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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과거사의 달이었다.
광복절을 앞두고 한 배우가 예능에서 집안 자랑을 했다. 고종의 주치의로 시작해 4대째 이어온 의사 집안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집안의 첫 세대가 일제에 협력한 단체의 간부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소속사는 사실무근이라 했다가 며칠 만에 말을 바꿨다. 광고가 내려가고 방송이 지워졌다.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집안에서 자랑스럽게 내려온 역사를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 소동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전통이라 믿고 물려받은 것 가운데 뿌리를 안 따져본 게 얼마나 많을까. 추석이다. 명절마다 차례상 앞줄에 놓이는 술병부터 들여다보자.
그 술은 전통주가 아니다
」차례상에 오르는 술은 대개 정해져 있다. 마트에서 파는 청주, 아니면 소주다. 그런데 둘 다 전통주가 아니다.
법부터 그렇다. 법에서의 전통주는 둘 중 하나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식품명인이 빚은 술. 아니면 그 지역 농민이 그 지역 농산물로 빚은 지역특산주만이 전통주 취급을 받는다. 대기업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청주는 여기 들지 않는다. 희석식 소주는 말할 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만드는 법이다. 시판 청주는 우리 누룩으로 빚지 않는다. 일본식 누룩인 입국을 사용한다. 만드는 방식이 사케에 가깝다. 소주는 다른 이유로 어긋난다. 소주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증류주다. 그 뒤 한반도에 자리 잡았으니 전통주라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는 그 소주와 완전히 다른 술이다.
우리 전통의 맑은 술인 약주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그 자리에 일본 누룩으로 빚은 술이 전통이라는 이름을 달고 올라간다.
약주와 청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잠깐 짚고 가자. 약주와 청주는 둘 다 쌀로 빚어 맑게 거른 술이다. 다른 건 딱 하나다. 무엇으로 발효시키느냐이다.
약주는 우리 누룩으로 빚는다. 우리 누룩에는 정해진 틀이 없다. 밀로도 띄우고 쌀로도 띄운다. 보리, 녹두, 콩을 섞기도 한다. 둥글게도 빚고 네모나게도 빚는다. 어느 집 어느 계절에 띄웠느냐에 따라 다 다른 누룩이 된다. 그래서 우리 술은 집집마다 맛이 달랐다. 청주는 일본식 누룩인 입국으로 빚는다. 찐 쌀에 균 한 종류만 골라 심은 누룩이다. 일본 사케가 정확히 이 방식이다. 맛이 깨끗하고 고르다. 대량 생산에 좋고 균일한 맛을 내기에 좋다.
이 차이를 법이 숫자로 못 박아 놨다. 주세법상 누룩을 1% 이상 쓰면 약주다. 1% 미만이면 청주다. 그러니까 지금 마트에서 '청주'라고 파는 술은 정의상 우리 누룩이 거의 안 들어간 술이다. 우리 전통주라기보다 일본 사케에 가깝다.
청와대도 틀렸다
」
2023년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 방한 만찬주로 사용된 경주법주 초특선. 원고에서는 일본식 청주 제법과 우리 약주의 차이를 설명하는 사례로 소개한다. / 이미지 출처: 경주법주 홈페이지
이 혼동은 우리 집 차례상만의 일이 아니다. 2023년 5월 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방한했다. 그날 만찬주가 경주법주였다. 대구의 소주 회사가 1973년부터 만들어온 술이다. 입국과 정제효모를 쓰는 일본식 청주 제법이다.
아예 준마이다이긴조 방식이라고 내세운다. 준마이는 쌀만 썼다는 뜻이고, 다이긴조는 쌀을 얼마나 깎았는지를 말한다. 쌀을 깎은 정도로 술의 등급을 매기는 것 자체가 사케의 방식이다. 우리 약주는 원래 쌀을 깎지 않는다. 쌀 겉껍질의 잡질을 누룩이 분해하고, 거기서 복잡한 풍미가 나온다. 깎을 이유가 없다. 일본 총리에게 한국 최고의 전통주라며 내놓은 술이, 사실상 한국에서 만든 사케였다.
