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대략 2045년의 영화 산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

프로필 by 김현유 2023.12.11
 
이건 2045년의 이야기다.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은 메릴 스트립에게 돌아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가 수십 년 만에 다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메릴 스트립도 이제 나이가 구순이 넘었다. 2035년 <맘마 미아! 3>가 은퇴작이었다. 메릴 스트립 증손녀가 그리스로 돌아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메릴 스트립은 그나마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몇 안 되는 배우였으므로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는 주름에 세월의 깊이가 있었다.
나는 감탄했다. 하지만 역시 <맘마 미아! 3>가 이 위대한 배우의 은퇴작이라는 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쩌겠는가. <소피의 선택 2>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2>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맘마 미아! 3>에는 전작에 쓰이지 않은 아바의 덜 유명한 노래들만 계속 나왔던 터라 흥행에도 딱히 성공하지 못했다. ‘Summer Night City’는 좋은 노래지만 아무래도 ‘Gimme! Gimme! Gimme!’처럼 익숙하지는 않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을 때 사람들은 꽤 당황했다. 그래도 그 역사적인 코미디 영화에서 더 뽑아먹을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앤 해서웨이도 장년이 됐다. <뉴요커>에 글을 기고하던 젊고 의기양양한 기자가 잡지가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에 다시 <런웨이> 매거진을 되살리는 임무를 받고 편집장이 된다는 이야기는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어럽쇼. 앤 해서웨이는 속편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미 지난 20년간 오스카를 휩쓸며 당대 가장 존경받는 여배우 중 한 명이 됐다. 개봉한 지 30년이 넘은 영화의 속편에 출연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갑자기 메릴 스트립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메릴 스트립이 <런웨이> 매거진 편집장으로 다시 나온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순이 넘은 배우가? 아니, 안나 윈투어가 진즉에 <보그>를 그만둔 시대에 무슨 소리야?
할리우드는 해내고 말았다. 해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테크놀로지가 있다. AI를 이용한 디지털 특수효과는 2030년대 무시무시한 성장을 기록했다. 2023년 할리우드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의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배우들의 이미지나 목소리는 AI 생성 이미지에 무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규칙도 생겼다. 무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배우가 허락한다면 가능했다. 한 번 발명된 테크놀로지라는 건 아무리 규칙을 정해도 이용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핵확산금지협정이라는 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이란과 북한과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가 새로운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AI도 마찬가지다. 이미 2030년대 초반부터 AI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개봉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2036년 개봉한 브루스 윌리스의 유작이었다. 치매로 언어 능력까지 상실한 그가 아주 잠시 새로운 의학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아 <다이하드 6>의 출연 계약서에 사인해버린 것을 어떠한 변호사도 법정에서 되돌릴 수가 없었다. 마블이 2023년 <더 마블스> 개봉을 시작으로 2030년이 되기 전 완전히 파산해버린 이후로 디즈니는 확실한 캐시카우 IP가 필요했다. OTT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하자 극장용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4>처럼 망막 위에서 직접 작동하는 3D 기술이라도 장착하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극장에 가지 않았다. 카메론은 <아바타 5>에서 집에서도 고글 없이 3D로 볼 수 있는 기술을 선보이겠다고 밝힌 상태다. 물론 <아바타 4>가 개봉한 것이 2045년이니 차기작은 20년 후에나 개봉할 것이다.
<다이하드 6>는 성공적이었다. 브루스 윌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관객들이 모두 극장으로 향했다. 젊은 브루스 윌리스의 연기를 AI로 되살린 새로운 존 매클레인은 새로운 관객들까지 열광하게 하기 충분했다. 사실 나도 좀 울었다. 젊은 매클레인이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피-카이-예이 마더퍼커!”라고 외치는 순간 눈물이 좀 흐를 정도였다. 극장을 나설 때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건 유령이었다. 죽은 배우의 영혼을 스크린에 전시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자본주의적 행태였다. 한 번 시작된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몇 달 뒤 나는 60대 중반이 넘은 맷 데이먼이 새로운 ‘본 시리즈’ 5부작 계약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출연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액션 스타는 사라졌다. 2030년대 할리우드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은 두 개로 쪼개졌다. MZ세대 전후로 나뉜 것이다. MZ세대를 능가하는 새로운 알파세대 이후 배우들은 AI를 이용한 디지털 특수효과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들은 기자회견에 나와 주장했다. “액션 연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AI 배우를 이용해 충분히 액션 장면을 만들 수 있는데 왜 저희처럼 나약한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 배우들이 몸에 와이어를 달고 위험한 액션을 해야 하나요. 저만 불편한가요?” 그 뒤로 배우들은 몸을 움직일 필요도 별로 없게 됐다. 오스카는 애니메이션과 실사 부문을 통합했다.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 부문 시상도 곧 사라질 예정이다. 할리우드 거대 스튜디오들이 AI 작가를 도입하기 시작한 지도 꽤 됐다.
각본가 에런 소킨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음 컬럼비아 픽처스는 그의 대본과 에세이 등을 모조리 집어넣은 AI 작가로 <소셜 네트워크 2> 각본을 완성했다. 미국작가조합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반대 사실을 몰랐다. 작가가 몇 명 남지 않은 탓이다. 얼굴과 몸이 스크린에 나와야 하는 배우와는 달리 작가의 존재는 언제나 일종의 허상이었다. 2020년대 후반 작가들은 끝없이 파업을 벌였지만 누구도 작가 따위에게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페이스북이 종말하게 된 이야기는 결국 죽은 에런 소킨의 대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며 거의 잊힌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의 경력을 되살렸다. 그 이후로 AI 작가를 활용하는 건 더는 막을 길이 없게 됐다. 물론 아직 문학계는 따분한 늙은이들의 영역이라 지나치게 늙은 나이에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가 심장마비로 별세한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이 나오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꽤 재미있게 봤다. 구순이 넘은 메릴 스트립의 젊은 날을 AI 기술로 완벽하게 구현한 결과물은 놀라웠다. 그는 카메라 앞에 단 한 번도 서지 않고 대사만 녹음했지만 2006년의 메릴 스트립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거의 반세기 전보다 깊어진 메릴 스트립의 표정 연기는 일품이었다. 그의 오스카 수상은 많은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다. AI를 활용한 연기가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역사적인 사건이니까 말이다. 시상식에 줌으로만 참석해 “죽은 뒤에도 계속 수상 기록을 세우겠다”고 말한 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차기작이 <죽어야 사는 여자 2>라는 걸 생각해보면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죽어야 사는 여자 2>에는 죽은 골디 혼과 함께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메릴 스트립은 “찍다가 죽어도 계속 찍겠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TMZ에 의해 알려졌다. 역시 명배우는 죽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2045년의 이야기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책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낯선 사람>을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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