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안희정의 말은 정치인의 화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 정치,안희정,정치인,문재인

안희정에게 3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2월은 파죽지세였다. 4퍼센트대에 불과했던 지지율이 20퍼센트까지 올랐다. 차기 대선 주자한테 20퍼센트는 의미가 큰 숫자였다. 경선까지 남은 날과 대선 날짜를 고려하면 1위 문재인과의 격차를 뒤집을 수도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이어졌다면 지금 벌어진 판이 좀 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TV 프로그램 출연도 그때 집중됐다. 2월 8일 밤에는 JTBC 에 출연했다. 2월 13일 밤에는 2017 SBS 특별 기획 에 나왔다. 안희정은 대중과 접점이 늘어날수록 호감이 증폭되는 후보인 것 같았다. 다소 추상적인 언어도 특유의 친화력과 솔직함으로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 추상적인 언어에 발목이 잡혔다.2월 19일에 ‘선한 의지’ 발언이 터졌다. 부산대에서 열린 ‘즉문즉답’ 행사에서 안희정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언급했다.“민주주의자로서, 인권주의자로서, 평화주의자로서 이 땅의 헌법에 따라서 대한민국을 잘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곧이어 두 명의 또 다른 전직 대통령에 대해 말했다.“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말줄임표 사이에는 다소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 사이에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다. 곧 박수도 터졌다. 현장 분위기로 봐선 이심전심의 박수로 보였다. 박수가 잦아들자 안희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우리 없는 사람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좋은 정치하시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게 뜻대로 안 됐던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K재단, 미르 재단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적인 대기업들의 많은 좋은 후원금을 받아서 동계올림픽을 잘 치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실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발언 직후 모든 비판은 ‘선한 의지’라는 단어에 쏠렸다. 늘 그렇듯 전후 맥락이나 현장 분위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반어법이었다는 해명도 역부족이었다. 비난에 비난이 이어졌다.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성토가 대단했다. 손혜원 의원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최종적으로는 선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김홍걸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은 “극악무도한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성인군자를 국민이 찾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안 지사의 해명을 믿는다. 다만 안 지사의 말에는 분노가 빠져 있다.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20일에는 JTBC 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했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날의 인터뷰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뉴스룸 대참사’로 불렸다.곧 지지율이 꺾이기 시작했다. 이미 대연정 발언으로 휘청했던 지지율이 이 즈음부터 2주 연속으로 빠졌다. 조사 기관 리얼미터의 결과에 따르면, 직전 20.4퍼센트까지 올랐던 지지율이 3월 첫째 주에 14.5퍼센트까지 추락했다.당시 대선 출마를 시사한 상태였던 황교안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14.6퍼센트였다. 문재인 대표는 35퍼센트를 넘고 있었다. 꾸준한 상승세였다. 문재인 캠프 관계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안 지사의 대연정 발언은 확장 속도에 충분히 제동이 걸릴 만한 이슈라고 봤지만 딱 한 번 지적한 이후 덮어줬다. 이후 ‘선한 의지’ 발언이 나왔는데 그건 안 짚을 수 없었다. 바로 다음 날 우리 후보가 ‘분노가 빠져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한 뒤 사나흘 동안 매일 1퍼센트 안팎이 빠지더라.” 말의 전쟁이었다. 진짜 정치판이었다.그게 다 한마디의 힘이었다. ‘선의 발언’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상대 진영에서 물어뜯기에 오해의 소지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다. 처음에는 ‘소지’였던 것이 계속 물어뜯다 보면 본의처럼 보이게 된다. 정치판에 본의를 헤아려줄 여유 같은 건 없다.말실수 한 번 했네, 하고 넘길 일도 아니었다. 오해가 깊어지면 당사자도 평상심을 잃을 수 있다. 정치인도 인간이니까 당황하거나 스텝이 꼬일 수 있다. 안희정에겐 바로 다음 날 출연한 JTBC 인터뷰가 딱 그런 경우였다.손석희와 안희정이 구사하는 언어는 각기 다른 세계관의 것이었다. 손석희의 언어는 기자의 것이었다. 합리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미르나 K 스포츠 재단이나 선의였다고 주장했는데, 그럼 그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생각하시겠다는 얘긴가요?”