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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속도를 늦추는 곳
8월은 여름의 열기가 가장 짙어지는 계절입니다. 도시 안에서 휴식을 찾기보다 잠시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장소로 떠나고 싶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차로 약 두 시간, 원주의 산세 깊숙이 자리한 뮤지엄 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지가 됩니다. 자작나무 길과 정원을 지나 워터가든에 도착하면 물 위에 비친 하늘과 붉은 조각, 파주석으로 둘러싸인 건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면 위 붉은 조각과 파주석 건축이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뮤지엄 산 워터가든.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뮤지엄 산을 방문할 때마다 인상적인 것은 작품을 만나기 전부터 관람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안도 타다오 가 설계한 동선은 자연을 한 번에 보여주지 않습니다. 길을 걷고 모퉁이를 돌며 풍경을 조금씩 발견하게 합니다. 워터가든 위에 설치된 알렉산더 리버만의 <Archway>를 통과하는 순간에는 마치 일상과 미술관 사이의 경계를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기다리는 동안 완성되는 것
숯을 중심으로 이배의 작업 세계를 펼쳐 보이는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의 입구.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현재 뮤지엄 산에서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가 열리고 있습니다. 뮤지엄 산 개관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한국 작가 개인전으로, 본관 입구부터 청조갤러리와 야외 공간까지 여섯 개의 공간에 걸쳐 평면, 조각, 설치, 영상 작품을 소개합니다. 전시는 이배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숯이라는 재료를 중심으로 그의 작업 세계를 입체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프랑스어 ‘En attendant’은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순간을 준비하는 능동적인 시간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뜨거운 불을 견딘 뒤 서서히 식으며 숯으로 변화하듯, 이배의 작품에서도 기다림은 소멸 이후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읽힙니다.
숯이 세운 검은 기둥
본관 입구에서는 거대한 숯 조각 <불로부터(Issu du feu)>가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높이 8m, 무게 7톤에 이르는 검은 기둥은 잘게 탄 숯을 겹겹이 쌓아 올린 작품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연을 향해 세운 토템이나 기념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가는 강원도 산불 현장에서 마주한 검게 타버린 나무의 기억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잘게 탄 숯을 겹겹이 쌓아 자연의 생명력과 산불의 기억을 표현한 이배의 <불로부터>.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숯은 불을 통과한 나무입니다. 생명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썩지 않고, 정화와 보호를 상징하는 물질로도 사용돼 왔습니다. 이배는 1990년 파리에서 값비싼 미술 재료 대신 슈퍼마켓의 바비큐용 숯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인 선택으로 발견한 재료에 동양의 수묵과 서예,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더하며 숯을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발전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검은 숯 기둥이 미술관의 석벽이나 주변 나무와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술관 앞에 놓인 조각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이 산속에 존재해온 낯선 생명체 같습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불을 거쳐 다시 자연의 풍경 안으로 돌아온 숯의 시간이 건축과 조용히 겹쳐집니다.
백과 흑, 비움과 채움 사이
흰 종이와 조각, 스테이플러 심으로 완성 전의 가능성과 고요한 여백을 보여주는 <White>.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청조갤러리 1관의 <White>는 이번 전시에서 예상 밖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숯의 작가라는 수식어와 달리 공간을 채우는 것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 종이입니다. 노출 콘크리트 벽을 따라 이어지는 종이와 천장에서 바닥으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곡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조각들이 고요한 여백을 만듭니다.
벽 한쪽에는 약 3만5000개의 스테이플러 심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희미한 연필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물성이 드러납니다. 이 공간에서 흰색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기 직전의 종이, 아직 무엇이 될지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입니다.
커다란 숯 덩어리와 검은 붓질이 입체적인 산수화처럼 이어지는 전시 공간 <Black>.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다음 공간인 <Black>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커다란 숯 덩어리가 산처럼 쌓이고 바닥에는 거대한 검은 붓질이 흐릅니다. 벽면의 회화와 숯 조각, 브론즈로 옮겨진 붓질이 서로 겹치며 입체적인 산수화 같은 풍경을 만듭니다. 비움의 공간을 지나온 뒤 만나는 검은색은 더욱 깊고 밀도 있게 다가옵니다.
