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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년 봄마다 밀라노로 향하는 이유

내가 매년 봄마다 밀라노로 향하는 이유

프로필 by 박세회 2024.06.04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앞두고는 흥분보다는 비장한 마음이 앞선다.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르면 2월 말 3월 초부터 디자인 신의 연중 최대 행사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향해 세계적인 가구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패션 하우스 그리고 크고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의 특별 전시와 신제품 론칭 인비테이션들이 메일함으로 쏟아 들어오기 시작한다. 호텔 가격은 3~4배까지 뛰고, 에어비앤비 숙소도 덩달아 피크 프라이스를 기록한다. 밀라네제(밀라노인)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아파트 혹은 게스트룸을 에어비앤비에 올려놓고 이 기간에 밀려드는 전 세계 인파를 피해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도 있다. 바가지 쓰고 싶지 않으면 아예 연말 혹은 그전에 미리 숙소를 예약하거나, 여러 명이 그룹을 조직해 집 전체를 빌리는 것이 경제적이다. 10년 이상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관하다 보니 이 정도 노하우는 이제 훤하다.
매년 4월 밀라노는 도시 전체가 고밀도로 응축된 동시대 산업디자인의 결정체가 된다. 로 피에라라는 거대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는 대규모 가구박람회인 ‘살로네 델 모빌레’를 필두로 밀라노 전역에서 1000여 개에 달하는 장외 전시가 한꺼번에 개최되며, 전 세계에서 업계 관계자들과 바이어 그리고 관람객이 모여든다. 올해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중 이 도시의 방문객 숫자를 완벽하게 카운트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다만 살로네 델 모빌레 주최 측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방문객 수는 지난해보다 17.1% 증가했으며 무려 36만 명이 넘는 인원이 입장 개찰구를 통과했다고 한다. 시내에서 펼쳐지는 전시를 보는 인원까지 추산하면 50만~60만 명은 훌쩍 넘지 않을까? 그러니 도시는 복작복작 발 디딜 틈은 겨우 있지만, 맛있는 식당을 찾아갈 여유까지는 없는 지경에 이른다.
올해도 각 브랜드별 프리뷰 일정 그리고 읽기도 어려운 개최 장소의 주소까지 빼곡히 채워 넣은 엑셀 스케줄, 매일 섭취할 비타민과 영양제 그리고 가장 편한 스니커즈를 챙겨 고밀도의 한 주를 보낼 채비를 마치고 밀라노에 도착했다. 첫 일정은 로사나 올란디(Rossana Orlandi) 갤러리로 스타트를 끊었다. 밀라노 디자인 신의 대모인 그녀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캐릭터의 상징이 된 오버사이즈 화이트 프레임 선글라스를 낀 채 첫 손님들을 맞았다. 2002년 어느 버려진 공장을 개조해 디자인 전문 갤러리로 문을 연 이래 그녀는 수많은 신진 디자이너를 발탁하고 배출했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은 네덜란드나 이탈리아의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한국 디자이너들을 주목해 발탁했는데,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희원, 박원민 작가가 여사의 심미안에 들어 로사나 올란디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두 번째 행선지는 디자인 큐레이터로 오래 일해온 스튜디오 베데(Studio Vedèt)의 발렌티나 추피(Valentina Ciuffi)가 2018년 시작해 올해 일곱 번째 에디션을 진행하며 밀라노 디자인 위크 중 가장 핫한 디자인 플랫폼으로 등극한 알코바 밀라노(Alcova Milano)였다. 이들은 옛 군인병원, 버려진 도축장 등 해마다 어쩌면 이런 장소를 찾아냈는지 혀를 내두르게 하는 기발함과 전 세계 크고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와 브랜드를 유치하는 실력으로 일주일 동안 9만여 명의 관람객을 이끄는 기염을 토한다. 올해 두 곳의 건축적 랜드마크, 빌라 보르사니(Villa Borsani)와 빌라 바가티 발세키(Villa Bagatti Valsecchi)를 전시 장소로 낙점했다. 건축가이자 테크노(Tecno) 가구 창립자인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건축한 빌라 보르사니는 밀라노 최고의 현대식 주택 중 하나로 일컬어지며, 마찬가지로 빌라 바가티 발세키는 19세기의 부유한 가문의 여름 저택으로 사용된 곳이다. 이 중 특히 바가티 저택의 정원을 거닐다가- 아무런 안내 표지판이 없어 지나칠 뻔했던- 벽돌로 만든 이탈리아의 옛날 아날로그식 냉동고에서 펼쳐진 건축가 준야 이시가미(Junya Ishigami)의 새로운 가구 컬렉션을 만났다. 그는 도쿄의 어머니 집을 새로 건축하며 이곳에 들여놓을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의자, 테이블, 칸막이, 램프 등을 만들었다고 했다. 가죽, 등나무, 목재, 유리, 강철 등의 소재를 활용해 만든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전통적인 느낌이 매우 수려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오래된 저택의 야외 냉동고 속에 놓인 가구 전시라니,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디자이너며 건축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온라인으로 모든 신제품과 전시를 목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내가 왜 이 먼 곳까지 날아왔는지 새삼 절절히 깨닫는다. 