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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와인보다 먼저, 여름을 건넌 우리 술 과하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을 나기 위해 술에 소주를 부어 빚은 우리 술 과하주. 차게 식혀 한 모금 마시고, 수육과 냉제육을 곁들인 뒤 냉면으로 마무리하는 여름의 선주후면 한 상

프로필 by 기유종 2026.06.26
포트와인보다 먼저 태어난 여름 술, 과하주
  • 포트와인을 마셔본 사람은 많지만, 과하주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두 술은 같은 발상에서 태어났다.
  • 발효가 한창인 술에 소주를 부어 효모를 멈추고 도수를 올린 술. 문헌상 포트 와인보다 더 먼저 우리 곁에 있었다.
  • 차게 식혀 수육·냉제육과 즐기다 냉면으로 마무리하는 선주후면(先酒後麵) 한 상. 여름 과하주의 가장 제대로 된 페어링.

포트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포도주에 브랜디를 부어 도수를 올린 술이다. 일반 와인보다 묵직하고, 도수도 높고 달다. 대항해시대, 와인을 먼 바다 건너로 실어 나르는 동안 변질을 막고 풍미를 지키려던 데서 포트와인이 시작됐다.


한국에도 동일한 발상에서 태어난 술이 있다. 과하주(過夏酒)다. 심지어 더 먼저 태어났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무더운 여름이면 빚은 탁주나 약주가 쉽게 상해 먹기 힘들었다. 쉬는 걸 막으려면 알코올 도수를 올려야 했고 그래서 아직 발효가 한창인 술에 증류주인 소주를 부어 넣었다. 발효는 멎고 도수는 오르고 미처 알코올로 변하지 못한 당이 단맛으로 남았다. 그렇게 여름 한 철을 견디는 술, 이름부터가 '여름을 난다(過夏)'는 과하주가 탄생했다.



600년을 건너온 술

과하주는 생각보다 오래된 술이다. 문헌상 가장 이른 흔적은 알려지기론 ‘태종실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18년 기록에 과하주는 이미 한양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등장한다. 그저 '있던 술'이 아니라 도성 사람들이 찾던 술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 출간된 조선의 거의 모든 주요 조리서가 과하주를 다룬다. 그만큼 오랫동안 널리 우리 곁에 있던 술이다.


포트와인이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방식 발효 도중에 브랜디를 부어 부패를 멈추는 방식을 굳힌 것은 1840~50년대에 이르러서다. 과하주는 그보다 한참 앞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냐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술에 증류주를 섞어 보존하는 발상은 여러 문화권에 흩어져 있어 누구도 최초를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포트와인이 그 방식을 완성하기 한참 전부터 조선의 술꾼들은 이미 고민을 해결했다.



앉은뱅이술이라는 별명

청혼 골드라는 과하주를 선보이는 경기도 용인의 제이앤제이브루어리.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청혼 골드라는 과하주를 선보이는 경기도 용인의 제이앤제이브루어리.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과하주를 마시다 보면 혀에서는 부드럽고 달아 술이 술술 넘어가는데, 몸의 반응은 뒤늦게 온다. 그래서 과하주 별명은 한산 소곡주처럼 ‘앉은뱅이 술’이기도 하다. 차게 식히면 알코올의 날 선 자극은 가라앉고 단맛과 산미가 또렷해지니, 더운 날 여름 저녁에 천천히 음미하기에 이만한 술이 없다. 급히 꿀꺽하고 들이키기 보다, 한 모금씩 건너가며 마실 술이다.


과하주를 한 모금 머금으면 차갑고 입에 달큰하고 쌉싸름 한 맛이 감돈다. 더위에 지친 입에 먼저 부드러운 단맛이 닿는다. 그런데 이 단맛은 감미료의 단맛이 아니다. 발효가 한창이라 당이 아직 많이 남은 상태에서 소주가 발효를 멈추니, 알코올로 바뀌었어야 할 당이 술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중의 과하주는 대개 18도 안팎인데, 이 숫자는 우연이 아니다. 18도는 발효주가 자연적으로 닿을 수 있는 거의 한계 도수다. 효모는 자신이 만든 알코올이 짙어지면 스스로 죽기 때문에, 순수 발효만으로는 18정도가 천장이다. 13~15도쯤 되는 보통 약주와 견주면 과하주의 도수는 확실히 한 급 위다.



집에서 빚는 여름

과하주는 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흉내 낼 수 있다. 전통 방식 그대로는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생약주를 한 병 사서 거기에 부어 냉장실에서 며칠 안정화시키면 가볍게 즐기는 과하주가 된다.


