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팬데믹으로 인간이 사라지자 변화된 세계의 모습

생태계적 시선으로 바라본 팬데믹 현상.

BYESQUIRE2020.06.04
 
 

인간이 물러서자 벌어진 일 

 
그전에는 운동하고 바람 쐬러 산책을 나갔다면 이제는 발견을 기대하며 집을 나선다. 쌍안경을 들고 갈까 말까 문간에서 잠깐 망설이기도 한다. 무게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거까지 들고 나가면 너무 찾는 데 집중한 나머지 산책의 정신이 흐트러질까 봐. 그만큼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길에서 뭔가를 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기대치조차 실망보다는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원래부터 겁이 없던 다람쥐들은 거의 당연하다는 듯 대놓고 볼일을 본다. 지난번에는 넓은 공터에 진입하는 순간 나뭇가지에 황조롱이가 살포시 내려앉았고, 그 얼마 후에는 새매 한 마리가 뒷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텅 빈 시내에 오랜만에 나가봤더니 웬 청둥오리 부부가 보도블록을 유유히 거닐며 쇼윈도를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오래간만에 나왔는데 닫은 곳이 많아 좀 못마땅한 자태였다. 제법 덩치 있는 동물도 나타난다. 한적한 골목길의 수풀이 흔들거리길래 숨바꼭질하듯 이리저리 살펴보다 보니 작은 사슴인 문착(muntjac)이 튀어나왔다. 방해받은 것은 싫었겠지만 자리를 떠나는 행색이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다.
팬데믹이 터질 때 있던 곳이 영국이라 나는 그곳의 동물상에 노출되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평소 보기 어렵던 동물들의 대거 출현. 웨일스의 마을 란드두드노 시내를 누빈 야생 염소 떼, 방콕 한복판에서 패싸움을 벌인 원숭이들, 캐나다 주택 뒷마당을 찾은 야생 고양이 보브캣, 뭄바이 강가를 분홍빛으로 물들인 홍학 떼. 개인적인 하이라이트는 지인이 직접 찍어 보내준 남아공 케이프타운 거리를 걷는 아프리카 펭귄 삼총사의 동영상.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해서 옆구리에 민증이라도 끼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곳은 잠재적 서식지이고 모든 자원은 찾는 이가 있다. 생태학에서는 크게 밀도 의존적 변수와 비의존적 변수를 구분할 만큼 밀도가 핵심 개념이다. 기본적으로는 동종을 두고 하는 얘기지만 경쟁 관계에 있는 존재라면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생물의 밀도에 따라 분포 양상이 달라진다는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럼 지구상에 세상 모든 생물과 극심한 경쟁 관계에 있는 유일한 종은? 인간이다. 공간을 전부 점유하고, 타 생물의 이동을 제한하고, 자원을 독식하는 의미에서 인간이 나머지 전체에 일방적으로 공포한 경쟁 관계이다. 그 한 종이 한발 물러서는 효과는, 그래서 상당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 나오질 않자 생겨난 건 생태적 진공이다. 뜸해진 왕래, 줄어든 교통, 둔화된 교란. 가장 요란하게 세상을 차지하던 생물의 존재감이 약해진 징후가 여태까지 주변부로 밀려났던 생물에게 포착된다. 평소에는 발길에 치일까 봐 탐색할 생각도 못 한 길거리도 어느덧 기회의 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있던 애들이 없어졌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생태계의 물리적 틀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주요 일원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면 그가 부여하던 생태적 압력이 거두어진다. 그러면 그동안 그 종의 압도적인 활동에 눌려 번식과 섭생이 제한되었던 다른 많은 생물에게 생태적 기회의 균등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효과이다.
우리는 동물들이 대담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성격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는 일관된다. 환경이 달라지지도 않았는데 버젓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한산해진 틈을 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생태적 진공을 채움에서도 마구잡이로 달려들지 않는다. 생태학의 기초 이론인 이상적 자유 분포 모델이 예측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자원의 양에 따라 그에 맞는 수가 모여들고, 어디가 이미 너무 북적거리면 다른 곳을 찾는다. 삶의 조건이 갖춰진 만큼의 생명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토록 많은 인간이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삶의 조건을 인간 본위대로 차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진짜 사라진 것도 아니고 잠깐 한발 물러선 효과가 저 정도라는 건, 76억 명이 가지는 존재감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력을 실감하게 만든다. 지구의 육상 면적 중 사막과 빙하처럼 생명이 살기 어려운 땅을 제외한 나머지 면적의 절반 이상이 인간이란 한 종이 살거나 먹을 것을 기르기 위해 쓰는 땅이다. 외계인 생물학자가 조사차 지구에 왔다면 이 상황을 목도하고서 지구에 인류가 ‘창궐’하고 있다는 표현을 써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바이러스에 시달리다 보니 바이러스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항간에 이런 주장이 떠돌기도 한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바로 우리가 바이러스 아닐까?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야말로 실은 진짜 ‘악성 바이러스’인 인간을 없애는 백신이고? 특히 마구 증식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늘리면서 숙주를 죽음에까지 몰고 가는 걸 보면 유사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미 다양한 재난 영화를 섭렵한 덕에 얻게 된 풍부한 종말론적인 상상력으로 이번 사태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근성이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바이러스가 아니고 바이러스가 곧 백신일 순 없으므로, 위 말을 참 또는 거짓을 판단해야 하는 정언명제로 여기는 것은 부적절하다. 당연히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니라, 말에 담긴 함의를 살펴보는 쪽이 맞을 것이다.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는 아니지만 자기 조직적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는 것이 가이아 이론의 요체인 것처럼 말이다. 사실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 때문에 지구가 힘들다는 것도. 그리고 우리의 쇠락이 지구와 자연의 번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구가 어떤 주체로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자연의 균형과 작동의 원리는 어떤 주체적 시각과 무관하며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힘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구현된다. 그런데 그 광대한 관계망을 이루는 한 가지 기본 원리는, 바로 한 생물이 번성하면 그에 상응하는 생태학적 인과응보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을 위협할 만큼 한 종의 수가 불어나면 어느 시점부터는 그 종 자체가 하나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종을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생명체나 비생명체의 입장에서 말이다. 가령 바이러스 말이다. 어딜 가나 인간뿐이고 인간 외의 것은 다 제거하고 나면, 인간 또는 인간의 시스템에 착안하고 적응한 존재가 뒤따라 급부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바이러스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블루오션이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직접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며 코로나바이러스는 지구의 백신이 아니다. 하지만 각각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모두가 보다시피 우리도, 코로나도바이러스도 아주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Who’s the Writer?
김산하는 야생영장류학을 전공한 동물행동생태학 박사로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이며 집필과 환경 운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