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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처음 가는 사람도 강릉을 안다.
경포대는 교과서에서 외웠고, 커피의 도시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었다. 왜 하필 강릉이 커피인지는 몰라도 그냥 그렇게 안다. 한국인은 강릉을 겪기 전에 먼저 배운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긴다. 강원도에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이 강릉을 그리워한다. 가본 적 없는 도시가 그립다는 게 아니다. 살아본 적도 없는 강릉의 어느 시절이 그립다는 거다. 그게 언제냐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 한다.
신라 모노그램 강릉의 망고빙수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필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성인이 된 뒤로 강원도에서 십 년 넘게 살았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강릉에서 지내다 온다. 그러니 강릉은 그리워할 곳이 아니라 그냥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늘 다시 가는 것 같은. 이 기분에는 이름이 있다.
가보지 않았는데 그립다
아네모이아. 겪어본 적도 없는 시절이 그리운 마음을 이렇게 부른다.
존 케닉이 『모호한 슬픔들의 사전』에 적어 넣은 말이다. 웨일스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히라이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어쩌면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다.
말장난 같지만 근거가 있다. 듀크대의 펠리페 드 브리가드는 회상이 녹화를 되감는 일과 다르다고 말한다. 기억을 꺼낼 때 뇌는 저장해둔 파일을 여는 게 아니다. 그 장면을 그 자리에서 새로 짓는다. 겪은 장면이든 상상한 장면이든 뇌가 쓰는 재료는 같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곳도 기억이 된다. 배우고 듣고 본 게 충분히 쌓이면 뇌는 그걸로 없던 기억을 만들어낸다.
강릉은 그 재료가 유난히 많다.
자판기에서 파리까지
미식가를 설레게 하는 인물 알랭 뒤카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미식가를 설레게 하는 인물 알랭 뒤카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강릉 커피는 카페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1980년대 안목 해변에 커피 자판기가 여든 대 가까이 늘어섰다. 자판기마다 커피와 설탕과 프림 비율을 다르게 맞췄고, 사람들은 몇 번째 자판기가 맛있다며 골라 뽑았다. 브랜드도 바리스타도 없던 시절인데 취향이 그때부터 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강릉 하면 테라로사다.
2002년, 은행원 출신 김용덕씨가 구정면에 테라로사를 열었다. 그런데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는 카페를 연 게 아니라 공장을 지었다. 원두를 볶아 호텔에 납품하는 거로 시작했다. 마시는 자리보다 만드는 자리가 먼저였던 셈이다. 이름부터 커피 공장이다. 강릉 커피가 관광 상품에서 산업으로 넘어간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 뒤로는 흐름이 가속화됐다. 2009년 강릉시가 커피 축제를 시작해 두 번째 해에 삼십만 명이 왔고, 2018년 평창올림픽을 지나며 해안선을 따라 카페가 줄지어 들어섰다. 지금 강릉의 카페 밀도는 인구 만 명당 스물다섯 개. 전국 평균의 두 배다.
그리고 올해 여름, 파리에서 손님이 왔다.
2026년 7월, 알랭 뒤카스가 강릉에 왔다. 지금 살아 있는 셰프 중에 미쉐린 별을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다. ‘알랭 뒤카스 쇼콜라 파리’의 한국 1호점을 냈는데, 그 자리가 강릉 테라로사 커피 공장이다. 매장만 낸 게 아니다. 카카오빈을 고르고 볶고 입히고 굳히는 초콜릿 공정을 전부 강릉에서 한다. 유리 너머로 장인이 손으로 만드는 걸 볼 수 있게 해뒀고, 한국 쇼콜라티에들은 파리에서 배우고 돌아왔다.
해외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올 때 고르는 자리는 정해져 있다. 뒤카스는 압구정, 청담동, 여러 백화점의 본점을 두고 강릉을 골랐다. 그것도 매장이 아니라 공장을. 원두 볶던 자리에서 이제 카카오를 볶는다.
강릉을 테마로 한 초콜릿 시음 코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뒤카스가 만난 건 사십 년이라는 시간이다. 자판기 여든 대에서 파리의 초콜릿까지. 그런데 지금 안목에 줄 선 사람 중에 그 자판기를 뽑아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강릉에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게 아니다. 겪어본 적 없는 사십 년과 만나본 적 없는 파리의 빈투바 초콜릿을 만나러 간다.
