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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다.
어디에 꽃이 피었고 어디에 단풍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아껴둔 연차를 달력 위에 조심스럽게 써보는 계절이다. 그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는 순간부터 여행은 이미 시작된다. 항공권을 검색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가볼 곳을 하나둘 저장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우리는 여행을 준비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쓴다.
우리에게 여행은 언제나 ‘이벤트’였다.
스무 살의 나는 시간이 많았다. 학기가 끝나면 두 달이 통째로 비었다. 대신 통장이 비어 있었다.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고, 돈이 없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정반대다. 통장은 조금 채워졌는데 시간이 도무지 비질 않는다. 회사에 다니고, 약속을 잡고,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일 년이 금세 지나간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나의 여행도 일 년에 한 번, 많아야 두 번이다.
해가 떠오르는 후지산 정상 부근에서 일출을 바라보기 위해 모여든 등산객들의 모습. 구름 위로 번지는 빛과 산비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어우러져,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여행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그래서인지 여행을 대하는 마음도 점점 진지해졌다. 일 년에 한 번뿐이니 얼마나 귀한가. 귀하니까 계획을 세운다. 항공권을 비교하고, 좋은 숙소를 찾고, 지도 위에 가볼 만한 장소를 하나씩 표시한다. 누군가 추천한 맛집과 꼭 봐야 한다는 명소를 저장하고, 이동 시간을 계산해 하루의 동선을 만든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여행의 상당 부분을 끝낸 셈이다.
문제는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조차 우리가 자주 시계를 본다는 것이다. 다음 일정에 늦지 않으려 서두르고, 긴 줄을 기다리고, 정해둔 장소에 도착해 사진을 찍고,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운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마음이 놓인다. 하나라도 놓치면 아쉽다. 그렇게 하루를 다 보내고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나, 오늘 제대로 쉬었나?’
분명 여행을 다녀왔는데 몸은 더 피곤하다. 새로운 곳을 많이 봤는데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느 순간 여행은 즐기는 일이 아니라 잘 ‘치러내야 하는 일’이 되어 있다. 휴가를 내고 떠났는데도 우리는 여행이라는 또 하나의 숙제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2박 3일 제주에 다녀왔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인 만큼 좋은 곳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가봐야 한다는 오름과 해변과 카페를 지도에 꽂고, 이동 시간까지 계산해 하루를 촘촘하게 채웠다. 아침에는 어디, 점심에는 어디, 오후에는 어디. 나름대로 꽤 완벽한 여행 계획이었다.
잔잔한 제주 바다 앞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물가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뒷모습.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풍경 속에서 특별한 일정을 보내지 않아도 바다 앞에 머무는 평범한 시간이 여행의 기억으로 남는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딸에게 남은 건 내가 애써 찾아둔 장소의 목록이 아니었다.
아이가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건 편의점에서 뽑은 포켓몬 음료수와 해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였다.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작은 가게와 숙소에서 함께 먹었던 간식, 차를 타고 가다 본 풍경 같은 것들이다. 애써 찾아간 오름도, 줄을 서서 들어간 카페도 아니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여행에서 오래 남는 것은 반드시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애써 계획한 순간보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순간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는 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사진첩을 다시 열어봤다. 사진 속에는 내가 정해둔 장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보다 딸이 조개껍데기를 들고 웃던 장면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지도에 꽂아둔 장소들은 사진첩에 남았고, 계획하지 않았던 순간들은 기억에 남았다.
얼마 전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의 여행을 봤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준비도 많지 않았다. 정해둔 게 없으니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골목을 걷다가 마음이 가는 곳으로 들어가고, 예상과 다르면 그냥 웃고 넘어간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미리 정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친 풍경을 그대로 즐긴다.
부러웠던 건 그가 간 장소가 아니었다. 그가 여행을 대하는 태도였다.
여행을 ‘잘 치르려’ 하지 않고 그냥 그곳에서 살아버리는 태도. 꼭 봐야 할 것을 놓칠까 걱정하는 대신, 눈앞에 있는 것을 천천히 바라보는 태도. 어쩌면 우리가 여행에서 잃어버린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이런 여유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차도, 돈도, 체력도 유한하다.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정해진 휴가 기간 안에 움직여야 하고, 항공권과 숙소를 미리 예약해야 하며, 한 번 떠난 김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시간이 없는 걸까.
어쩌면 없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쓰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주말은 매주 돌아온다. 금요일 저녁, 가방 하나만 챙겨 이름도 낯선 역에 내려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차를 두 시간만 몰아도 억새가 가득한 들판을 만날 수 있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처음 보는 동네와 이름 모를 항구를 마주할 수도 있다. 멀리 떠나야만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에는 여행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터키 여행 중 한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 사진을 작은 인화 사진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모습. 야자수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여행 중의 한 끼가 담긴 사진을 겹쳐 촬영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소한 장면 하나가 여행의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을 담았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우리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떠나보면 어떨까.
해외든 국내든 상관없다. 유명한 축제를 보러 가는 대신 그곳의 아침 공기를 느껴보고, 꼭 가봐야 한다는 명소 대신 시장의 소음과 처음 보는 간판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다. 검색해둔 맛집 대신 사람이 많아 보이는 집의 문을 열어보고, 길을 잘못 들었다면 돌아가는 대신 그 길을 조금 더 걸어보는 것도 좋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음식이 맛없을 수도 있고, 날씨가 좋지 않을 수도 있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이 생각보다 별것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괜찮다. 여행에서의 실패는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된다. ‘거기 음식 정말 별로였지’라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완벽하게 짜인 일정에는 없던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여행의 만족도는 어디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보다, 그곳에 어떻게 머물렀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건 결국 풍경이 아니라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오랜만에 눈을 크게 뜬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간판 하나를 바라보고, 골목 하나에도 잠시 멈춰 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낯선 곳에서는 새롭게 보인다. 아침에 문을 여는 가게의 소리, 길모퉁이에 놓인 의자, 현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작은 골목까지도 여행의 장면이 된다.
잠실 석촌호수를 배경으로 설치된 대형 포켓몬 캐릭터 조형물의 모습. 익숙한 서울의 풍경도 평소와 다른 오브제나 시선으로 바라보면 여행지처럼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글의 마지막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그런 시선을 챙겨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일상도 조금 달라진다.
늘 지나던 출근길이 새롭게 보이고, 매일 앉던 식탁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늘 보던 사람의 표정에서 전에 없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이 끝났는데도 여행에서 얻은 것이 남아 있는 이유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히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에 가깝다. 잠시 다른 장소에 가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 시선을 다시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 그렇다면 여행은 일 년에 한두 번만 허락되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은 이벤트다. 하지만 삶이 될 수도 있다.
거창한 계획이 없어도 좋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좋고, 며칠의 휴가를 내지 않아도 좋다. 이번 주말, 한 번도 내려본 적 없는 역에 내려 처음 보는 동네를 걸어보자. 평소라면 들어가지 않았을 작은 가게의 문을 열어보고, 목적지 없이 한 정거장 더 가보자.
일 년에 한 번 떠나는 사람에서, 언제든 낯설어질 준비가 된 사람으로.
이번 9월, 그 연습을 시작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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