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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하는 순간 선명해지는 여름
물의 향연 /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쉬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 계절에 맞게 몸을 움직이고 싶은 시간이 왔다. 운동을 하다 보면 이상한 순간이 찾아온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세상의 소리는 잦아들며 귓가에 남아있던 소리 하나가 문득 선명해지는 순간. 배경처럼 흐르던 음악이 몰입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또렷해지는 경험이다.
이번 여름 스포츠에는 그런 순간에 어울리는 곡을 하나씩 준비했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곡들이고, 연주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다.
고요한 수면 위에서 리듬을 만들어가는 수영의 시간. /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쉬
고요한 수영장, 잔잔한 물결. 손끝이 수면에 닿는 순간 동그랗게 번져나가는 무늬, 파문(波紋). 레인을 왕복하는 동안 몸은 반복적인 리듬에 익숙해지며 머릿속은 서서히 비워진다. 집중해야 할 것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고 차오르는 숨을 정돈하는 일. 세차게 튀어오르는 물방울 소리와 달리, 수면 아래에는 고요가 흐른다. 그 적막은 일렁이던 마음마저 천천히 가라앉힌다.
♬ 모리스 라벨: 물의 유희
」Maurice Ravel: Jeux d’eau, M.30 (1901)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연주된 이 작품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이다. 반짝이는 물결과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피아노 한 대로 그려냈다. 복잡한 화성이나 형식을 알지 못해도 물의 감촉과 분위기만 떠올린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음악 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
빠른 랠리와 긴장감이 이어지는 테니스 코트. /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쉬
테니스 코트 위를 빠르게 오가는 노란 공. 랠리는 예측할 수 없는 리듬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스트로크에 맞춰 발을 옮기고, 공의 궤적을 따라 몸을 뻗는다. 서브 직후의 긴장감부터 예상치 못한 방향 전환까지, 한순간도 방심할 틈이 없다. 공 하나에 몰입하여 랠리를 이어가다보면 등에 흐르는 땀마저 잊게 된다.
♬ 모리스 라벨: <거울> 중 네 번째 곡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Maurice Ravel: IV. Alborada del gracioso (Miroirs, M. 43) (1905)
」라벨의 <거울> 중 네 번째 곡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는 스페인 음악의 색채를 담은 피아노작품이다. 기타를 퉁기는 듯한 날카로운 리듬과 변화무쌍한 전개는 랠리의 긴장감을 떠올리게 한다. 빠르게 몰아치다가도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힘 있게 달려나가는 흐름은 테니스 경기의 호흡과도 닮아있다.
일정한 호흡과 페이스를 유지하는 러닝 트랙. /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쉬
러닝은 언제나 출발 신호와 함께 시작된다. 출발선에 선 몸이 긴장하는 그 짧은 순간, 신호와 동시에 모든 근육이 앞으로 튕겨 나간다. 초반의 몸은 아직 가볍다. 페이스를 찾아가며 산뜻하게 나아가는 구간, 그 리듬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리보다 마음이 먼저 달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결승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엔 누군가 곁에서 발을 맞춰주는 듯한 착각이 든다.
♬ 모리스 라벨: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 제1악장 ‘경쾌하게’
」Maurice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 I. Allegramente (1931)
」곡이 시작하자마자 “짝!”하는 파열음이 울린다. 나무 타악기 슬랩스틱의 나무판 두 개가 부딪히며 내는 짧고 강렬한 소리, 협주곡의 출발 신호탄이다. 피콜로의 경쾌한 노래에 피아노의 글리산도, 트럼펫과 트롬본이 함께하며 시작을 축하한다. 곧이어 클라리넷과 피아노가 가볍게 리듬을 주고받으며 재즈풍의 선율이 흐른다. 곡이 후반부로 향할수록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점점 더 힘 있게 서로를 밀어붙이며, 마치 완주를 앞둔 이의 곁을 지켜주는 동행처럼 나란히 달려간다.
호흡과 균형에 집중하는 요가의 순간. / 이미지 출처: 펙셀스
요가 매트 위에 앉아 눈을 감고 감각만으로 몸을 살핀다. 깊은 호흡으로 몸의 구석구석까지 숨을 전달하는 시간. 고른 움직임을 통해 아침의 몸을 깨워내고, 하루를 살아낸 저녁의 몸에게 안녕을 전한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아사나, 그 흐름을 고르게 지탱할 수 있는 근력. 유연함 속 단단함, 요가가 추구하는 균형이다.
♬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Maurice Ravel: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1899)
」제목의 '죽은 왕녀'라는 표현 때문에 슬픈 곡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라벨 본인은 오히려 이 곡이 특정한 인물이나 이야기를 그린 게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오래전 스페인 궁정에서 어린 왕녀가 느릿하게 걷던 모습을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배경으로 흐르는 선율의 느린 하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벼워진 몸과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작곡가 , 모리스 라벨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프랑스 남부 시부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위스계, 어머니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불러주던 바스크 민요를 들으며 자랐다. 훗날 그의 음악 곳곳에 스페인적 색채가 짙게 남은 배경이다.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히지만, 드뷔시가 자유롭고 몽환적인 인상을 좇았다면 라벨은 정교하게 계산된 구조와 색채로 완벽을 추구했다.
오늘의 연주자 , 피아니스트 조성진
라벨의 작품을 섬세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 이미지 출처: 세계일보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정작 그의 연주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프랑스 인상주의를 다룰 때다. 라벨과 드뷔시 특유의 모호해 보이지만 실은 완벽하고도 정확한 뉘앙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듯한 감각을 구현한다.
2025년,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그는 독주곡과 협주곡 전곡을 모두 녹음했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그가 왜 이 모호함과 정확함 사이를 가장 편안하게 오가는 연주자인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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