웨이팅 없는 백수저
강릉의 미식은 층이 깊고 넓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남정석 셰프의 그린볼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흑백요리사>의 백수저였던 남정석 셰프의 그린볼과 로컬릿이 강릉에 있다. 서울이었으면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닫혔을 이름이다. 강릉에선 그냥 가서 앉는다. 이것만으로도 강릉에 올 이유가 된다.
남정석 셰프의 이탈리안은 채소가 중심이다. 그의 재료 본연을 드러내는 요리와 강릉은 맞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셰프의 강릉 채소를 바탕으로한 한식 베이스의 무국적 음식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주방에만 이십 년 넘게 있었다. 2018년 농부 시장에 요리팀으로 나갔다가 채소로 방향을 틀었다. 강릉에 자리 잡은 것도 우연은 아닐 거다. 강릉엔 산과 바다가 같이 있다. 대관령에서 내려온 채소와 그날 아침 항구에 들어온 생선이 같은 주방으로 온다. 재료가 멀리 안 가는 도시에서 요리가 좋아지는 건 당연하다.
초당동에는 같은 셰프의 로컬릿 피자가 있다. 강릉 재료로 굽는 일인용 피자집이다. 코스에 오르는 접시와 손으로 집어 먹는 피자가 한 사람 손에서 나온다.
로컬 채소를 이용한 그의 여름철 시그니처 음식 / 이미지 출처 : 필자 촬영
로컬 채소를 이용한 그의 여름철 시그니처 음식 / 이미지 출처 : 필자 촬영
갈 때마다 구성이 바뀌는 오마카세 코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회는 또 다른 층이다. 바닷가 도시에 기대할 만한 건 강릉도 당연히 갖고 있다. 다만 결이 다르다. 동해바다샾1971은 오마카세 코스로 낸다.
재미있는 건 갈 때마다 구성이 바뀐다는 점이다. 정해진 차림표를 따라가지 않고 그날 항구에 들어온 거로 상을 짠다. 그래서 같은 집을 두 번 가도 같은 밥이 안 나온다. 서울 일식 오마카세와도 다른 항구 도시 활어회와도 다른 자리에 있다.
시장으로 가면 한 겹이 더 있다. 강릉의 전통시장은 노포만 있는 곳이 아니다. 서부시장이 그렇다. 한 골목 안에 로스터리와 와인바와 방앗간이 나란히 있다. 참기름 짜는 소리 옆에서 원두를 볶고, 그 옆에서 와인을 딴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가게를 냈는데 기존 상인들과 따로 놀지 않는다. 밀어낸 게 아니라 섞였다.
그중 하나가 칸이다. 젊은 셰프가 하는 다이닝인데, 한식을 기반으로 하되 강릉색이 짙은 재료를 쓴다. 서울에선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 코스로도 단품으로도 올라온다. 시장 안에서 먹는 파인다이닝이라는 조합 자체가 강릉답다.
강릉 미식의 구조가 이렇다. 파인다이닝부터 시장 노포까지 층이 다 있는데 그 층들이 따로 놀지 않는다. 나란히 선 게 아니라 겹쳐 있다. 겪어본 적 없는 시절의 시장에서 오늘 만든 요리를 먹는 셈이다.
이십만 명의 도시에 양조장 다섯
강릉의 인구는 이십만 명 남짓이다.
그런데 여기 양조장이 다섯 곳이다. 크래프트 맥주 두 곳, 전통주 세 곳. 인구만 놓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숫자다. 답은 다른 데 있다. 강릉엔 한 해 삼천사백만 명이 다녀간다. 시민 한 명당 백육십 명꼴이다. 이 도시 장사는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는 사람으로 굴러간다.
강릉에 있는 총 5개의 양조장 / 출처: 필자 촬영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2015년에 문을 열었다. 전은경 대표가 강릉의 오래된 막걸리 양조장 방풍도 건물을 그대로 살려 고쳤다. 구조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양조장의 맥을 잇겠다는 뜻이었다. 이름도 거기서 왔다. 한국에 남은 가장 오래된 술 설화의 유화 부인, 곧 버드나무 꽃이다.