해방은 됐는데 술은 아니었다
」
쌀가루를 이용해 밑술을 만들며 집에서 직접 가양주를 빚는 과정. 한때 집집마다 이어지던 우리 술 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이미지 출처: 개인 소장
1909년 주세법이 공포됐다. 술에 세금이 붙기 시작했다. 식민통치기인 1916년에는 주세령으로 이름을 바꿨다. 집에서 술을 빚으려면 면허를 받으라고 했다. 우리 문화였던 가양주가 금지됐다. 순사들이 집집을 뒤졌다. 제사에 쓰려고 빚어둔 술독을 깨뜨렸다. 사람들은 마당 밑에 술독을 숨겼다. 술 빚기는 레시피도 중요하지만, 손에서 손으로 잇는 전승이 핵심이다. 한 세대가 못 빚으니 배울 사람이 사라졌다. 여기에 양곡관리법이 겹친다. 1965년부터 십 년 넘게 쌀로 술 빚는 것을 아예 금지했다. 우리 방식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던 시점에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고 나니 두 세대가 지났다.
주세령은 일본식 맑은 술에 청주라는 이름을 줬다. 조선식 맑은 술은 약주로 갈라놨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맑은 술은 청주였다. 해방 뒤에 고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991년에 청주와 약주를 약주류로 한 번 합쳤다. 2000년에는 국제 규범에 맞춘다며 다시 갈라놨다. 국가가 두 번 손을 댔다. 두 번 다 이름을 돌려주지 않았다.
올 추석, 약주를 올리자
이름을 돌려놓는 건 국가의 몫이다. 우리 몫은 간단하다. 차례상부터 바꾸면 된다.
충주 중원에 자리한 중원당 양조장. 집안 문헌을 바탕으로 맥이 끊겼던 청명주를 복원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 이미지 출처: 개인 소장
충주 중원당의 청명주가 그런 술이다. 청명 무렵에 빚는다고 해서 청명주다. 충주 김해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 빚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맥이 끊겼다. 그 집안의 김영기 씨가 집에 내려오던 문헌을 뒤져 술을 되살렸다. 1993년 충북 무형문화재가 됐고, 2005년부터는 아들 김영섭 대표가 잇고 있다.
구미 선산에서 전통 누룩과 지역 쌀로 술을 빚는 선산주조와 시그니처 술 ‘선산 오리지널’. 오래된 집안 술을 젊은 세대가 다시 이어가는 사례다. / 이미지 출처: 개인 소장
구미 선산의 선산주조는 더 젊다. 2022년에 30대 청년 넷이 세운 양조장이다. 대표의 외가가 선산김씨 집안이다. 오백 년을 이어온 집안의 술이 있었고, 외숙모가 그 방식대로 술을 담그고 있었다. 조카가 2018년부터 그 술을 배웠다. 선산 쌀과 전통 누룩으로 예순 날 넘게 익히는 술이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24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직접 기른 쌀과 손수 띄운 누룩으로 술을 빚는 세종 장군면의 백경증류소. 집안에서 이어온 누룩 빚기 방식을 현대 양조장으로 연결했다. / 이미지 출처: 개인 소장
세종 장군면의 백경증류소도 있다. 한의학 집안에서 나온 양조장이다. 아버지는 누룩을 시장에서 사지 않고 직접 띄우던 사람이었다. 아들은 그 방식을 물려받아 세종에 자기 양조장을 열었다. 자기 논에서 기른 쌀로, 약재 다루듯 직접 띄운 누룩으로 빚는다. 우리의 전통주, 가양주가 원래 이런 모습이었다.
고르는 법은 어렵지 않다. 레이블에 '약주'라고 적혀 있으면 우리 누룩을 더 쓴 술이다. '청주'라고 적혀 있으면 일본 누룩으로 빚은 술이다. 마트 진열대 앞에서는 이 한 줄이면 충분하다.
8월 내내 우리는 남의 집안 뿌리를 따졌다. 9월에는 우리 집 차례상을 한 번 들여다볼 차례다. 이번 추석에는 진짜 우리 술을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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