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돌이 되는 게임의 의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돌이 되는 것 말고는.

프로필 by 박세회 2025.05.05

게임 플랫폼 ‘스팀’에는 <스톤 시뮬레이터>라는 게임이 올라와 있다. 게임 소개 영상을 보면 당혹스러운데, 플레이어가 돌이 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돌은 움직일 수도, 주변 사물들과 상호 작용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돌처럼 땅에 박혀 시간을 보내며 주위 경관을 둘러보는 것뿐이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며 해가 뜨고 지고, 계절과 날씨가 바뀌는 정도는 존재한다.

게임을 실행하고선 그저 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전부인 이 게임에는 ‘이걸 왜 해?’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우리에게 플레이란 일련의 과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상호작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게임의 난이도에 플레이어가 자신의 숙련도로 길항하는 행위가 플레이의 기본인데, <스톤 시뮬레이터>는 이런 상호작용을 배제해놓고 스스로를 게임이라 칭하며 ‘스팀’에 5000원의 가격으로 판매를 걸어두었다.

전통적인 플레이의 전제를 파괴하는 <스톤 시뮬레이터>와 비슷한 게임들이 있었다. 일단 떠오르는 것은 게임 디자이너 데이비드 오레일리가 2014년에 선보인 <마운틴>이다. 이 게임 역시 <스톤 시뮬레이터>의 돌처럼 그저 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인 게임이었으나, 후반부에 산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행위를 요구했다. 에터 스튜디오의 2015년 작 <플러그 앤 플레이> 역시 ‘대체 이 게임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게임이다. 못생긴 플러그가 나오고 이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선 두 게임에 비하면 다이내믹했다. 무언가 클릭해볼 수 있고,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건 <더 롱잉>이다. 지하 동굴 속에서 왕이 깨어날 400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는 것이 핵심인 이 게임은 거의 명상에 가까웠다. 달리 말하면 <스톤 시뮬레이터>는 상호작용의 바깥인 ‘관조’를 향해 가장 멀리 나아간 게임이다.

무언가 해야 하는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게임과 관련한 넓은 의미로 게임과 관련한 모든 행위에서 ‘관조’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대략 세 가지가 생각난다. 첫 번째는 방치형 게임의 방식이다. 방치형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저 게임을 켜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캐릭터가 사냥을 하고 레벨업하는 자동사냥형 게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레이어는 마찬가지로 게임을 ‘관조’하지만, 앞선 실험적 관조와는 달리 여기서는 플레이 행위를 기계가 대리해 플레이어에게 그 결과물인 경험치와 아이템을 받아온다는 데서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는 ‘게임 관람’이다. e스포츠와 게임 스트리밍을 즐기는 행위다. ‘게임을 직접 하지 왜 보느냐’는 말을 듣는 바로 그 행위. 직접 게임을 하기보다 타인의 게임을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선택지. 고수들의 승부를 스포츠 경기처럼 관전하거나, 혹은 스토리텔링이 좋은 스트리머들의 게임 플레이를 구경하며 즐기는 의미의 관조다. 보는 게임으로서의 관조는 사실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단 1980년대 오락실에서도 남의 플레이를 구경하는 갤러리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개념이다. 이때의 플레이와 관조는 행위자가 각각 플레이어, 관전자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앞선 관조와는 다른 관람의 의미를 지닌다.

세 번째 관조가 <스톤 시뮬레이터>를 비롯한 플레이로서의 관조다. 이런 게임들은 직접적 개입이 없는 상황 자체를 플레이로 규정하고 관조 자체를 플레이로 의미 지으려는 의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게임들은 전통적 플레이 바깥에 존재하는 관조가 플레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실험한다. 더 크게는 플레이라는 개념이 갖는 범주를 좀 더 넓히려는 시도로도 간주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관조 게임의 목적은 게임의 지평을 넓히는 일종의 실험이며, 게임 자체의 정의를 위한 게임이라는 점에서 메타적이다.