쓰는 재료가 전부 강릉이다. 사천 쌀로 미노리 세션을, 솔잎으로 파인시티 세종을, 국화로 바이젠을 빚는다. 창포도 오죽도 옥수수도 들어간다. 경포 DIPA도 있다. 맥주 이름만 훑어도 강릉 지도가 그려진다.
브루어리 바이 현은 2017년에 시작했는데 여기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곶감이나 오미자 같은 과일에서 효모를 직접 배양해 쓴다. 국내에 이렇게 하는 브루어리는 여기뿐이다. 대표 맥주 호랑이 곶감은 강릉 곶감에서 뽑은 효모로 빚는다. 버드나무브루어리가 강릉의 재료를 쓴다면 바이 현은 강릉의 균을 쓰는 셈이다. 대관령필스, 경포바이젠, 청주인 블랑 드 강릉까지 이름은 여전히 강릉이다.
교동 택지에 위치한 브루어리 바이 현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교동 택지에 위치한 브루어리 바이 현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2021년에는 방탄소년단이 겨울 화보를 찍으러 여기 들렀다. 인구 이십만 도시의 작은 브루어리가 그렇게 한 번 세계 지도에 올랐다.
전통주 쪽도 재미있다.
주룩주룩 양조장은 중앙시장 뒷길에 있다. 시장 뒷골목에 점집이 늘어선 걸 보고 강릉 구름신 모시는 신당을 차리자는 데서 출발했다. 술 이름이 하평구름, 소돌구름, 안목구름이다. 강릉 지명 뒤에 구름을 붙였다. 떠먹는 막걸리가 이 곳의 인기 막걸리다.
진정브루잉은 강릉막걸리 벌꺽과 새냉이길 막걸리를 낸다. 이미 애주가들에게는 술 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밸런스가 좋은 약주로 유명하다. 솔향주조는 이 흐름에 가장 최근 합류했다.
강릉의 술은 새로 지은 자리에 없다. 버드나무브루어리는 옛 막걸리 양조장에서 맥주를 빚고, 주룩주룩은 점집 골목에서 구름신을 모신다. 남이 쓰던 자리를 물려받아 다른 술을 담근다. 그러니 강릉에서 술 한 잔 마신다는 건 그 자리에 먼저 있던 것까지 같이 마신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 도시
강릉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모인다. 이 도시가 내주는 건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다.
숫자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민간 연구기관 세 곳이 전국 이백오십 다섯 개 행정구역, 관광지 이만 구천여 곳의 온라인 언급을 훑었더니 강릉이 전국 9위였다. 광역시를 빼면 3위다. 올해 1분기 방문객은 팔백삼십칠만 명으로 작년보다 5.4% 늘었고, 카드 소비는 9.7% 늘었다. 전국 평균 증가율의 두 배가 넘는다. 사람이 더 오는 것보다 더 쓰고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이십만 명이다. 강릉은 사는 사람보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도시다.
한때 심리학은 향수를 병으로 봤다. 지금은 다르다. 사우샘프턴대의 콘스탄틴 세디키디스와 팀 빌트슈트는 향수가 사회적 연결 감과 삶의 의미를 실제로 끌어올린다고 본다. 그리움은 과거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라는 얘기다. 겪지 않은 과거라도 마찬가지다. 뇌에는 지어낸 기억이나 겪은 기억이나 같은 재료니까.
자판기 여든 대에서 시작해 파리의 초콜릿에 닿은 커피. 방앗간 옆에 나란히 선 다이닝. 옛 양조장 건물에서 빚는 맥주. 강릉의 좋은 것들은 하나같이 남이 먼저 쓰던 자리를 물려받았다. 우리가 강릉에서 그리워하는 건 강릉의 오늘이 아니다. 그 자리에 먼저 있던 시간이다.
안목에서 커피 한 잔, 시장 골목에서 저녁 한 상, 옛 양조장에서 맥주 한 잔. 동선은 단순하다. 그 셋이 전부 누가 먼저 쓰던 자리라는 것만 알고 가면 된다.
그러니 강릉에 가는 일은 늘 다시 가는 일이 된다. 처음 가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강릉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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