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마음속엔 미디어가 주입한 도시의 심상이 있다. <애틀랜타>를 본 사람이라면 그 도시의 모든 흑인이 힙합 뮤지션이거나 힙합 뮤지션의 친척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8 마일>을 본 에미넴의 팬이라면 디트로이트 다운 타운에 발만 디뎌도 총을 맞을 수 있다며 두려워할 것이다. 유튜브로 샌프란시스코 랜선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 소굴이 되었다고 여길 테고, 라스베이거스가 여러 영화에서 다뤄진 방식을 생각하면, 그곳이 지난 20년 사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거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다음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기 직전, 우리가 그동안 발견한 미국의 다섯 도시의 조금 다른 실상을 기록하기로 했다.
ATLANTA
60대 이상 장년들에겐 전설 같은 영화가 있다. 남북전쟁 시기 애틀랜타를 주무대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다.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주연으로 1940년 아카데미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등 10개의 상을 휩쓴 명작이다. 얼마 전 LA를 오가는 델타항공 기내에서 그 영화를 다시 봤다. 소싯적 두세 번 본 영화라 다 아는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애틀랜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요소요소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영화는 1936년 출간된 마거릿 미첼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애틀랜타엔 마거릿 미첼 기념관도 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 주인공의 절절한 연심(戀心)과 분투가 이야기의 중심축이지만, 이제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전후 애틀랜타 사람들의 풍속과 사고방식, 특히 북부와의 전쟁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탄 집과 황폐화한 농장, 하루아침에 부랑자 천지가 된 애틀랜타 분위기도 더없이 생생했다. 영화에도 묘사됐듯이 당시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가는 주역이라 생각했다. 반면 신흥 공업 중심지인 뉴욕, 시카고 등 북부 사람들을 ‘졸부’ 내지 ‘상것’이라 여기며 내려다봤다. 남북전쟁이 났을 때 진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인들 사기도 현저히 높았고 주민 응원도 대단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초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부는 무릎을 꿇었다. 낮잡아봤던 북부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다. ‘물질적 열세로 지긴 했지만 도덕이나 정신은 여전히 우위에 있다’며 위안 삼았으나, 그렇다고 구겨진 자존심이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북군을 이끌고 애틀랜타를 공략한 사람은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었다. 그의 초토화 작전은 무자비했고 애틀랜타는 그야말로 잿더미가 됐다. 찰스턴이나 사바나 같은 미국 동남부 옛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민지 시대 또는 개척 시대 옛 건물이 애틀랜타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애틀랜타라는 도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북전쟁 말고도 꼭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1950~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다. 애틀랜타 어디를 가든 남북전쟁 흔적이 남아 있듯, 흑인 민권운동 관련 기념관이 널려 있다.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흔적들도 마찬가지다. 킹 목사는 애틀랜타가 배출한 2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하나(나머지 한 명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다. 애틀랜타 도심 한복판엔 그의 기념관이 있다.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킹 목사 생가와 그가 목회했던 에벤에셀침례교회, 킹 목사 부부 묘소가 함께 있어 연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애틀랜타 필수 관광 코스 겸 참배 코스가 되었다. 애틀랜타가 ‘민권운동의 메카’로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애틀랜타가 과거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유독 더 심했던 지역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애틀랜타를 비롯한 남부 흑인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온갖 유무형의 차별 속에 살았다. 남북전쟁 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있던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향수가 원인이었다. 비록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행되는 편견과 홀대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치고 적어도 법적인 평등을 이뤄낸 것이 킹 목사가 앞장선 민권운동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차별에 맞서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운 흑인들이 있었다. 흑인들에게는 빈곤, 게으름, 범죄 같은 부정적인 선입견이 따라다녔다. 사실 이 선입견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번듯한 직장을 못 갖고, 범죄에 쉽게 노출되고, 그래서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굴레에 허덕이는 탓이다. 조지아주는 전체 인구 1100만 명 중 흑인이 30%나 되는 주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애틀랜타는 ‘흑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도시 중 가장 성공적인 남부 도시’로 꼽힌다. 이곳은 흑인들의 교육 수준과 전문 직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애틀랜타 시장도 흑인이고, 연방상원의원 두 명 중 한 명도 흑인이다. 지방정부나 관공서의 요직에도 흑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도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공항에도 직원 대부분이 흑인이다. 