개입과 상호작용 없는 플레이라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도전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미술의 레퍼런스를 끌어와 볼 수 있다. 현대미술가 이안 쳉(Ian Cheng)은 게임 엔진을 활용한 라이브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에 영상물로 전시되지만 다른 영상물들처럼 녹화된 것이 아니다. 화면 속 움직이는 개체들은 모두 게임 엔진에 의해 인공지능처럼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움직여,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며’ 변화한다. 즉 모든 스토리가 다르고 러닝타임 역시 매번 변화한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인 <BOB>에 등장하는 인공생명체 ‘BOB’는 정해진 각본 없이 AI로 구동하는 주체적 결정에 따라 기어다니거나 잠자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작가와 관객은 작품 속 BOB의 행동과 그 결과에 개입하지 못하며,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그저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안 쳉이 자신의 작품들에 담기는 것이 스토리텔링이 아닌 ‘월딩(Worlding)’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2022년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이안 쳉의 개인전 <세계건설Worlding>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개념은 고정된 서사로서의 이야기가 아닌, 각각의 객체들이 우연하게 관계 맺으며 벌어지는 일 자체에 대한 디자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위치시킨다.

그의 작품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딛고 선다. 그가 만든 작품은 멀티버스의 타임라인을 지켜보는 위치에 관찰자를 둔다. 관찰자, 혹은 주체로서의 관람객은 이 닫힌 세계에선 수동적이다. 실제 세계만큼이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못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세계 인식의 주체로 언제나 인간을 전제해왔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동안 주체에 의해 이해되는 방식으로 인식되어왔던 세계를 객체 그 자체의 존재로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의 관찰이나 개입 없이도 이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안 쳉 작품의 중심 소재다.

현대미술 속 객체들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는 <스톤 시뮬레이터>와 같은 디지털게임에서도 같은 맥락을 통해 나타난다. 관조를 플레이로 삼고자 하는 이런 게임들이 만들어내는 경험은 플레이어, 다시 말해 주체의 개입이 원천 차단된 세계다. 그러나 그 세계는 사진 속 프레임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객체들이 인간의 개입이나 관찰과 무관하게 알아서 작동하고 객체들끼리 상호 작용한다. <스톤 시뮬레이터> 속의 나무와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현실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살아 움직인다. 관조자의 개입 없이도 이미 완전한 어떤 세계가 알아서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관조하는 게임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다.

그렇다면 왜 개발자들은 객체들만으로 작동하고 있는 세계를 그저 관조하는 것을 플레이라고 개념 지으려 할까? 이는 관찰 자체가 이미 개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거론되는 이중 슬릿 실험으로 대표되는 이 개념은 주체에 의한 관찰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현상에 대한 개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게임을 관조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개입이며, 이 개입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플레이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을 구입하고 설치한 뒤 실행하여 화면 안에서 카메라 각도를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플레이어의 행위는 플레이인 것이다.

디지털게임도 어느새 반세기를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올드 미디어가 되었고, 긴 시간 속에서 게임 플레이의 범주 또한 과거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른바 매직 서클(Magic Circle),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상의 시공간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개념이 통용되었다. 그러나 현금으로 아이템을 구입해 가상 세계에 현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오늘날 매직 서클은 동시대 게임에 적용이 어려운 이론으로 취급받는다. 플레이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중이다. 자동사냥이라는 개념이 등장해 플레이어의 숙련도를 서버가 대체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게이머가 ‘이것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게이머들의 바쁜 시간과 부족한 체력 탓에 자동사냥 게임들이 매출 1순위 카테고리에 오르기도 했다.

오늘날 게임들에서 나타나는 관조는 그래서 단순히 ‘개입한다,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다. 관조는 객체지향 존재론과 같은 철학적 변화, 라이프 패턴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플레이 시간의 감소 같은 다양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게임의 지평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별 캐릭터의 몸동작까지를 세밀하게 컨트롤해야 하는 <철권>의 깊숙한 개입부터 거시적 차원에서의 명령만으로 플레이 가능한 <스타크래프트>의 멀찍한 개입을 넘어 <스톤 시뮬레이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개입까지 개입의 정도에 따라 망라할 수 있다. 개입의 깊이는 시대와 상황마다 달라지지만, 어쨌든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와 플레이어가 관계 맺는 방식 전반을 플레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전제 자체는 아직 유효해 보인다. 게임을 생각할 때면, 가끔 기독교의 신을 떠올리곤 한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개입했던 이스라엘의 신이 어째서 지금의 시대에는 조용할까? 어쩌면 신도 이제는 <철권>보다는 <스톤 시뮬레이터>를 플레이하듯이 이 지구를 관조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경혁은 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의 편집장으로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의 연결점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방송 등으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 <슬기로운 미디어생활> <현질의 탄생>등이 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이경혁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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