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필연이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인간 노무현의 정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 책,독서,노무현,대통령,도서

다큐멘터리 영화 를 봤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정치인 노무현이 거기에 있었다.1998년 보궐선거에서 금배지를 달아준 종로를 떠나 2000년 총선에서 불리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부산에서 출마했던 때다. 노무현은 낙선했다.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은 이때 붙었다.지역 구도 타파를 위해 정치 생명을 걸었던 노무현의 선택은 3년 뒤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원동력이 됐다. 2000년 4월 총선 패배는 대통령 노무현의 시작이었다.다큐는 생경했다. 노무현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기보다는 노무현에 대한 감상적 향수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객석에서는 생전의 노 대통령 모습을 보며 훌쩍이는 사람 천지였다.박근혜라는 실패한 대통령을 잉태한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가 떠올랐다. 민주화 세대가 지닌 노무현 향수에도 경계심부터 일었다. 스스로도 노무현 향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009년 5월 말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노재가 거행될 때 그곳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걸어 나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행인 한 분이 휴지를 쥐여줄 정도였다.그래서 두려웠다. 노무현이란 정치적 감정을 냉동시켜버렸다. 이명박 시대와 박근혜 시대에 노무현 같은 바보가 될 자신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는 오랫동안 읽히지 못한 채 책장에 꽂혀만 있었다. 노무현을 직시할 자신이 없었다. 의 흥행 돌풍을 접하고 촛불 광장에서 노무현 향수가 퍼져나가는 걸 느끼면서 이제 를 대면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유시민의 손에 의해 대신 쓰인 자서전 는 대통령 노무현 이전의 인간 노무현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 담겨 있었다. 엄밀히 노무현의 일생을 정리한 자서전이라기보다는 노무현의 생각을 담은 사상집에 가까웠다. 노무현의 생각 하나하나는 상식적이었고,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여전한 화두였다.“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 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노무현은 이때 이미 경제 민주화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었다.노무현 정권은 실패했다. 오만하게도 지지자들에 대한 반응성과 책임감을 팽개쳐버렸기 때문이다. 집권 중반의 이라크 파병과 집권 후반기의 대연정 제안과 집권 말기의 한미 FTA 추진은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스스로의 지지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자해 행위였다.줄곧 노무현 대통령은 실패했기에 정권을 빼앗겼다고 평가해왔다. 를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노무현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노무현은 패배한 것이었다. 자신의 한계와 상대의 반칙 탓이었다.저자 유시민도 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썼다.“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반칙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대한민국을 그런 믿음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 믿음이 국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노무현이 대통령일지라도 그 시대는 노무현 시대일 수 없었다. 그는 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시민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그 꿈을 모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는 생명을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노재에서 왜 그렇게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는지 비로소 납득이 갔다. 한낱 대통령이 아니라 어쩌면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던 세상을 꿈꾸다 패배하고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었다. 우리 모두 한때 그와 같은 푸른 꿈을 꾸었기에 그의 죽음에서 우리의 일부가 죽었다고 느꼈던 것이다.를 보면서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에서 노무현은 유세가 끝난 다음 쫓아오는 동네 꼬마들한테 일일이 사인을 해준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저 애들이 내 사인을 가져가서 뭐에 쓰겠습니까. 버리삐겠지. 그래도 사인을 해주는 건 어린아이들일수록 작은 바람이라도 이뤄지는 걸 자꾸 경험하게 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소망이 이뤄져버릇해야 세상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자라나게 되니까요.” 인간 노무현은 치열한 삶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눈물 겨운 희망을 심어줬다. 그 희망이 자라나 촛불이 됐고 우리는 다시 진보의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어려운 기회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노무현 시대가 남긴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에 썼던 근조 기사를 다시 찾아봤다.“시인 테니슨은 말했다. 권력은 죽어가는 왕을 망각한다. 권력은 망각해도 우리는 기억한다. 살면서 몇 번의 대통령 선거를 더 경험할 테고 운이 좋다면 한두 명의 영웅을 더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영웅에게 투표를 할 때마다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준 누군가를 기억할 거다. 노무현이란, 내 인생의 첫 번째 대통령을 말이다.”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