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컬라 라이하니 / 한빛비즈 강한 자만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특히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도 자주 접했다. 선의를 베풀면 결국 돌아오는 건 손해라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 냉혹한 이기주의야말로 성공적인 유전자 자질인 걸까? 이 책은 제목만 봐서는 〈이기적 유전자〉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도킨스의 추천사를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협력의 유전자〉는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 정립하고 생태계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협력의 사례를 훑는다. 최대 목표인 ‘유전자 남기기’를 위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 기계’들은 항상 협력한다. 협력이야말로 유전자 보존을 위한 진짜 ‘이기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고도의 사회성이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다. 위선보다는 악한 게 낫다는 인식이 만연한 요즘,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가 협력을 통해 역사를 이뤄왔고 인간의 본능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 더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현유
우춘희 / 교양인 인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고 싶다면 한여름 비닐하우스를 추천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엄습하는데 10분만 움직여도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런 곳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이 있다. 이주노동자다. 특히 깻잎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대표적인 작물이라 이주노동자들이 다수 종사하고 있다. 저자는 1500일간 농촌을 돌아다니며 목격한 것들을 책으로 엮었다. 앞에서는 “이주민노동자 없으면 농사 못 짓는다”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임금 체불과 성추행으로 얼룩진 농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영하 18℃의 어느 겨울날 전기조차 끊긴 비닐하우스에서 숨을 거둔 이주민노동자, 5년간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이주민노동자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 고용주와 이주민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뺏긴 노령의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담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깻잎 논쟁이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진정한 깻잎 논쟁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거쳐 식탁에 올라오는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반성이 먼저 아닐까?
박호준
이나다 도요시 / 현대지성 유튜브의 드라마 요약 콘텐츠는 배우 인터뷰를 앞둔 에디터에게 아주 유용한 발명품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터뷰이의 모든 작품을 제대로 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하나 고백하자면, 한번 그런 식의 감상법에 익숙해지자 이제 인터뷰와 무관한 작품도 요약 콘텐츠로 보게 되었다.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는 이런 변화, ‘배속 재생’ ‘건너뛰기’ ‘몰아 보기’ 같은 선택지가 주어진 후 우리에게 감상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주목한다. 그가 작년 도쿄의 한 대학에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영상을 볼 때 이런 기능을 잘 쓰지 않는다고 답한 학생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시간 가성비가 시대정신이므로, 콘텐츠들이 점점 핵심을 직접 제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작가는 서문에서부터 이런 세태를 질타하는데, 재미있게도 개별 소비자의 이해부터 전문가의 견해까지 샅샅이 취재하는 동안 자세를 고친다. 종국에는 이 ‘리퀴드 소비’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말이다. 그에 맞춰 창작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까지 제시하는데, 씁쓸하지만 역시 흥미롭다.
오성윤
앨리스 먼로 / 문학동네 사랑하는 단편 작가가 하나의 제목으로 엮어낸 두꺼운 책을 보면 팬들은 망설이곤 한다. 내 경우 이반 부닌이 그랬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뤘던 부닌의 단편들을 사랑했지만, 그의 자전적 장편이라는 〈아르세니예프의 생애〉는 끝까지 읽지 못했다. 결국 여러 개의 사랑 얘기를 이어 붙여놓은 자가 연애 미화서 수준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편의 신, 앨리스 먼로는 장편을 쓰지 않은, 혹은 쓰지 못한 작가로 유명하다.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유일한 장편으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이게 정말 장편일까?”라는 의혹을 일으키며 평론가들의 시험대 위에 자주 거론되곤 한다. 작가 자신도 “죽기 전에 장편을 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먼로가 그리워 오래전 사두고 읽지 않은 〈거지 소녀〉를 손에 잡았다. 다 읽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위대한 연작을 쓴 작가가 과연 장편을 쓸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장편이란 대체 무엇인가?
박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