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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지가 꼭 유명 관광지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잔의 술이 도시를 선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습하고 뜨거운 일본의 여름이 지나면 다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온다. 이번엔 도쿄의 쇼핑몰이나 오사카의 도톤보리 대신, 조금 다른 목적지를 찍어보자. 바로 술이 태어나는 곳이다.
일본은 100년이 넘는 위스키 역사를 가진 나라다. 오랜 사케 문화 위에 위스키와 맥주까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익숙하게 마시던 술도 현지에서 맛보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술 한 잔을 핑계 삼아 떠나기 좋은 네 도시를 골랐다.
1.도쿄에서 두 시간, 숲 속에서 마시는 하쿠슈
크기와 형태가 다른 팟 스틸이 늘어선 하쿠슈 증류소 내부. 다양한 원액을 만들어 하쿠슈 특유의 향을 완성한다. / 이미지 출처: 산토리 공식 홈페이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던 위스키가 있다. 가격만 수백만 원을 훌쩍 넘기는 하쿠슈 25년이다. 그 술이 만들어지는 곳은 화려한 도쿄 도심에서 벗어난 일본 남알프스의 깊은 숲속이다.
하쿠슈 증류소는 산토리가 1973년 세운 두 번째 몰트 증류소다. 야마자키와 전혀 다른 성격의 원액을 만들기 위해 해발 약 700m의 숲을 선택했다. 이곳이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위스키 증류소처럼 하나의 맛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증류기를 이용해 여러 스타일의 원액을 만들고, 이를 블렌딩해 하쿠슈 특유의 청사과와 허브, 민트 그리고 은은한 스모크를 완성한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일본 남알프스의 하쿠슈 증류소. 해발 약 700m의 자연 속에 자리한 공간이다. / 이미지 출처: 산토리 공식 홈페이지
물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남알프스에 내린 비와 눈이 오랜 시간 화강암층을 통과하며 자연 여과된 연수를 사용한다. 증류소에 가보면 왜 하쿠슈에 ‘숲’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도쿄에서는 편도 약 두 시간을 예상하는 게 좋다. 그만큼 하루를 통째로 비워두길 권한다. 투어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경쟁도 제법 치열하다. 여행 날짜를 잡고 투어를 찾기보다는 투어 예약에 여행 날짜를 맞추는 편이 낫다.
기프트숍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증류소 한정 미니 보틀은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격이 두배 이상 뛰기도 한다. 위스키를 좋아한다면 한 병 정도는 여행의 전리품으로 챙겨야 한다.
예약에 실패했다면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다. 출국 전 공항 면세점에서 하쿠슈 한정 제품을 찾아보자.
2. 일본 위스키의 시작을 찾아, 오사카 야마자키
푸른 산과 숲 사이에 자리한 산토리 야마자키 증류소의 전경.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위스키 증류소로 알려진 곳이다. / 이미지 출처: 산토리 공식 홈페이지
오사카를 이미 여러 번 다녀왔다면 이번엔 도톤보리에서 조금 멀어져도 좋다. 교토 남서쪽에 자리한 야마자키 증류소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위스키 증류소다. 지금은 일본 위스키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야마자키를 방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료 투어를 예약하는 것이다. 생산 시설을 둘러보고 실제 원액을 맛보면서 우리가 마시던 한 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경험할 수 있다. 이곳 역시 예약 경쟁이 만만치 않다.
다양한 색과 숙성 연도의 위스키 보틀이 양옆으로 늘어선 야마자키 위스키 박물관 내부. 투어 후 테이스팅과 기프트숍도 함께 즐길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산토리 공식 홈페이지
투어가 끝났다고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박물관에는 유료 테이스팅 라운지와 기프트숍이 있다. 평소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위스키를 한 잔씩 맛보기에도 좋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증류소에서만 판매하던 200ml 위스키 한 병을 약 4만 원에 구입했다. 이후 리쿼숍에서 비슷한 제품에 붙은 가격을 확인하고 나니 아까워서 마실 수가 없었다.
술 여행을 조금 더 이어가고 싶다면 스이타의 아사히 맥주 공장까지 넣어보자. 공장 투어를 마치고 바로 받아 마시는 생맥주는 편의점에서 꺼낸 캔맥주와 분명 다른 경험이다. 낮에는 야마자키와 맥주 공장, 저녁에는 오사카의 바와 이자카야. 오사카는 술을 중심으로 하루를 짜도 꽤 완성도가 높은 도시다.
