드문 지나는 사람들을 미소로 스쳐 보냈다. 좁다란 길의 끝은 높은 언덕을 가진 천담마을로 이어져, 우리는 언덕 풀밭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말없이 쉬었다. 그리고 해가 지는 들판 아래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재작년 여름에 그 길을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혼자. 달라진 계절에 걸음은 한층 더뎠고 전과 달리 매미 소리도 귀를 울렸다. 대신 온통 연두와 초록으로 채워진 숲속에서 내 커다란 머릿속이 작고 작은 잎맥이 되어 흡수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감탄사를 나눌 수 없어 외로웠으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특정한 시절의 강렬한 빛과 조용히 흐르는 소리,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의 기억은 표면장력처럼 찰랑대며 한 인간을 보호하는 막이 되어준다. 때로 스스로의 존재가 머릿속에 꽉 차게 되면 인간 자체가 점처럼 작아질 수 있는 축척의 전환도 필요하다. 대자연의 압도적인 위용 앞에 서는 것도 좋지만, 조용하고 소박한 자연의 곁에서 걸음과 걸음으로 조금씩 그 일부가 되어가는 것도 아주 근사한 경험이다.
봄의 생기를 안타깝게 보낸 우리에게 뜨거운 빛이 급하게 다가서고 나무들은 한층 짙어진다. 그걸 보고 있자면 다시 또 하염없이 하찮고 하찮은 존재가 되고 싶어지곤 한다.
세 겹의 주름 전북 완주 삼례읍

나에게 여행이란 낯선 시공간의 숨겨진 주름을 들추고 잠입하는 행위다. 속된 말로 어딘가 ‘짱박히는 일’. 이동한 거리와 지출 경비에 따라 방랑의 성취감, 만족도가 높아지는 나이가 지났기 때문일까. 빼어난 자연 풍광을 주파하고 유서 깊은 도시에 머무르고 난 뒤 ‘나 거기 가봤어’라는 자기 위안의 스탬프를 찍는 일은 이제 심드렁해졌다. 그래서 서울의 세련된 문화 지역보다 아직 날로 남아 있는 작은 산과 그 주름 속에 묻혀 있는 골목을 헤매게 되는 모양이다.
최근에 찾아낸 곳은 전북 삼례다. 잠시 서울을 벗어나 일상으로부터 숨을 주름이 필요했는데, 그 선정 조건이 나름 까다로웠다. 철도로 이동한 후 차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곳, 도시와 시골의 미묘한 경계선에 있는 곳, 적당한 침잠과 내면의 각성을 줄 만한 곳, 뜻밖의 읽을거리가 풍부하고 집필 욕구를 자극하는 곳. 마르셀 프루스트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한 말, “진정한 발견의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데 있다”는 이야기를 실현할 만한 곳이어야 했다.

며칠 후 날씨가 싸늘한 날 소읍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나만의 동네 한 바퀴를 시작했다. 1950년대에 지어진 아담한 성당을 지나자 색 바랜 페인트와 녹이 어우러진 양철을 두른 창고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1920년대에 일제가 양곡 수탈 기지로 세웠던 곡식, 비료 저장고가 지금은 미술관, 고서점, 목공소, 카페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마을은 작았지만 창고는 웬만한 도시의 문화적 욕구를 다 담아낼 정도로 컸다. 북하우스의 주름진 양철 속에서 100년 지난 녹 내음을 맡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찔하게 솟은 지붕과 서까래를 키 큰 책꽂이들이 받치고 서 있었다. 줄지어 선 거인의 품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고서들이 안겨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두려워 가져갔던 마스크를 책 먼지를 거르는 용도로 바꿔 쓰고, 나는 시간의 주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내 안에 틀어 앉은 이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짬뽕, 메밀국수, 그리고 식민의 유산들 전북 군산