그런데 안희정의 대답은 선과 악, 20세기와 21세기의 지성, 의심과 분석과 통섭을 넘나들었다. 옳은 얘기로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았으나, TV 인터뷰에 출연한 정치인의 언어는 아니었다. 여전히 추상적이었다. 또다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쐐기를 박았다. 안희정이 말했다.“저는 정치인으로서 발언을 한 것입니다. (중략) 주장의 이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다. 트위터에선 “안희정 어떡해...” 같은 멘션이 줄줄이 올라왔다.주장의 이면까지 갈 일이 아니었다. 의도는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예가 잘못됐다고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이튿날 안희정은 그렇게 했다. 인터뷰 바로 다음 날 광주에서였다. 그는 말했다.“선한 의지 등의 발언으로 광주전남시도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에 대해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 (중략) 선한 의지든 대연정이든 민주주의 대원칙에 대한 소신이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설득하고 지지하도록 노력과 대화도 계속해 포용하는 것이 선의다.” 같은 날 서울에서도 사과했다. “제 예가 적절치 못한 점은, 마음 다치고 아파하시는 분들 많다. 그런 점은 죄송하게 생각한다. (중략) 국정 농단에 이르는 박 대통령 예까지 간 것은 많은 국민들께 이해 구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과와 해명은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어졌다. 6.7퍼센트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은 다시 16.8퍼센트까지 올랐다. 지속적인 사과와 진심이 통했다는 분석이 있었다. 박근혜 파면과 대선 출마를 포기한 황교안 권한대행의 지지층을 일부 흡수했다는 분석도 있었다.3월 14일 즈음에는 “대연정 정면 돌파한 안희정의 뚝심, 지지율 상승세”라는 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지율 추이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단단해지라고 밟히는 과정. 아주 심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일단 퍼진 말은 통제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말이 실시간으로 기사가 됐다. 말은 글이 되는 순간 또 다른 생명을 갖는다. 말의 속성이다.기사는 기자의 관점에 따라 제각각이고, 독자의 관점에 따라 다시 제각각이 될 수 있다. 글의 속성이다. 한 명의 말이 글로 되고, 그 글이 다시 불특정 다수의 생각이 되고, 그 생각이 다시 말로 전파되는 일. 예측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무수한 개인과 개인이 참여해 말로 연결되는 것이 민주정치의 바탕일 것이다. 하물며 탄핵 정국에서 대선 정국으로 바로 이어지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박살 난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하려는 2017년 봄에는 더더욱. 안희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면, 그 놀이동산의 핵심 동력은 ‘선한 의지’라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또한 그의 선한 의지였을 것이다.그래서 안희정한텐 잔인했던 3월이야말로 정치인의 말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말로써 사상을 던지고, 오해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받아들여질 때까지 거듭 사과했다.결국 통했다. 그 추상적이었던 말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게 소통이었다. 정치인의 말과 시민의 반응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건 지지율이었지 사상이 아니었다.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말, ‘사과드린다’는 말 한마디를 몰랐던 정치인이 대통령이었던 지난 4년이 끝날 무렵에 벌어진 일이었다. 윤태영이 쓴 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말이 소개돼 있다.“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조기 대선일이 5월 9일로 확정됐다. 말의 전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추상적인 말과 구체적인 말, 말이 아닌 말과 통하는 말이 규칙도 없이 난무할 것이다.언뜻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혼란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속성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혼란을 그대로 두고 받아들이지 않고, 윽박지르면서 통합하려는 말은 위험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진짜 혼란은 난무하는 말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꾹 다문 입에 있다는 걸, 그게 진짜 질서를 망친다는 걸 경험해서 안다.누가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인가는 그들의 말에서 드러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통제할 수 없는 흐름 그 자체가 민주정치일 것이다. 말이야말로 정치인의 모든 것이다. 새로운 흐름의 중심이자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