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돌이 아닌, 회사 자체를 비교해보면 또 어떤가. SM은 H.O.T 때부터 이어진 케이팝 전통 명가다. 그야말로 케이팝 시스템의 시초다. H.O.T,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레드벨벳 등. 이 중 대중이 모르는 그룹이 있을까? 반면 하이브는 단연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케이팝 아이돌 방탄소년단을 가진 신흥 강자다. 방탄소년단의 인기에 힘입어 하이브는 기존 SM-YG-JYP라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삼국시대를 끝내고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지난 2월, 하이브가 SM 지분을 인수해 단번에 최대 주주 자리에 등극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케이팝 시스템의 기초를 닦은 SM을 신흥 강자 하이브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그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있나? 이 모든 일은 하이브가 SM 창업자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의 지분을 인수해서 가능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반응이 꽤 극적이라는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나는 인생 절반을 아이돌 팬으로 살았다. 동방신기 노래가 내 케이팝 인생의 유아식이었고, 학창 시절에는 샤이니와 카라, 인피니트 노래가 내 귀를 채웠다. 케이팝을 오래 좋아한 나로서는, 하이브의 SM 인수 소식은 경악 그 자체였다. IT 기자인 내가 덕업일치를 내세워 이번 일을 취재했던 이유다.
불과 올해 초까지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이번 사건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시작은 지난 2월, SM 현 경영진이 발표한 ‘SM 3.0’과 카카오의 협업이었다. 우선 SM 3.0. 이는 한마디로 ‘이수만 없는 SM’을 의미한다. 기존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가 프로듀싱에 참여하던 SM 1.0, SM 2.0과 안녕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SM 3.0이 하이브의 SM 인수를 불러온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건 카카오와의 협업 및 주식 관련 계약이다. 카카오는 전방위적인 협력을 약속했고, SM은 주식을 새롭게 발행해 카카오에게 지분 9.05%를 주기로 계약했다.
문제는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면 기존 주주의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체 주식이 100일 때 20을 가지고 있던 주주는, 전체 주식량이 120으로 늘어났을 때 전체 주식 중 자신이 가진 비율이 16%가량으로 줄어들게 된다. 주식을 많이 가질수록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는 게 주식 시장의 원리. 지분 약 18%를 가진 SM 최대 주주 이 전 총괄은 법원에 현 경영진이 지배권 경쟁에 우위를 가지려고 한 일이라며 이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이수만 전 총괄과 하이브가 손을 잡았다. SM과의 협업을 꿈꾼 카카오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아니, 닭 쫓던 개 모양새가 더 잘 맞는 표현일까? 카카오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좀 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하이브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후 각자가 원하는 이사진을 선임하기 위한 하이브와 카카오의 ‘쩐의 전쟁’이 시작됐다. 1조원이 넘는 돈이 턱턱 오갔다. 하이브는 이수만 총괄 지분 인수와 공개매수를 통해 SM 지분 40%를 확보하는 데 1조를 넘게 쓰겠다고 선언했지만 공개매수가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 하이브의 공개매수가 실패로 돌아간 후 법원으로부터 신주 인수를 금지당한 카카오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SM 지분 35%를 가지기 위해 약 1조2500억원을 쏟아 넣겠다고 발표했다. 하이브와 카카오는 SM이라는 회사를 가지기 위해서는 조 단위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왜일까?
내가 이번 사건을 취재했던 이유는 ‘덕업일치’를 위해서이긴 했으나, 본업과 연관이 없지는 않다. 카카오에서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인수전의 본질은 단순히 엔터사 간의 합병이 아니라 ‘IT 기업’ 하이브와 카카오의 힘 싸움이기 때문이다.
SM의 가장 큰 가치는 단언컨대 지난 몇십 년간 쌓아온 지식재산권(IP)이다. SM은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돌을 수십 년간 만들어왔다. 이들이 IP 그 자체다. 하이브와 카카오가 원하는 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조금 의아하다. 카카오가 이렇게까지 돈을 써가며 하이브를 막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여기에서 대표적인 IT 기업으로 꼽히는 네이버가 등장한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네이버가 나오냐 하면, 네이버와 하이브는 함께 또 따로 글로벌 시장에서 IP와 콘텐츠, 플랫폼 서비스를 운영하는 혈맹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팬덤 플랫폼을 들 수 있다. 하이브가 가진 팬덤 플랫폼 ‘위버스’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유명 아티스트 팬들 덕분에 글로벌 팬덤 플랫폼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운영사인 위버스컴퍼니는 하이브의 자회사일 뿐만 아니라 네이버가 주요 주주다. 그런데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인 아이유, 아이브 등은 지금까지 위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카카오는 지난 2월 자사 아이돌이 SM 자회사 디어유와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이브-네이버 협업의 대표 명사인 웹툰 콘텐츠도 쉬이 넘어가기 어렵다. 하이브는 방탄소년단,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엔하이픈 등 자사 아이돌의 세계관을 담은 웹툰 콘텐츠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를 네이버웹툰 글로벌 서비스를 통해 연재한다. 성과도 좋다. 엔하이픈 웹툰 ‘다크 문: 달의 제단’은 네이버웹툰 독일, 스페인어 서비스에서 10주 이상 요일별 1위 자리에 올랐다. 하이브의 IP가 네이버웹툰의 글로벌 흥행을 뒷받침한 셈이다.
네이버의 흥행은 카카오가 글로벌 진출에 난관을 겪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을 넘어 글로벌로 나아간다며 ‘비욘드 코리아’를 외치는 카카오에게 SM의 IP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실제로 카카오는 SM과의 협업을 발표하며 카카오 웹툰, 웹소설, 캐릭터 사업에서 SM IP 활용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떻게 봐도 네이버와 하이브의 모습이 겹친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으로 보면 카카오가 시장 내 판도를 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측면이 있지만, IT의 시각으로 보면 웹툰 등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게임 등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 IT기업 카카오가 동일 행보를 걷는 하이브와 맞서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하이브-SM-카카오 인수전의 뒷배경은 IT까지 연결된 것이다.
IT 기자 입장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사건이지만, 아이돌 팬의 입장으로 돌아오면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돌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있는 자본의 힘이 더 돋보이는 상황에서 과연 SM은 갖고 있던 독특한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이브 측은 SM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밝혔으나 팬들의 우려는 그치지 않았다.
케이팝 역사상 큰 사건으로 남을 뻔한 하이브의 SM 인수는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됐다. 열심히 원고를 작성하던 지난 3월 12일, 하이브가 SM 인수 절차를 중단하고 카카오가 경영권을 갖기로 하며 거대한 ‘쩐의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대신 하이브는 카카오와의 플랫폼 협업을 얻어냈다. 이제 SM 팬들은 안도해도 되는 걸까? 당장은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IT 기업들의 전쟁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그 안도감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팬의 입장에서는 그저 SM이 30여 년을 지켜온 SM의 색깔을 지킬 수 있길 바랄 뿐이지만.
성아인은 IT 전문지 〈바이라인네트워크〉의 기자다. 전자상거래와 플랫폼 분야를 취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