출국할 때는 간사이공항 면세점의 산토리 위스키 추첨도 확인해보자. 고숙성 위스키를 정가에 살 수 있는 마지막 복권 같은 찬스이다.
3. 일본 위스키 새로운 시작을 찾아서, 후쿠오카 신도
모던한 외관과 ‘Q40 DISTILLERY’ 레터링이 눈에 띄는 후쿠오카 아사쿠라의 신도 증류소. / 이미지 출처: SHINDO LAB 공식 홈페이지
후쿠오카는 짧은 일정에도 술 여행을 넣기 좋은 도시다. 공항에서 도심이 가깝고 하카타와 텐진을 중심으로 바와 리쿼숍이 몰려 있어 동선도 편하다. 그런 후쿠오카에서 최근 가장 흥미로운 목적지는 아사쿠라의 신도 증류소다.
신도는 대형 브랜드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아직 젊은 크래프트 증류소답게 여러 가지 실험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독자적인 효모를 활용하고 버번, 셰리, 미즈나라뿐 아니라 밤나무와 자사 럼 캐스크 등 다양한 숙성 방식을 사용한다.
구리빛 팟 스틸과 증류 설비가 자리한 신도 증류소 내부. 다양한 캐스크와 효모를 활용한 실험적인 위스키를 만드는 공간이다. / 이미지 출처: SHINDO LAB 공식 홈페이지
위에서 소개한 다른 증류소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신도는 이제 막 시작한 일본 위스키 증류소이다. 물론 사케를 오랫동안 생산해 왔던 경험으로 위스키 시장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후쿠오카 도심에서 약 한 시간 정도 이동해야 하지만 그 정도 수고는 해볼 만하다.
맥주까지 좋아한다면 기린 맥주 후쿠오카 공장도 함께 묶어보자. 생산 시설을 둘러본 뒤 이치방 시보리와 여러 종류의 맥주를 시음할 수 있다. 대형 공장답게 투어 동선이 잘 짜여 있고, 도심을 벗어나며 만나는 한적한 풍경도 의외의 재미다.
도심으로 돌아온 뒤에는 리쿼숍을 둘러볼 차례다. 필자가 후쿠오카에서 자주 추천하는 곳은 샴드뱅. 국내보다 매력적인 가격의 위스키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4. 석탄불로 위스키를 만든다, 삿포로 요이치
붉은 지붕과 석조 건물이 어우러진 홋카이도 요이치 증류소의 풍경. 니카 위스키의 역사가 시작된 공간이다. / 이미지 출처: 닛카위스키 공식 홈페이지
삿포로를 생각하면 눈과 맥주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를 더 기억해야 한다. 바로 요이치 증류소다. 니카 위스키의 창업자 다케츠루마사타카가 1934년 세운 첫 증류소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닮은 차가운 기후와 좋은 물을 찾아 홋카이도 요이치를 선택했다.
삿포로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기차를 탄다면 오타루를 지나 요이치역에 내려 조금만 걸으면 된다. 요이치의 가장 큰 볼거리는 지금도 이어지는 전통적인 증류 방식이다. 직선형 팟스틸과 아래로 향한 라인암을 사용하고, 무엇보다 석탄을 직접 넣어 강한 불로 가열하는 석탄 직화 증류로 유명하다.
작업자가 직접 석탄을 화로에 넣으며 팟 스틸을 가열하는 요이치 증류소의 전통적인 직화 증류 모습. / 이미지 출처: 닛카위스키 공식 홈페이지
효율만 생각한다면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번거로움이 요이치 특유의 묵직하고 선 굵은 증류주를 만들었다. 붉은 지붕의 석조 건물과 오래된 증류 설비 사이를 걷다 보면 술 공장이라기보다는 일본 위스키 역사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삿포로에서는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시내의 삿포로 맥주 박물관도 좋지만 공장 자체를 보고 싶다면 에니와의 삿포로 맥주 홋카이도 공장을 추천한다.
투어 끝에 삿포로 클래식까지 맛봤다면 저녁 메뉴는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양고기에 맥주를 주문해본다.
어쩌면 좋은 술 여행이란 많이 마시는 여행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추억을 술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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