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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계절이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항공권을 검색하고, 호텔을 예약하며, 낯선 도시를 향한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여행의 본질이 반드시 물리적 이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나는 경험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다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여름 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인 예술 여행지가 되었다. 세계적인 미술관의 개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까지, 서울의 미술관들은 하나의 도시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감각, 그리고 사유의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1.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에서 만나는 유럽 모더니즘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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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센터 한화 외관 조감도 / 이미지 출처: 퐁피두센터 한화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은 퐁피두센터 한화다.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기관인 퐁피두센터의 한국 거점으로 개관한 이 공간은 단순한 미술관 하나의 탄생을 넘어 서울 문화 지형도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에 가깝다.
개관전에서는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한 큐비즘의 탄생과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명한다. 미술사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과 이름들이 실제 공간 안에서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는 경험은 특별하다.
큐비즘은 단순히 그림의 형식을 바꾼 운동이 아니었다. 하나의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며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려 했던 시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복수의 시선과 다양한 관점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퐁피두센터 한화의 개관전은 과거의 예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여의도라는 금융 중심지에서 세계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만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다.
2. 국립현대미술관
서도호, 집과 기억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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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호 개인전 《Nest/s》, 집과 기억을 공간으로 풀어낸 대표 설치작품 /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서도호의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집은 물리적 장소인가, 아니면 기억과 관계의 총합인가. 빠르게 이동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의 작업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휴가가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면, 서도호의 전시는 오히려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여행에 가깝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기억과 삶을 돌아보는 경험은 어떤 해외여행보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서도호 《Fallen Star》, 이방인의 경험을 건축적 설치로 구현한 대표작 / 이미지 출처: 스튜어드컬렉션
특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Fallen Star>는 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반듯하게 정렬된 현대 건축물 사이에 낯설고 기울어진 집 한 채가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설치 작업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시선을 붙든다. 미국 유학 시절,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감정을 경험했던 작가는 그 감각을 하나의 공간으로 구현해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완성 과정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타인의 공감을 얻고, 공동의 프로젝트가 되어 실제 공간 속에 구현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작품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설치물을 천천히 멀어지며 비추고, 화면에는 'Fallen Star'라는 제목이 나타난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이 밀려왔다. 마치 우리 모두가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 떨어진 별의 파편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궤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 서도호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 작품을 보며 언젠가 나 역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서도호는 이렇게 답했다. "먼저 시각화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보이지 않는 것을 먼저 상상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일. 어쩌면 모든 창조의 시작은 그 단순한 과정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도호 《Karma》, 인간의 관계와 연결을 형상화한 대표 작품 / 이미지 출처: 필자 촬영, 서울옥션
또 다른 대표작 <Karma> 역시 인상 깊다. 수많은 인간 형상이 서로의 어깨 위에 올라가 끝없이 연결되는 작품은 한 사람의 존재가 결코 혼자 만들어질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수많은 인연과 선택, 관계와 시간이 있었고, 그 모든 연결 끝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서도호의 작품은 결국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들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그의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 된다.
3. 리움미술관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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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아 개인전 / 이미지 출처: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 역시 올여름과 가을을 잇는 중요한 목적지다.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구정아의 대규모 전시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정아는 빛과 향기, 공기와 자기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해 온 작가다. 그의 작업은 관람객에게 단순히 작품을 보는 경험이 아니라 감각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더 빠르고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정아의 작품은 정반대의 방향을 제안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익숙한 공간 안에서 미세한 변화에 귀 기울이는 것. 작품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마치 숲속을 천천히 산책하는 시간처럼 흐른다. 화려한 관광지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듯, 그의 전시는 관람객의 감각과 기억 속에 조용히 스며든다.
4.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가장 세련된 도심 속 아트 바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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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내부 / 이미지 출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마지막으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도심 속 가장 세련된 예술 휴가를 제안한다. 아모레퍼시픽의 공간을 방문할 때마다 늘 놀라는 것은 기업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소장품에는 단순한 수집을 넘어선 안목과 철학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한때 아모레퍼시픽에 투자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들의 컬렉션이 보여주는 문화적 가치 때문이었다.
뛰어난 건축과 공간 디자인, 그리고 수준 높은 전시 프로그램으로 이미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곳은 전시 관람 자체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작품을 감상하고, 건축 공간을 거닐고, 용산 일대를 산책하는 하루의 동선은 잘 구성된 여행 코스와도 닮아 있다.
글을 마치며
오늘날 휴가는 단순히 쉼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감과 시선을 얻고, 자신을 환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은 가장 이상적인 여행지일 수 있다. 올여름 서울의 미술관들은 우리를 파리로, 뉴욕으로, 런던으로 데려가는 동시에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만든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충분히 멀리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여행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가장 먼 여행은 시선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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