애틀랜타에서 2시간 거리에는 조지아 기아자동차 공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백인 우월주의가 떠오르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에 있으면서도 ‘블랙 컬처’의 주요 무대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데에는 이런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애틀랜타 흑인들에게 자신들이 ‘조지아 성장 발전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이유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설파했던 것처럼, “능력이나 인격으로 판단해야지 피부색으로 예단해선 안 된다”는 실제적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범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간혹 애틀랜타가 흑인이 많은 지역이라는 이유로 내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당연히 아무 문제 없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주말마다 애틀랜타 곳곳을 누비는데,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스톤마운틴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집단 KKK의 활동 본거지로 악명 높았던 그곳은, 이제 인종을 망라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곳이 되었고, 도심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주말 아침에는 거의 절반이 흑인이다. 스톤마운틴에서 그 사실을 떠올리면 애틀랜타가 정말 빨리 변해왔다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남북전쟁으로 무너지고, 인종차별로 무시받던 애틀랜타였지만 지금은 미국 어느 곳보다 활기가 넘친다. 우선 산업과 경제가 그렇다. 코카콜라, 델타, 홈디포 등 세계 최대 기업들이 애틀랜타에 대거 포진해 있고 AT&T, UPS, 록히드 마틴 등 미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기업도 애틀랜타가 뿌리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핫한 패스트푸드 브랜드라는 칙필에이도 빼놓을 수 없겠다. 조지아주 전체로 보면 2024년 현재 미국 50개 주 중에서 GDP 순위 8위까지 올라갔다. 20~30년 전만 해도 농업 중심의 한적한 시골이었던 것을 돌아보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다. 경제가 받쳐주니 사람도 몰리기 시작했다. 2024년 현재 메트로 지역을 포함한 애틀랜타 인구는 650만 명이 넘는다. 휴스턴, 댈러스, 마이애미 등과 함께 6~7위를 다툰다. 1900만 명의 뉴욕, 1200만 로스앤젤레스, 900만 시카고는 아직은 ‘넘사벽’이지만,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4~5대 도시로까지 성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사람이 몰리는 데는 경제성장 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비와 생활비다. 한때 폭력, 살인 등으로 악명 높은 범죄도시 이미지가 거의 사라진 것도 사람들이 이 도시를 선호하게 된 이유의 하나이며, 도시 전체를 둘러싼 숲과 나무, 산과 호수 등의 자연경관, 사계절을 가진 연중 온화한 날씨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산불, 지진, 토네이도,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가 없다는 점만 봐도 외지 사람들이 애틀랜타를 매력적으로 느낄 이유는 충분하다. 한인 이민 사회 성장 속도도 빨라서, 한인 인구도 15만 명에 도달했다. LA, 뉴욕을 잇는 미국 내 세 번째 한인 도시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정치 측면에서도 미국 최고의 ‘핫 스폿’으로 떠올랐다. 애틀랜타 연방의원 자리는 오랫동안 공화당 텃밭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방상원 두 자리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모두 민주당이 가져갔다. 지난 대선전도 뜨거웠다. 공화 민주 양당이 모든 화력을 쏟아부었고, 트럼프도 해리스도 애틀랜타 공략에 진심을 다했다. 그들의 잦은 유세 방문으로 길이 막히고 교통이 통제되는 불편을 겪었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그리 싫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마도 그만큼 애틀랜타 위상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애틀랜타에서 산 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그전에는 뉴욕에서 6년, LA에서 13년을 살았다. 한때 남부 제국(The Empire State of the South)의 수도로 불릴 만큼 번성했던 이 지역에서 나는 ‘160년 전 이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겪었던 마음속 상처와 응어리가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 화려했던 도시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지만 다시 일어섰고, 1950~1960년대에는 미국 현대사를 바꾼 흑인 민권운동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또 최근 10여 년 동안은 힙합 음악을 비롯한 흑인 문화에서 주요 무대가 된 것이 애틀랜타의 이미지를 바꿔놓기도 했다. 이런 격동의 역사를 품고 있다 보니 내가 애틀랜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관심 분야에 따라 그가 알고 있는 애틀랜타는 완전히 다른 도시일 것이므로. 아무튼 애틀랜타는 또 한 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미국의 변방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미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까지 떠올랐다. 앞으로 이 도시가 과거의 영화를 얼마나 재현할 수 있을지 눈여겨보는 것도 애틀랜타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일 테다.
Who’s the Writer? 이종호는 애틀랜타 중앙일보의 대표다. 한국, 뉴욕, LA 중앙일보에서 이력을 쌓았으며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 <조지아, 그곳이 걷고 싶다>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Stone Mountain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암석으로 이뤄진 해발 513m의 돌산. 로버트 리 장군 등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을 이끌었던 최고 지도자 3인의 기마상이 거대한 북쪽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한때는 KKK단의 본거지로 악명 높았고, 현재는 애틀랜타 최고의 명승지이자 시민들의 산책지다.
Atlanta History Center
남북전쟁 관련 기록과 폐허가 된 애틀랜타의 회생 과정을 생생하게 살려놓은 미국 최대 역사박물관이자 연구소다. 1996년 올림픽 개최 이후의 애틀랜타 발전상도 잘 정리되어 있으며, 특히 인접한 스완하우스는 1920~1930년대 미국 남부 부유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명소다.
Duluth Korea Town
다인종 다민족 도시로 탈바꿈한 애틀랜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꼽힌다. 특히 애틀랜타는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후 뒤늦게 조성되어 그런지 여타 인종의 많은 관심을 받는 편이며, 그만큼 한인타운에도 K팝, K푸드, K컬처를 즐길 수 있는 시설들이 잘 발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