숯은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검은 물질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표면마다 서로 다른 균열과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히 같은 검정(Black)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앞에서 한동안 머물다 보면 검은색 안에서도 빛과 시간, 나무가 지나온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붓질이 하나의 풍경이 될 때
청조갤러리 로비에는 숯을 원료로 만든 먹으로 그린 16점의 <붓질(Brushstroke)> 연작이 마주 보며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던 로비가 거대한 회화 사이를 걸어 다니는 전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과 원주의 풍경이 작품 사이에 스며들며, 붓질은 종이 안에 머물지 않고 주변 공간까지 확장됩니다.
자연광과 원주의 풍경 사이에서 작가의 호흡과 움직임을 전하는 이배의 <붓질> 연작.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붓질에는 작가의 속도와 압력, 호흡이 남아 있습니다. 매끈하게 정돈된 선이 아니라 밀리고 흔들리며 때로는 끊어지는 신체의 기록입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추상적인 형태로 보이지만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산이나 물, 바람에 흔들리는 천과 같은 풍경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도 이곳이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화면이지만, 작품마다 서로 다른 움직임과 리듬이 느껴졌습니다. 좋은 전시는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그 앞에서 천천히 바라볼 시간을 허락합니다. 이배의 붓질 역시 정답을 설명하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풍경을 발견하도록 기다려주는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흙 위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
전시 후반부의 <Becoming>에서는 이배가 태어난 경북 청도의 흙과 농부의 아들이라는 작가의 뿌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높이 9m의 화면에는 청도의 논에서 붓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투사되고, 그 앞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약 14m 길이의 구조물이 놓여 있습니다. 전시가 이어지는 동안 흙 위에서는 식물이 자라고 계절에 따라 다시 사라집니다.
작품은 완성된 상태로 정지하지 않습니다. 빛과 온도, 관람객이 방문하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해갑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고 결과를 기다리듯 작가 역시 작품을 통제하기보다 자연이 스스로 변하는 시간을 지켜봅니다. 전시의 제목인 ‘기다리며’가 가장 선명하게 이해되는 지점입니다.
숯이 불을 거쳐 만들어진 물질이라면 흙은 새로운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검게 탄 나무와 식물이 자라는 흙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시장 안에서는 하나의 순환으로 연결됩니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작품을 따라 오래 남습니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하루
원주의 산세와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전시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는 뮤지엄 산 카페테라스.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뮤지엄 산의 장점은 전시 관람이 끝난 뒤에도 경험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건물을 나서면 작품 사이에서 바라보았던 산과 하늘이 다시 실제 풍경으로 이어집니다. 전시장에서 보았던 붓질과 숯의 형태가 구름과 능선,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시 관람을 마친 뒤 자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즐기는 카페테라스의 가벼운 식사.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카페테라스에서는 물과 산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습니다. 수면과 이어진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나 가벼운 식사를 즐기다 보면 전시에서 만난 이미지와 감정도 천천히 정리됩니다. 빠르게 이동하며 여러 장소를 방문하기보다 하나의 공간에 충분히 머무는 하루. 그것이 여름의 뮤지엄 산을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짙은 녹음과 푸른 하늘 사이에서 선명한 색채로 시선을 깨우는 우고 론디노네의 야외 조각. / 이미지 출처: @maestrohsw
전시장을 나서 야외 조각정원을 걷는 시간도 뮤지엄 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이배의 검은 숯과 절제된 붓질을 충분히 바라본 뒤 마주한 우고 론디노네의 선명한 노란색 조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선을 깨웁니다. 짙은 녹음과 푸른 하늘, 거칠게 다듬어진 조각의 표면이 대비를 이루며 하나의 초현실적인 풍경을 완성합니다. 실내에서 숯이 품은 깊은 시간을 느꼈다면, 야외에서는 자연과 색채가 만들어내는 보다 직관적인 에너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글을 마치며
8월의 문화생활에는 반드시 화려한 축제나 대규모 공연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산속 미술관을 천천히 걷고, 하나의 재료가 품은 시간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계절을 새롭게 감각할 수 있습니다. 이배의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숯이라는 단순한 재료에서 불과 나무, 노동과 기억, 소멸과 생명의 이야기를 꺼내 보여줍니다.
도시의 여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날, 원주의 산과 안도 타다오의 건축, 이배의 검은 붓질 사이를 걸어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기다림이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곳에서는 조금 천천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시 기본 정보
뮤지엄 산 본관 입구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전시명 : 이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간 : 2026년 4월 7일~12월 6일
장소 : 뮤지엄 산 본관 입구, 청조갤러리 로비·1·2·3관, 야외 무의 공간
운영 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휴관 : 매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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