전국 3대 짬뽕이라고 했다. 그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으나 내가 처음 군산을 찾은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던 건 틀림없다. 인류는 짬뽕파와 짜장면파로 나눌 수 있다. 나는 오랜 짬뽕파다. 붉게 타오르는 육수 안에 갖은 해산물이 토핑된 오동통한 면발을 끊지 않고 단숨에 먹는 즐거움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군산에는 전국 3대 짬뽕집 중 하나라는 복성루가 있다. 군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곳으로 냉큼 달려갔다. 긴 줄이 서 있었다. 나는 짬뽕 마니아지만 짬뽕에 경도된 ‘짬뽕 신자’까지는 아니다. 짬뽕 한 그릇을 먹으려고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도장의 현판을 깨는 야인 무술가의 마음으로 말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한 명입니다”라고 말하자 종업원은 살짝 귀찮은 듯한 손짓으로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짬뽕은 금방 나왔다. 그건 짬뽕이라기보다는 짬뽕이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담치와 꼬막과 오징어와 바지락, 그리고 돼지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재료를 넣고도 맛이 없기란 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확실히 그랬다. 짬뽕은 맛있었다. 다만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먹을 만큼의 별미는 아니었다.
복성루를 나서며 나는 가장 중요한 미션을 순식간에 완수한 에이전트처럼 김이 조금 샜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지? 무작정 걸었다. 사실 군산은 쉬이 갈 수 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KTX역도 공항도 없다. KTX를 타고 익산이나 아산으로 가서 무궁화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환승 시간을 좁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사실 KTX로 당신이 찾아갈 수 있는 지방 항구도시는 많다. 무엇보다 부산이 있다. 여수가 있다. 목포도 항구다. 양양은 지금 가장 핫한 항구도시다. 그에 비하면 군산은 교통수단이 많지 않은 전라북도의 작은 도시다. 도심을 한 바퀴 걷는 데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옛 군산세관 건물과 히로쓰 가옥(혹은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이 근대도시의 절정이다. 앞에 서는 순간 과거가 거울처럼 겹친다. 그것은 수탈의 역사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건져낼 수 있는 대담함이 있어야 한다. 군산이라는 도시도 이젠 그 사실을 잘 안다. 갈 때마다 시내 곳곳이 조금씩 달라져 있지만, 사람들은 근대의 역사를 품은 일본식 건물들이 군산의 매력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근대 역사를 품은 건물을 소개하는 지도를 배부하고 있고, 시에서 모집하는 근대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군산 도심의 좁은 골목을 한 시간쯤 걷고 낡은 적산 가옥의 냄새를 맡다가 동네 작은 메밀국숫집에 들어가 식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거기서 시원한 국수 국물을 들이켜면 시간을 거꾸로 들이켠 맛이 날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방 충남 당진 왜목마을

충남 당진에는 ‘비치타운모텔’이라는 이름의 모텔이 있다. 좋게 봐도 여름휴가에 이상적인 장소로 소개하기는 힘들 곳이다. 6만원이면 발코니 딸린 오션 뷰 객실에 묵을 수 있고 침대에서 일출을 볼 수도 있지만. 직원은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무신경하다. 호텔 앞마당 같은 왜목마을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 모든 해안 도시의 꿈, 산토리니를 표방했을 법한 궁전 같은 건물 전면에 쓰인 ‘Beach Town’이라는 글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치타운모텔 홈페이지에는 ‘르네상스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화를 바탕에 두고 세계 유수의 건축물을 참고로 설계했다’고 쓰여 있다. 설계 목적에 얼마큼 도달했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기이한 건물이다. 손바닥만 한 백사장 해변에는 은빛 왜가리 조형물이 서 있는데, 놀랍게도 국내에서 가장 큰 해안 조형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정취란, 말하자면 ‘코리안 키치’의 진열장이라고나 할까. 해수욕장에 접한 이차선 해안 도로를 따라 걷노라면 도로변에 이런 풍경이 이어진다. ‘해 뜨고 지는 왜목마을’이라 쓰인 비석, 가설 무대, 컨테이너 건물에 자리한 요트 세계 일주 홍보 전시관. 도로 끄트머리에는 낚싯배가 오가는 작은 선착장이 있다. 여기까지 걸어서 대략 5분이 걸린다.
일부러 혼자서 이곳을 찾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닐 터다. 왜목마을 최고의 관광 상품이 서해안의 일출인데, 이 일출을 보면 복잡한 감흥이 인다. 근해의 섬들이 보이는 개펄 위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 보는 일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사실 왜목마을은 북쪽으로 돌출된 반도 지형이라 바다 방향이 동쪽이다. 해 질 무렵이 되면 석문산에서 대호간척지 위로 지는 일몰과 바다 위 월출(月出)을 보고, 해안에 면한 횟집이나 근처 교래리의 백반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런 다음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방에 머문다. 크루즈 선실을 본떴다는 비치타운모텔의 객실은 해안가 숙소 특유의 눅눅함이 감돌지만 나름 깔끔하다. 이 방에서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소에는 일출 감상에 무관심한 편이지만 여기서 보는 일출이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은 쥘 베른의 〈녹색 광선〉처럼 매력적인 구실이 되어준다.
왜목마을의 공공연한 비밀은 다음과 같다. 인구가 몇 안 되는 어촌 마을은 2000년에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한 주민이 일간지에 마을의 일출 사진을 게재하며 서해안 일출 명소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비치타운모텔을 포함한 대부분의 숙박 시설과 조악한 조형물은 다 그 이후에 들어선 것이다. 심지어 왜목마을 해수욕장도 인근 항만 시설을 짓는 김에 조성한 인공 백사장이다. 그런 내력을 알고 나면 이곳에선 태양과 달을 제외한 모든 것이 흥미로운 허상으로 보인다. ‘비치타운’이라는 이름의 어감처럼.
혼자가 되고 싶은 순간 중 하나는 나와 세상이 불화한다고 느껴질 때다. 왜목마을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위안을 받는 건, 이 역설로 가득한 구석빼기야말로 나머지 세계와 부조화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비치타운모텔에 체크인한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