그리고 잠시 추억에 잠겼다. 동시대 슈퍼 디자이너로 꼽히는 스페인 출신의 하이메 아욘(Jaime Hayon)을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한 곳도 밀라노였다. 9년 전쯤이었을 거다. 당시도 그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가장 많은 프로젝트를 선보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고, 우리는 프리츠 한센 쇼룸에서 신제품 소파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인터뷰를 위해 잠시 마주 앉은 참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터뷰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대화가 자주 끊겼기 때문이다. “이럴 바엔 우리 그냥 파티를 즐기는 거 어때요? 인터뷰 답변은 나중에 음성 녹음으로 꼭 보내줄게요.” 밀라노의 따스한 오후 햇살 속 주황빛 아페롤 스프리츠 칵테일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지루하고 진지한 인터뷰에 대한 의지가 옅어지고 있었다. 여기는 이탈리아 아닌가! 이후 나는 그와 함께 다른 전시는 어떤 것이 좋았는지, 오늘 이후 일정은 무엇을 볼 예정인지 정보를 나누며 수다를 떨었고, 결국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디자인 수업 때 교과서에 등장하는 그와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 절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그 인연의 기회는 이 시기의 밀라노에 가장 크게 존재한다. 전 세계 디자이너와 관계자가 한 도시에 모여 떠들썩하게 미친 척 축제처럼 즐기는 디자인을 위한 한 주란 그런 것이다. 올해도 수많은 디자이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들이 어떻게 디자인에 접근하고 있으며, 어떤 라이프스타일과 성격을 갖고 있는지, 이는 어떻게 디자인과 연결되는지 직접 만나 대화하고 피부로 느꼈고, 기자로서 이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늘 애쓸 뿐이다.
디자인 위크는 패션 위크처럼 소수의 관계자와 인플루언서들만의 런웨이 쇼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즐겁다. 지난해의 디자인 위크가 팬데믹 이전 버전으로의 복귀처럼 느껴졌다면, 올해는 그야말로 ‘메가 페스티벌’이었다. 인기가 많은 전시의 경우 –대부분 로에베, 생로랑, 에르메스 등 패션 하우스 전시들이 인기가 많다- 2~3시간 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동시대 크리에이티비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한 주가 된다. 트리엔날레에서는 이제 디자인계 전설이자 마치 신선 같은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기리는 전시가 열리고, 시내에서는 일본 디자이너 넨도의 치밀하고도 아기자기한 스케치를 기반으로 하는 신제품 가구가 발표된다. 에르메스에서는 벽돌, 석재, 슬레이트, 목재, 압착한 흙과 같이 가공되지 않은 소재의 본질과 철학을 보여주며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홈 컬렉션을 선보이고, 동시에 이케아 또한 그들만의 민주적 디자인을 풀어내고 있다.
당신을 위한 팁 하나. 밤이면 역사적인 바 바소(Bar Basso)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몰린다. “바 바소를 방문하지 않고서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낮에는 전시를 보고 밤에는 바 바소에서 회포를 풀어야 한다. 1967년 문을 연 후 이제 2세대인 마우리치오 스토케토(Maurizio Stocchetto)가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원래 멤피스 그룹의 멤버들, 에토레 소트사스 스튜디오 사람들 등 디자인계 사람들이 단골로 모이는 바였다. 이제 세계에서 몰려든 디자인 커뮤니티 피플들이 바 내부로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차도까지 점령해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바 바소의 밤 풍경은 디자인 위크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선 네그로니 스바글라토(Negroni Sbagliato)를 마셔야 한다. 원래 캄파리, 레드 베르무트, 진 이 세 가지로 만드는 전통적인 밀라노 칵테일인 네그로니에 실수로 스파클링 와인을 넣어 ‘잘못되었다’는 뜻의 스바글라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 바소의 네그로니 스바글라토를 들고 외친다. 그럼 올 한 해도 우리가 사랑한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에게 건배!

강보라는 <Style H> <현대카드 The Black> 등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거친 에디터로 동시대 디자인과 아트를 주로 다룬다. 현재는 보라컴퍼니를 설립해 해외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국내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Credit

  • WRITER 강보라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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