우리서막 WRY의 과하주. 닥종이 망사로 감싼 병에 ‘물, 쌀, 누룩’이라는 술의 재료가 담백하게 적혀 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우리서막 WRY의 과하주. 닥종이 망사로 감싼 병에 ‘물, 쌀, 누룩’이라는 술의 재료가 담백하게 적혀 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몇 가지만 지켜주면 된다. 우선 반드시 단맛이 강한 생약주여야 한다. 살균주는 효모가 이미 죽어 있어 의미가 없고, 효모가 살아 있는 생주여야 그 과정이 산다. 부어주는 소주는 희석식 말고 증류식 소주, 즉 전통 소주를 쓰면 향이 한결 깊어진다. 도수는 약주가 보통 13~15도이니, 40도 안팎의 증류식 소주를 조금씩 더해 18도 언저리로 맞추면 시판 과하주의도수대에 닿는다.


대략 약주 150ML 덜어낸 후, 40도 짜리 소주 150ML를 채워 넣으면 딱 알맞다. 솔직히 말하면, 전통 과하주가 발효를 멈춰 당을 남기는 술인 반면 이 방식은 원래 약주에 남은 단맛에 기대는 것이라 원리는 조금 다르다. 그래도 '여름을 나는 술'의 결을 맛보기에는 충분하다.



다시 빚는 술들

화전일취 백화 18. 옅은 황금빛 술을 도자기 잔에 따라낸다. 색만으로도 차게 식힌 단 술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화전일취 백화 18. 옅은 황금빛 술을 도자기 잔에 따라낸다. 색만으로도 차게 식힌 단 술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요즘은 여러 양조장이 솜씨 좋은 과하주를 내고 있다. 춘천 의암호 곁 지시울 양조장의 '화전일취 백화'가 그 하나다. 쌀로 빚어 소줏고리에 내린 전통 소주를 발효 중인 약주에 더해 만든 18도짜리 과하주로 수십 종의 꽃잎이 들어가 화사한 향이 특징이다. 누룩향에 꽃 향과 꿀 같은 단 향, 마냥 달지만은 않은 산미가 어우러진다.


서울 성동구에는 물·쌀·누룩만으로 술을 빚는 우리서막(WRY)이 있다. 라벨에 한자로 물(水)·쌀(米)·누룩(麴子)을, 영문으로 WATER·RICE·YEAST를 적어 자기 술의 정직한 재료를 그대로 드러낸다. 닥종이 망사로 병을 감싸서 딱 봐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전통의 방식을 동시대의 감각으로 다시 꺼내 드는 곳이다.



선주후면, 여름 한 상

유기에 담긴 평양냉면. 과하주와 수육으로 시작한 여름 한 상은 차가운 냉면 한 그릇으로 마무리된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유기에 담긴 평양냉면. 과하주와 수육으로 시작한 여름 한 상은 차가운 냉면 한 그릇으로 마무리된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과하주는 상에 홀로 오르는 술이 아니라 음식과 어우러질 때 제 가치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과하주만큼 냉면과 잘 맞는 술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있다. 술을 먼저, 면을 나중에. 찬 면부터 들이켜는 대신, 음식에 먼저 술을 곁들여 천천히 입과 속을 달래고, 마지막에 냉면 한 그릇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이 상차림에 과하주가 들어가면 딱 맞는다. 삶은 고기의 담백함과 은근한 기름기를 과하주의 단맛과 옅은 산미가 가볍게 정리해 주고, 18도 도수가 느끼함을 잡아준다. 그렇게 술과 고기로 데워진 입을, 끝에 차가운 냉면 육수가 시원하게 헹궈 낸다. 차게 마시는 과하주와 찬 면의 온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로 이어진다. 여름 한 상으로 이만한 구성이 없다.



한 모금씩, 한 계절씩

과하주는 견딤의 술이다. 발효주의 연약함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서 사람 손으로 도수를 끌어올려 여름을 통째로 버티게 한 술. 그 안에는 더위에 무너지지 않으려는 안간힘과 타협이 함께 들어 있다.

올 여름, 차게 식힌 과하주를 한 잔 마셔보길 권한다. 수육 한 점에 곁들이고, 마지막엔 냉면 한 그릇으로 마무리하는 그 한 상이면 더 좋다. 급히 마실 일이 아니다.


여름을 건너려고 빚은 술이니, 우리도 그 술처럼 서두르지 않고 한 모금씩, 한 계절을 건너가면 되지 않을까?


ESQUIRE CLUB MEMBER
기유종
한의사
웰니스와 주(酒)류 문화 사이를 오가는 한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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